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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 극장의 유언을 들려줘 I
이영순 칼럼 from USA | 2003년 8월 19일 화요일 | 이영순 이메일

우리는 언제쯤이면 당당하게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 근사한 퀴어 영화를 근사하게 보며 밀어를 속닥이고 근사하게 팔짱을 끼고 나오는 게이 커플을, 레즈비언 커플을 볼 수 있을까. 나는 화장실 때문에 가 본다는 최신식 모 극장에서 절름발이 퀴어 영화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번지점프를 하다>나 <게임의 법칙>의 비굴한 남창 게이의 엉덩이 대신 말이 필요 없는 이송희일 감독의 <언제나 일요일 같이>, <슈가힐>과 인디포럼 ‘96 공식 상영작이자 뉴욕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박동훈 감독의 <어머니>, 98년 뉴욕 동성애 영화제, 토론토 인사이드 아웃 영화제 출품작인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 제10회 상파울로 국제 단편영화제 특별 상영작인 김정구 감독의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등을 맘껏 울고 웃으며 신나게 보고 싶다. 그런 날은 권종관 감독의 <이발소 異씨>에 나오는 기혼 게이 이씨의 센 머리 터럭만큼 세월이 흘러야 하는 건가.

올해 퀴어 영화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퀴어영화제, ‘파고다 극장의 유언’이 3월달 열렸다. 하리수의 사회적 생명이 살고 홍석천의 사회적 생명이 죽었듯이 대형 극장은 살고 파고다 극장은 죽었다. 죽었다고 하기 보다 타살되었다고 해야 옳다. 홍석천의 사회적 생명을 우리가 죽였듯이 말이다. 파고다 극장은 20년간 퀴어들의 우울한 욕망과 오욕의 역사를 간직한 게토였다. 실존과 욕망의 해방 공간인 파고다의 유언은 닫혀있는 다른 공간에서 스크린에 보여주었다. ‘그 어느 누구도 차별 받아서도 안되며 함부로 차별 하지도 마라.’

매년 전세계적으로 약 150개의 크고 작은 동성애 영화제가 열린다. 그 중
올 9월 강원도를 닮은 도시인 인디애나주에서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양성애자),트랜스젠더) 영화제가 열린다 (http://www.queerasfilm.com/). 흥미로운 점은 개막 행사로 영화 포스터 2장을 약 10만원 미만부터 경매하는데 한 장이 재미 교포2 세 코미디언인 마가렛 조의 영화 <악명높은 조(Notorious C.H.O)>포스터이다. 그 포스터의 메시지는 ‘파고다 극장의 유언’의 부활과 같다.

‘미국계 미국인과 한국계 한국인이란 이따위 차별은 집어치우자. 무엇이 중요한가. 초점은 바로 백인 우월 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조의 별명은 여왕벌이다. 바이올린 없이 처음으로 카네기홀에 선 한국인이며 박세리 보다 TV에 잘 나오고, 각종 동성애 영화제 때 무대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그녀는 멋진 페미니스트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차별 받는 이들을 온 몸으로 껴안아 주기 때문이다. 만약 홍석천에게 평범한 게이 애인이 아닌 마가렛 조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퀴어영화제에서 방방 뛰며 날라다니는 연예인들은 왜 없었을까 아쉽다.

에디 머피와 찍은 <악명 높은 조>는 몸과 섹스를 소재로 그녀가 살아가면서 ‘뚱’이기에 받았던 육체적 차별을 토대로 만든 자서전적 영화다. 우리 사회에서 뚱은 이미 사회적 장애인이나 외계인 취급을 받는다. 무엇이 변태일까. 게이들이 레즈비언이 변태인가. 동성애자들이 변태라면 뚱도 변태다. 어디 뚱 뿐이랴? 파산 선고자도 변태다. 아예 무기 징역 받은 범죄인 취급을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이처럼 동성애자가 받는 성적 차별이나 동양인이기에 받는 인종차별이나 차별의 뿌리는 모두 같다. 다르니까. 그 다른 축의 힘이 소수이며 약하니까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성애 영화제는 이 팍팍한 호모포비아 세상 속에서 오직 살아갈 에너지인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그 뿌리가 생체로 뽑히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욕망들의 한 판 축제이다. 장구한 역사를 거슬러 흘러오는 지배적인 성의 정치적 도덕적 관습과 싸우는 이들의 신나는 몸짓이기도 하다. 불행한 건 서글픈 존재의 욕망조차 팔려지는 매체의 상품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

백 수십 개의 영화제 중 올 6월 가장 오래된 역사와 덩치가 큰 27회
샌프란시스코 동성애 영화제(SFILGF:San Francisco International Lesbian & Gay Film Festival) 이 열렸다. 출품작 중 다큐멘터리 분야의 루이스 호가스(Louise Hogarth)감독의 <선물(The Gift)>은 뉴욕 동성애 영화제에서 피터 바보사(Peter Barbosa)의 <나는 존재한다(I Exist)>와 공동으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으며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도 화제작이었다. 루이스 호가스감독은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인 <파나마 기만 행위(The panama Deception,1993)>를 공동 감독했으며 인권과 가난을 소재로 다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녀가 찍은 <선물>은 게이 커뮤니티와 일반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버그 체이서(bug chaser : HIV를 쫒는 사람)>를 다룬다. ‘선물’이란 에이즈 균을 말하는데, 명석하고 젊은 청년 도우그는 버그 체이서가 되어 중서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묻지마.말하지마’ 파티 모임에 가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특별하게 된다. 배어백킹(barebacking : HIV 감염위험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콘돔 사용 없이 추구하는 섹스 행위)후 에이즈 보균자가 되면서 그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분노, 아픔 등을 심리적 사회적인 면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심리 치료사 왈트 오데 박사는 에이즈 균이 에로틱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대해 미국인 4명이 매 시간당 에이즈 보균자가 되며 이 들 중 소수는 스스로 원해서라고 말한다. 잡지 롤링스톤즈는 <버그 체이서>를 선정적으로 취재함으로써 비난을 받았지만 어째서 누구나 공포스러워하는 HIV감염자가 스스로 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기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뉴욕 타임즈에서 TV 배우 하베이 페어스테인은 미국의 일부 젊은이들에게 버그 체이서가 되는 것은 성인식처럼 쿨하고 기묘한 부정적인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 의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동안 제약 회사의 빗나간 상술과 콘돔을 끼면 에이즈가 예방된다는 에이즈 예방 정책의 실패로 지적한다.

엄청난 빌리언 달러를 벌고 있는 제약 회사의 광고 속에 감염자나 보균자 모델은 섹시하고 건강하며 특별한 광고 이미지를 팔아댄다. 또한 양성애자는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닌 매체가 선호하는 상품의 재료로 전략했다. <선물>은 기존의 게이 영화처럼 에이즈 공포증으로 인해 절대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게이 코미디 로맨스인 <제프리>가 아니다. 균과 싸워대는 <필라델피아>의 톰 행크스도 아니며 수혈로 보균자가 되어버린 <굿바이 마이 프렌드>의 소년도 아니며 호모포비아 세상이 길러낸 몸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조차 누릴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을 가진 한 인간을 보여준다.

<선물>은 <델마와 루이스>나 <쥴 앤 짐>에서의 신나게 악셀레이터를 밟고 낭떠러지로 자살해 버리고 마는 영화 속의 이들처럼 배어백킹으로 생을 접고 마는 이들을 영화가 아닌 현실 속의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그 지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필름 느와르 시기에 만들어진 에드 우드의 <글렌 혹은 글렌다(Glen or Glenda ,1953)> 는 프랑켄슈타인 버전의 성 도착증 환자를 만들어버린 의사의 내면과 행위를 그린 B급 영화다. 에드 우드 감독은 실제로 여성 의복을 입고 다녔으며 영화 속에서 그는 사회가 구조화시키고 요구하는 성의 역할과 요구되는 도덕에 의문을 던지며 프로이드의 심리주의를 인용한다. 남자로 태어나서 남자의 역할을 요구받는다면 스커트와 금발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구분하고 변태나 도착증 환자로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카메라 샷을 날렸다.

그 때로부터 반 세기가 흘렀다. 잉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Persona)>, 피에르 피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라마(Teoreoma)>,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Belle de Jour)>, 끌로드 샤브롤의 <암사슴들(Les Biches)>, 루치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Morte a Venezia)>, 제임스 아이보리의 <모리스(Maurice)>등 많은 작품들이 동성애를 다뤄왔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은 남녀란 성의 이분법을 고착화 시키며 막다른 골목으로 양성애자를 내 몬다는 것이다. 보이 조지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게이는 섹스를 하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했다. 남자의 동성애를 뜻하는 게이(gay)란 말은13~14세기 프로방스 지역의 언어인 'gai'에서 비롯된 고어이다. 원 뜻은 '기쁨'이라고 한다. 그 기쁨이 기쁨인 날이 오길 바란다.

커밍아웃은 에미넴의 노래를 듣기보다 만 배 어렵다

같은 성끼리는 집에서 하는 애널 섹스도 오랄 섹스도 죄라고 규정한 텍사스 주의 소도미(Sodomy) 법이 1960년 후로 미 대법원에 의해 뒤집어진 건 올해 2003년 6월이다. 아직도 텍사스 주 외에 플로리다, 아이다호, 유타, 버지니아 등 13개의 주가 비슷한 소도미법을 적용한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들이 사랑할 때 우리는 재수없는 에이즈 보균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니 커밍 아웃을 한다는 것은, 가족이 아닌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벽장으로부터 나온 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요구된다.

할리우드 내에는 커밍 아웃을 한 감독들이 있다. 블랙 유머와 사회적인 풍자를
담은 <상류 사회>, <죽음의 경주(Death Race, 2000)>, <몰래 카메라(The Secret Cinema)> 등의 폴 바텔(Paul Bartel) 감독, <세실 비 디멘티드>, <포토그래퍼(Pecker)> 등을 만든 독립 영화감독 존 워터스(John Waters), 그리고 평생 할리우드에서 흥행과 장인 정신 사이를 넘나든 <미드나잇 카우보이>, <사랑의 여로>, <이노센트>의 존 슐레진저 감독 등이다. 이들 모두 돈과 명예의 멍에를 벗어나 할리우드의 옷장을 박차고 나온 용감한 감독들이다. <결혼 피로연>의 이안 감독은 영화 속에 커밍아웃(Coming Out)의 고통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감독이다.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보수적인 중국 부모와 본인의 성적 정체성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밀치고 싸워왔는지 마음이 무거웠더랬다. 어쩌면 그의 얼굴에 떠돌던 어두움은 상흔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년이었던가. 이송희일 감독은 매체에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나 인권과 상관없이 매체가 달아준 게이 감독이란 주홍 글씨에 매우 고문당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영화 감독이지 게이 감독은 아니다. 게이 감독이란 용어도 없다.

게이가 뜻밖의 기쁨이었던 것처럼 레즈비언이란 말은 무려 2500년 전 여성을 사랑한 그리스 시인 사포(Sapho)의 시에서 유래된 말이다.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는 이안의 <센스, 센서빌리티>, <하워즈 엔드>에 출연한 엠마 톰슨처럼 당당하게 1997년 '엘렌쇼'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동성애자 협회의 리더로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지만 할리우드조차 동성애자는 배역선정에서 차별을 받는다. 조디 포스터마냥 과거 레즈비언의 아이콘 역할을 맡으면 아예 레즈비언으로 본인의 사생활 보호를 목에 걸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하리수 격인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처럼 본인의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2002년 제5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게이 시트콤 < Will & Grace >가 다섯 개의 에미상을 타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여전히 감독이나 배우에게 있어 동성애자라는 꼬리표는 주홍 글씨다. 폴 바텔과 존 워터스, 단 루스 감독과 엠마 톰슨은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한 감독과 배우이다.

그럼에도 왜 엠마 톰슨이 결혼했을까. 그건 안젤리나 졸리가 양성애자이면서 어떻게 남편과 결혼하고 사냐는 질문과 같다. 디카프리오가 게이이고 비공식적인 커밍아웃한 적도 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는 너무도 흔한 가십거리이고 이들은 다시 그 가십을 먹고 산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공적인 연예인들이지만 ‘넌 남자니까 여자를 애인으로 둬야 해. 넌 여자니까 꼭 남자 애인을 둬야 해’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기나 한가. 마치 ‘넌 게이니까 사랑은 곤란하고 섹스만 해’라는 무식한 강요처럼 말이다.

1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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