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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가족 언론시사회
팍팍한 인생, 바람나면 살맛나지 | 2003년 7월 30일 수요일 | 임지은 이메일

티 하나 없이 말끔한 부엌은 ‘바람직한 가족’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바게트와 오렌지가 있는, 타일 한 장 한 장까지 럭셔리한 부엌. CF 같은데서 자주 울궈먹는 이런 장면에서는 으레 외모 번듯한 젊은 부부가 과시처럼 내보이는 행복한 웃음이 장식으로 곁들여지게 마련. 그런데 이 광경 한 번 보라. 이 말끔한, 가족의 삶의 터전인 부엌에서 불량한 자세로 걸터앉은 남녀라니. 게다가 이 사람들 부부란다. ‘남편 말고 애인이 필요해.’, ‘아내 말고 여자가 필요해.’ 보아하니 서로 동상이몽(同床異夢) 아닌 이상동몽을 꾸시는 중이다. 말 그대로 각자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에서 같은 꿈을 꾸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앞에서 묘사한 정경을 담고 있는 건 <바람난 가족>의 포스터다. 한참 궁금한 게 많아진 일곱 살 짜리 아들은 입양아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데 아빠는 일에 치여, 애인이랑 노느라 바빠 집에도 못 들어오고, 엄마는 옆집 사는 고등학생(시쳇말로 고삐리)이 거는 수작이 싫지 않은 눈치. 게다가 할아버지는 원수라도 진 듯 암팡지게 들이부은 술 때문에 세상을 하직하고, 한 번도 섹스하면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일없다는 할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사랑에 빠져 예순 나이에 인생의 활황을 맞는다. 아무리 이거 너무 콩가루다. 베지밀이다.

분개하는 사람들을 향해 영화는 눙친다. 누가 아니랍니까. 콩가루 집안이라니까요. 그리고 이어 던지는 질문.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비현실적인 행복이 흘러 넘치는 가족보다는 이게 우리네 현실에 더 가까운 거 아닌가요. 요컨대 이제 환부를 까 내놓고 다함께 들여다 볼 때라는 거다. 거기서 한 술 더 떠 이런 식. 바람 좀 피워도 결과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닌가요. 확실히 모두가 다 똑같이 살 수 없다면, 남들 하는 대로 사는 것만이 행복은 아닐 것. <바람난 가족>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변호사 영작(황정민), 아내 호정(문소리), 어머니 병한(윤여정) 등 바람난 가족 구성원과 바람난 가족들 때문에 슬픈 꼬마 수인(장준영), 김일성 찬가를 부르며 세상을 하직한 할아버지 창근(김인문)의 좌충우돌은 그 자체로 희극이면서 비극이 된다. 웃긴 비극, 슬프고 비참한 희극.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이라는 두 문제적인 영화들을 전작으로 내놓았던 임상수 감독은 2003년 다시 한 번 문제작을 내놓았다. 이상동몽(異床同夢)꾸는 가족들의 비참하게 웃긴 가족사 <바람난 가족>이 어제 언론 시사를 가졌다.

상영 전 임상수 감독, 문소리, 황정민, 봉태규, 백정림, 심보경 프로듀서와 명필름 심재명 대표 등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건넨다. 문소리는 매체를 장식한 “문소리 화끈 베드씬”류의 기사에 고초가 좀 있었던지 “도대체 얼마나 벗었길래... 이런 마음은 버리시고 영화를 즐겨달라”고 당부한다. 한편 <옥탑방 고양이>로 최근 인기상승한 봉태규(봉태규는 이 영화에서 문소리와 눈이 맞는 옆집 고등학생으로 분했다)는 “저 좀 잘했거든요.”라는 으쓱으쓱 자신만만 코멘트로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상영 후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오고간 질문과 답변들은 아래 간추려 소개한다.

Q: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임상수 감독: 1시간 40분 동안 일장연설을 한 기분인데 뭘 더 설명하겠나(웃음). 가족, 섹스, 여성심리, 윤리,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문소리: 가족 해체나 붕괴가 꼭 우려할 만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우리 영화는 바로 거기에 의미를 두고 있다.

Q: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눈물> 등 전작과 이번 영화는 공통점이 많은데?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던지 섹스라는 화두 등.
임상수 감독: 섹스에 관해서라면 이번 영화가 ‘섹스시리즈’ 완결편이다. 앞으로 나올 작품은 섹스는커녕 그 냄새조차 안 나는 영화다. 그리고 사회적인 맥락이 없는 얘기는 현재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Q: 결말이 오픈 엔디드인데, 만약 속편이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문소리: 나는 그 아이(극중 문소리가 봉태규와의 사이에서 임신하게 되는 아이)를 절대로 주씨 집안 호적에 안 올릴 거다(강경한 어조).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여러 모로 힘들겠지만 아이를 키우며 독립적으로 살겠다.
봉태규: 그 영국인지 프랑스인지 가서 살다가 나중에 애 있는 거 알고는 와서 떼 좀 쓰고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
황정민: 물려받은 피가 어디 가겠나. 그냥 살던 대로 살 것 같다.
임상수 감독: 아, 만약 내가 십대 때 영화 속 문소리씨 같은 여자를 만났으면 성정 면에서나 성생활 면에서나 여러 모로 참 풍요로워졌을 텐데 안타깝다. 황정민의 경우, 그 그릇에 비해 굉장히 큰 일을 당한 셈이다. 사람은 역경 속에서 성장하게 마련이고, 황정민이 연기한 영작도 조금은 성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Q: 아까 이 영화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로부터 이어지는 섹스시리즈의 완결편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완결됐다’는 건가?
임상수 감독: <처녀들...>에서 30대의 섹스, <눈물>에서 10대의 섹스, 그리고 <바람난 가족>에서는 모든 연령대의 섹스가 다 나오니 다 한 거 아닌가? (장내 폭소)

Q: 문소리에게 질문. <오아시스>와 이번 영화 작업에 있어 가장 다른 점이라면?
문소리: 우선 <오아시스>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다. 그 때 문소리는 없었다. 한공주가 있었을 뿐이지. 반대로 <바람난 가족>을 하면서는 나 자신, 나의 욕망을 솔직히 들여다보아야 했다. 실제로 그러려고 노력했고. 감독님들도 굉장히 대조적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 배우와 감독의 커뮤니케이션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임감독님은, 또 워낙 독특한 분이시니(웃음)... 만약 이 영화에 대해 소통이 안 된다면 그건 내가 그만큼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시원시원하게 얘기가 잘 풀려가더라. 그리고 굉장한 단도직입이다. “소리씨. 이 씬 어째 어벙한데.” “이 부분은 매력적이야.” 탁탁 곧바로 반응이 나오니까 그 말을 자꾸 마음에 담아두게 돼서 가끔 참 힘들더라. 이창동 감독님 같으면 “음.. 으음...” 하면서 2시간 동안 돌려 말하실 텐데(웃음). 그것도 참 답답하지만.

Q: 후반부 봉태규와 문소리의 섹스씬이 과장된 느낌인데.
임상수: 그건 각자 해석 나름이다. 각자의 성생활에 따라 다르겠지(웃음). 난 영화 찍을 때 오버를 늘 경계한다. 그 장면의 경우 내 생각엔 오버가 아닌 것 같은데.

Q: 봉태규에게 질문. 감독님한테 연기지도를 받았다는 기사가 있던데 어떻던가?
봉태규: 감독님은 특별히 말씀 없었다. 나도 앉아서 하는 리딩 같은 건 워낙 못해서... 커뮤니케이션은 잘 안됐던 것 같다(장내 웃음). 아, 섹스씬 할 때 감탄사에 대한 질문을 누가 했는데 어릴 때 “아싸!”를 “야르”라고 했었다. 친구들하고. 그 장면에서 그걸 한 번 써봤다.

Q: 가장 힘든 장면과 애착가는 장면은?
황정민: 호정과 싸우는 씬. 여자를 처음 때려보는 터라....
봉태규: 처음 하는 베드씬이라 기억에 남는다.
문소리: <오아시스> 때는 연탄가스 냄새 때문에 불도 못 때는 얼음장같은 방에서 촬영했는데, 이번엔 평창동 몇 십 억 짜리 집에서 뜨끈뜨끈하게 지냈다. 힘들 게 뭐 있었겠나.

Q: 문소리에게 질문. 고등학생과 연애를 하다니,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이 두렵지도 않은가?
문소리: 제가 무슨 괴한인가요?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랑으로 보듬어주려는데 애가 너무 궁금해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봉태규: 문소리씨도 피해자입니다. 주씨 가문의 피해자.
임상수: 덧붙여 극중 문소리가 봉태규에게 끌리는 이유는 소년이 한국 남성의 가치관을 아직 내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이라... 그럴 만 하다. 우리 영화는 그런 영화다.
문소리: 인정!
임상수: 인정!


취재: 임지은
촬영: 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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