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잊어 버렸는데 그들이 서울에 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개봉 1주년을 맞이해 ‘조제’역을 맡은 이케와키 치즈루와 이누도 잇신 감독이 내한한 것이다. 정확히 1년 전 나는 개봉관에서 그녀를 봤지만 이렇게 1년 후 무릎을 맞댄 채 조선 호텔 15층에서 마주앉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숨돌릴새 없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케와키 치즈루와 이누도 잇신 감독을 보고 있자니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10월의 마지막 주말을 제대로 즐겨보자고, 우선 남산타워에 올라서 서울 야경도 한번 보고, 맛있는 게장이 일품인 식당에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나 역시 방금 인터뷰가 끝난 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하는 게 어때요? 인터뷰라고 생각하지 말구요.” 통역을 통해 이렇게 양해를 구한 뒤 우리들의 짧은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네가 떠나고 나면 난 길 잃은 바닷속 조개처럼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돌겠지. 그래.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_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中
그래, 어쩌면 우리는 오사카의 이자카야에서 생맥주를 부딪히며 언젠가 또 만날 테니까.
이누도 감독: 본명이에요. 부모님이 어떤 뜻으로 지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누도 '라는 성은 큐슈의 쿠마모토 지역에 많이 있는 성이라고 알고 있어요.
이: <조제…>의 이번 재상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최신작이자 이번에 CJ아시아인디영화제에서 소개되는 <히미코의 집> 역시 초반 매진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구요. 한국에서의 이런 반응을 알고 계셨나요?
이누도 감독: 전혀 몰랐어요. 왜 매진됐지? (웃음) 그런데, 조제의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나요?
이: <조제…>는 장애인과 일반인 같은 설정을 떠나서 그저 평범한 연애에 관한 영화 같아요. 감독님이 초점을 맞춘 부분은 그런 것인가요?
이누도 감독: 예. 그런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설정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에요.
이: 이번엔 이케와키 양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케와키 양은 감독으로서 또는 각본가로서 몇 번이나 같이 한 걸로 알고 있는데 현장에서 보는 감독님의 스타일은 어떤가요?
이케와키: 현장에서 감독님은 거의 평상시와 다를 바 없지만 음… 뭐라고 할까 배우에 따라서는 좀 어려운 타입이라고 생각하는 배우도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반대로 저는 이누도 감독님의 스타일이 편해요. 음… 감독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가차없이 말을 하시는데 그게 배우 스스로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현장에서의 감독님은 일일이 지시하거나 호통치기 보다는 이 물을 마셔볼래, 아니다 그만 둘까, 그냥 됐어.. 같은 식의 정말 애매한 분이에요. (웃음)
이: 결국 배우 본인이 정하게 되는 거네요.
이케와키: 그런 셈이죠.
이: 역시 츠네오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가 멋지기도 하고 (웃음) 현실적인 결말이 와 닿았다고 할까 특히 마지막에 조제와 헤어진 츠네오가 갑자기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누도 감독: 츠네오가 우는 장면은 처음에 각본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각본가에게 그 장면을 넣자고 부탁했어요. 사실 20대 초반의 남자는 무력한 존재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20대 초반에는 자기가 힘을 가졌다고 믿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는 순간이 와요. 그 계기가 연애일수도 있고. 그 순간에 그렇게 연약하게 울어버리고 싶은 건 사실 남자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넣고 싶었지만 처음에 각본가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요. 아마 한국의 남자들도 대부분 그런 연약한 부분을 그대로 보이지 않는 편이지 않나요?
이: 네, 그런편이죠.
이누도 감독: 물론 일본의 남자들도 그런 약한 부분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런 거니까요. 아마 한국의 남자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겠지만 여자에게 그대로 보이지 않으려 하겠지요. 일본 남자들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는 여자 같은 면이 있다고 할까 그런 부분을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써 남자의 솔직한 기분을 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 이케와키 양은 텔레비전 드라마 작품을 비롯해서 이전의 작품들에 어리고 귀여운 이미지가 강했다면 <조제…>에서는 귀엽지만 동시에 성숙해진 느낌입니다. 배우로서의 ‘조제’ 는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이케와키: 제 이미지가 그랬나요?(웃음) 씩씩하고 성실하거나… 거기다 저는 얼굴도 목소리도 좀 어리게 보이는 편이라서 늘 그런 역할이 많이 들어와요. 제게 있어 <조제…>는 그것을 불식시켜준 작품이기도 하고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스스로 조제로 살아보고 싶어 고른 역이기도 해요.
이: 오사카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조제’의 오사카 사투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여주인공의 말투가 퉁명스럽거나 강한 느낌을 주는 연애영화로는 조금 의외의 이미지였거든요) 평소에는 어떤가요? 사투리라든가 따로 연습한 적이 있나요?
이케와키: 예. 제가 오사카 출신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네요. 물론 오사카에 가거나 하면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사투리를 위해 별 다른 연습은 하지 않았어요. 제 고향의 말투니까요.
이누도 감독: 난 이 영화에서 멋진 장면이 많이 있어요. 일단 멋진 것은 역시 츠마부키와 이케와키의 멋진 연기가 많으니까요. 찍으면서도 감탄한 걸요. 그리고 그 두 사람 이외에도 조연으로 나오는 우에노 주리, 아라이 히로후미 등 조연들도 굉장했어요. 연기에 대해서는 정말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준 것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가장 마지막에 조제가 생선을 굽는 장면이에요. 생선을 구우며 그걸 보고 있는 조제의 얼굴을 가장 좋아해요. 그 장면도 역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고 한번 밖에 찍지 않은 장면이에요. 그렇지만 이케와키라면 괜찮을 거다 할 수 있을 거야 같은 느낌이 찍을 때 있었어요. 그리고 감탄했어요.
이케와키: 나도 그걸로 할까요? (웃음) 하지만 자기 얼굴 보다는… 역시 공중 화장실에서 츠네오가 안아주는 장면일까. 그 장면에서 애정과 함께 이제 끝난 거구나 하는 느낌이 동시에 제 가슴에도 느껴졌어요.
이: 이케와키양은 영화로 볼 때는 좀 우울한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발랄한 이미지라 인터뷰 하는게 매우 즐겁습니다.(웃음) 영화를 본 후 원작을 읽었는데, 휠체어가 유모차로 변한 것이나 수족관이 러브호텔의 조명으로 변한 것처럼 부분부분의 설정이 원작과는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원작의 비중이랄까 원작의 존재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나요?
이누도 감독: 그렇게 보셨나요? 하지만 만드는 입장에서 본다면 굉장히 원작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제라는 인물을 본다면 역시 원작 안에 전부 들어있기 때문에.
이: 이케와키 양은 영화를 찍기 전에 먼저 영화의 원작을 읽었나요? 읽었다면 원작에서 받은 ‘조제’ 의 이미지와 스스로가 연기하고자 한 ‘조제’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케와키: 먼저 원작을 받았을 때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거 재미있으니까 읽어 봐. 그러면서 프로듀서 분께 가볍게 건네 받았어요. 그런데 원작의 한 부분에 조제를 ‘인형 같이 아름다운 여자’라고 비유한 부분이 있어서 설마 자신이 하게 될 거라고 생각치 못했어요. 그 후 일 년 정도 시간이 흘러 이 역을 맡는 걸로 정해졌는데 원작의 그 부분만 제외한다면 원작과 같은 조제인 것 같아요.
이: 하지만 그 부분도 관객들은 원작과 같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케와키: (무척 기빠하며)감사합니다.
이: 하하. 정말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누도 감독: (웃음) 굉장히 칭찬 받았는 걸.
이케와키: 다행이다. (웃음)
이: <조제…>에서 이케와키 치즈루의 헝크러진 머리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사랑스러운 캐릭터 조제 나 <히미코의 집>에서 맨 얼굴이지만 매력있는 시바사키 코우를 보면 배우의 매력을 굉장히 잘 살려주는 감독인 것 같아요. 배우의 어떤 모습을 담기 위해 신경 쓰고 있나요?
이누도 감독: 어렵지만, 배우 개개인이 모두 다르니까 실제로 상대에 따라 다른 방식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이케와키의 경우는 일단 먼저 그녀가 하려는 것을 기다려 주는 방식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죠. 기본적으로는 그런 두 가지 방식이 있고 그 사이에서 사람이나 신에 따라 또 조금씩 달라져요. 하지만 제게 있어서 가장 첫번째는 캐스팅을 잘 하는 것. 즉, 나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배우를 선택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고 있고 사실 그걸로 대부분 끝나기도 해요. 때문에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가능한 한 제가 직접 캐스팅을 하는 쪽이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제’는 씩씩하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연애가 끝나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지만 그녀의 씩씩한 모습은 왠지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조제’로서 결말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케와키: 결국 이런 것이 여자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
이: 그것은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이었나요?
이케와키: 음. 그것이 현실적이고 이별의 아픔이 보다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해요.여자란 강한 존재잖아요. (웃음)
이: <조제… > 나 곧 공개될 <히미코의 집> 같은 영화들을 보면 조금 다르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일상과 평범한 진실을 보여주며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은데 영화를 통해 어떤 것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이누도 감독: 글쎄요. 뭘까요? 제 영화들에 나오는 조제 같은 인물이나 예능인, 게이 같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것 같아요. 뭐라고 할까. 그들은 사람들이 평범한 생활을 하는 곳에서 떨어진 조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모두들. 예능인이나 장애를 가지고 혼자 사는 조제나, 게이들이 모여 사는 양로원이나, 모두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지금 같은 세계의 경계선 밖에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존재하는 이미지로 그 경계선을 넘어 누군가가 그 쪽으로 가는 내용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셈이에요.
제 영화에는 집이 무대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조제의 경우도 조제가 살고 있는 집이 있고 <히미코의 집>도 양로원이 무대고 <금발의 초원>에서도 80이 넘어서 자신이 20살 이라고 생각하는 노인이 사는 집이 있어요. 그리고 보통의 이런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경계선을 넘어 그들의 집으로 가요. 그런 다른 세계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거기서 어떤 관계가 탄생될까 그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경계선은 사라질까, 경계선이 사라지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의 사이에 경계선이 사라져갈까 그런 것을 보여준달까. 그런 걸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경계선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정하는 거예요. 내 세계는 이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경계선의 밖이라는 건 늘 존재하고 거기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경계선 없애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경계선을 없애는 그 간극에 존재하는 드라마를 보여주고 싶었달까. 가장 처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조금 다르지만 장 르누아르 의 <위대한 환영>이라는 영화의 마지막에 장 가뱅이 탈주해서 도망가는데 그 뒤를 쫓아온 사람이 총을 쏘려고 해요. 그런데 옆에 있던 남자가 쏘지 말라고 해요.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까 쏘지 말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서 있는 장면은 그냥 눈밭일 뿐이에요. 국경 같은 건 보이지 않고 그저 하얀 눈이 있는 풍경이 펼쳐질 뿐. 그런데 국경을 넘었으니까 쏘지 말라고 하죠. 그러니까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구나 그런 생각이 그 영화를 봤을 때 많이 들었어요. 국경 같은 건 없어 사람이 그렇게 정한 것일뿐.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자기들이 정한 것일 뿐 사실은 없다는 그런 걸 지금 제가 좋아서 만드는 영화에서는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 덧붙여서 이케와키 치즈루의 미소 퍼레이드 감상하시라!
취재_이희승 기자
사진_권영탕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