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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묵히고 지나가야만 하는 청춘의 한 때 <여름날> 오정석 감독
2020년 9월 9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어느 여름날. 서울에서 일하던 승희는 휴직계를 내고 고향 거제도로 내려간다.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특별한 목적 없이 보내는 시간은 단조롭다. 낚싯대를 들고 나선 등대 옆 잔잔한 바다에서 승희는 이름 모를 조선소 청년과 만난다. 우연한 만남으로 거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폐왕성(둔덕기성)에 오른다.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아름답지만, 멀고 아득하다. 친구나 연인이라는 통속적인 결속으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족’임을 눈치챈다.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로 그저 묵히고 지나가야만 하는 청춘의 한때를 보내고 있음을 말이다.

*사회적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전화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승희와 거제도 청년.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가.
두 사람은 낚시를 하다가 만난다. 친구라고 하기엔 좀 먼 사이고, 서로에 대한 호감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연인관계로 보기에는 좀 애매한 그런 관계다. 둘다 나름의 상처가 있고 외로움을 탄다. 거제도라는 공간을 같이 돌아다니면서 그런 마음을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제 청년이 승희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으면 했다.


승희는 서울에서 일하다가 휴직계를 내고 고향 거제도로 돌아왔다. 엄마의 유품을 다 정리하고도 한동안 그곳에 머문다.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데.
<여름날>은 대사 없이 장면 가이드라인 정도만 있는 시나리오로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의 실제 상황에서 많은 이야기를 가져왔다. 서울에서 계약직 생활을 했고 사람들 관계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던 개인적인 상황을 생각하면서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고, 가족에게 기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 나도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의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불안한 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관객이 느끼길 바랐다. 나도 그런 상태였으니까.

승희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늦잠을 자거나, 동네 시골길을 배회한다. 마을의 풀벌레 소리, 바다의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일상적인 감각을 더할 뿐, 자기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마음이 슬프다고 해서 매일같이 울지는 않는다.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둘 때도 있다.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승희가 우는 장면도 일부러 덜어냈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는 장면도 좀 생략했다. 승희의 뒷모습을 자주 보여준 이유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관객이 그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심심하다면 심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MSG 없는 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롱테이크 신이 꽤 많다. 지긋하고 은근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영화의 리듬이 다소 완만하게 다가온다. 보는 이의 시야를 확 끌어당기는 자극을 고민했던 순간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찍으면서 불안했다. 마치 영화 속 승희 심정 같았다. 주인공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과연 그게 무슨 감정인지 느낄 수 있을까? 그래도 실험적으로 연출해보고 싶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 돈으로 찍었기 때문에(웃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외부적인 압박이 없었다. 다른 시나리오를 제출한 제작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지 않아서 시작한 작품인데, 스스로 뭔가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원하는 방향대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승희와 조선소 청년은 거제도 유적지인 폐왕성(둔덕기성)에 오른다. 고려 의종이 무신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배지라는 공간은 거제도에 머무는 두 사람의 현재를 은유하는 것 같다.
폐왕성 아래로 펼쳐진 섬과 바다는 희미하다. 마치 승희가 걸어가야 할 미래처럼. 조선소 청년과 함께 올랐던 폐왕성을 승희 홀로 다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가 불안한 길을 계속해서 걷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만 승희가 유배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 그가 유배지에서 보내는 시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청춘에게는 기다려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깊은 슬픔에 빠진 승희는 조선소 청년을 만나러 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보는 내가 다 외롭더라. 대체 두 사람을 왜 못 만나게 한 건가!(웃음)
그 신을 구성했을 때 프로듀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 연락을 해서 만나면 되지 왜 거기에서 기다리냐고.(웃음) 승희의 복잡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조선소 청년을 만나고는 싶지만 어차피 자신은 곧 (서울로) 떠나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떤 관객은 (장면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미 두 사람이 만났을 거라고 해석하기도 하더라. 만난 건가, 안 만난 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호한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승희는 결국 서울로 올라가나 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승희가 마을을 떠나는 것까지 촬영을 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쓰지 않았다. 관객은 이미 그가 떠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를 시작하고 지금껏 배우면서 <여름날>만큼 자유롭게 만들어본 건 처음이다. 즉흥 연기, 직접 촬영 같은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나이 든 승희의 4계절을 보여주고 싶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같은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웃음)
승희를 연기한 배우가 곧 서른 살이 된다. <보이후드>처럼 배우의 실제 삶과 연계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웃음)



사진 제공_ 씨네소파 영화배급협동조합


2020년 9월 9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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