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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의를 믿는 건 촌스러운 일이 아닌 멋진 일” <어른 김장하> 김현지 감독
2023년 11월 17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준다는 생각도 없이 주었다는 기억도 없이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걸 나누는 것, 즉 집착 없이 남에게 베푸는 일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다. 이 무주상보시를 평생에 걸쳐 실천한 분이 있다. 진주 남성당 한약방을 60년 동안 지킨 한약사 김장하 선생이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지역의 존경받는 언론인인 김주완 기자가 지역의 힐러인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는 과정을, MBC 경남 소속 김현지 감독이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사회에서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뿐이라며 한결같은 기부와 실천의 삶을 살아온 김장하 선생, 선한 영향력의 힘을 깨달은 김주완 기자, 그리고 싸움보다 화해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게 어른인 것 같다는 김현지 감독. 세 사람이 전하는 이 시대의 어른론을 전한다. 김현지 감독을 만났다. 적자생존 각자도생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에도 인간의 선의를 믿는 건, 촌스러운 게 아닌 멋진 일이라 말한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즘, 단비 같은 작품이 아닌가 한다. 많은 이들이 <어른 김장하>를 보고 깊은 울림을 느낀다는 건, 나눔과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에 그만큼 목말랐다는 방증이 아닌가 한다. 어떻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건가.
김장하 선생은 진주를 기반으로 시민·사회 운동을 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한 분이었다. 진주 어르신들은 ‘남성당 한약방’ 하면 다들 알고 있고, 약이 좋고 저렴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당신이 언론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방송이나 취재는 일체 거절하셨어서, 엄두도 못 냈는데, 경남도민일보 기자였던 김주완 선배가 취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90년대인가 한 번 선생을 취재하려 했지만 못했고, 마침 조기 퇴직으로 인해 여유가 생겨 재개한다는 거다. 그래서 2021년 선배를 만나서 공동 취재를 말씀드리니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후, 하루 만에 오케이 받았다. 제안받고 나에 대해 좀 알아봤다고 하시더라. (웃음)
<어른 김장하> 스틸_김주완 기자
<어른 김장하> 스틸_김주완 기자

김주완 기자는 어떤 분인가.
지역에서 까칠한 기자, 무서운 기자로 소문난 존경받는 선배시다. 선배의 근현대사 강의를 듣기도 하고 평소 존경해 왔지만, 친분은 없던 차였다. 32년 기자생활 동안 어떤 기자인지 그 경력을 통해 증명해 온 분이다. 도시의 힐러(<어른 김장하>의 영어 제목은 ‘A Man Who Heals the City’ 이다) 김장하 선생과 지역 언론인으로서 존경받는 김주완 기자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김주완 기자는 사회의 부조리를 맹렬히 고발하고 비판하던 시기를 지나, 어느 순간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는 기사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른 김장하>는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좋은 사람이 이치에 맞는 옳은 일을 평생 실천한 아름다운 이야기’에 집중해 한층 ‘선한 영향력’을 확장한 모양새다.
김주완 선배의 말처럼, 개인이 살아가면서 좀 더 투쟁적일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고 그러다가 또 화해가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싸움보다는 화해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젊을 때는 들이받는 후배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웃음) 극단을 이야기하는 건 언론이 택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극단보다 어떻게 화합할지 고민하는 게 언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역방송은 지역 안에서의 소비만이 아니라 보편화해 지역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주변에서 <어른 김장하>를 통해 자부심을 느꼈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언행에 신중 하려 한다.

방송이 나간 후 김장하 선생을 진보냐 보수냐 이렇게 구분하려는 분이 있는데, 선생 당신은 정치적 해석을 싫어하신다. 1과 0으로 나눌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나, 보편적 상식을 꾸준히 지켜온 분이다. 그래서 <어른 김장하>를 청소년이 많이 봐줬으면 한다. 적자생존 각자도생 황금만능주의가 강조되는 세상이지만, 인간의 선의를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촌스러운 일이 아닌 멋진 일이라는 것! 서로 돕는 행위의 가치를 느꼈으면 한다.

‘김주완 기자가 취재하는 어른 김장하 이야기’라는 플롯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나아가면서 이견은 없었나. 보면 김주완 기자도 김장하 선생만큼이나 꼿꼿한 분으로 보인다. (웃음)
무조건 찬양 일색의 인물 다큐는 지양하자에 동의했고, 방법적으로는 모든 자료를 공유하고 각자 다큐영화와 취재기를 만들어 동시에 오픈하기로 했다. 다만 처음 조건이 ‘연출하지 말라’였는데, 방송 PD와 신문 기자가 생각하는 ‘연출’의 개념에 조금 차이가 있었다. 오프닝에 김주완 기자가 걸어 나와 의자에 앉아 다큐를 시작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선배가) 처음에 당황하면서 이게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셨다. (웃음) 이렇듯 업무 수행 방식이 달라 조금 낯선 부분도 있었지만, 덕분에 방향을 명확히 잡고 한계를 정한 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어른 김장하> 스틸_왼쪽) 김장하 선생, 오른쪽) 김주완 기자
<어른 김장하> 스틸_왼쪽) 김장하 선생, 오른쪽) 김주완 기자

존경해 온 선배와의 협업이라,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컸을 것 같다.
성덕(성공한 덕후)한 셈이다. (웃음) 김장하 선생은 지역사회가 존경하는 어른이고 김주완 기자는 존경받는 선배 아닌가.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두 분을 지켜봤던 것 같다. 촬영을 거부하는 인터뷰이(김장하), 연출을 거부하는 기자(김주완) 사이에서 나와 촬영 감독만 마음이 바쁘기도 했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러한 서로 다른 작업 방식으로 오히려 꼼꼼하게 크로스체크할 수 있었다.

김장하 선생이 김주완 기자의 질문에 입을 꾹 닫고 아무 말씀 안 할 때는, 지켜보면서 괜히 조마조마하고 긴장되더라.
마치 김주완 선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그렇게 긴장하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목을 긁적긁적하며 멋쩍어하는데 약간 재미있기도! (웃음) 사실 방송하는 사람은 오디오가 비는 걸 못 참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는 음악이든 뭐든 그 침묵을 메꾸려고 했는데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선생이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니 그 돌파구로 선생께 후원받은 장학생을 섭외해서, 그들이 선생을 찾아 뵙는 걸 취재하는 방식으로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평소의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데도, 장학생을 만날 때만은 환한 웃음이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심으로 반기더라.
장학생을 아끼는 마음이 워낙 크시다. 장학생 후원을 재단을 통해 한 부분도 있고, 개인으로 한 부분도 있는데 주변인들은 약 1,000명이 될 거로 예상한다. 이들을 모두는 아니라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공부 잘하는 수재만을 후원한 것이 아니라 여중, 여상, 공고 등의 장학생도 많은 게 정말 다양하게 도움을 주셨다. 그런데 여전히 장학생 명단을 공개하지 않으신다. ‘누군가는 숨기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형평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른 김장하> 스틸_김장하 선생
<어른 김장하> 스틸_김장하 선생

학교 설립,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 문화·예술 지원, 지역 언론 지원 등 사회·문화·교육에 걸쳐 다각도로 후원했는데, 그중에서도 형평운동(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은 선생이 평생을 걸고 실천하는 사명 같은 인상이다.
형평운동은 진주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가, 어느덧 100주년을 맞이했다. 지역에서 출발해서 전국화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서울 집중주의가 지금처럼 심화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렇게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30년 전, 그러니까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70주년에 선생이 이사장일 당시의 사진이 몇 컷 남아 있는데, 이때 선생이 카메라 앞에 나선 이유도 시민들에게 이 운동을 알리고 동참하기를 홍보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작업 내내 행운과 우연의 연속이었다고 밝히 바 있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가장 애정하는 인터뷰이인 강남선 선생이다. 김장하 선생이 사천에 처음 한약방을 열었던 당시 이웃에 살던 분으로, 선생보다 네 살 많은 할머니다. 그전까지는 인터뷰이 모두가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김장하 선생을 기억하거나 칭했다면, 이분은 ‘장하, 걔 잘 안다’면서 옆집에서 동생이랑 같이 살았고, 그때는 우리보다 못살았다고 하시는데… (웃음) 원래는 이장님을 섭외한 인터뷰였는데 우연히 걸려 인터뷰를 딸 수 있어서 기뻤다. 방영된 후 (김장하) 선생이 만나러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괜히 뿌듯했다.

꼰대가 아닌 어른이 그리운 시대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또 이를 위해 경계하는 부분이 있다면.
음…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지만, 최근은 ‘자기 연민이 없는 사람’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20대나 30대에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고 또 자기를 아낄 필요가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기보다는 주변을 더욱더 돌보고 안타까워할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경계하는 건, 매번 ‘모진 말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김장하 선생의 근황을 들려준다면, 많은 분들이 반가워하겠다.
지난해, 2022년에 60년 동안 운영하신 ‘남성당’ 한약방의 문을 닫고 은퇴하셨다. 시간적인 여유는 생겼지만, 일을 놓았으니 체력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운동을 열심히 하신다. 사모님과 함께 게이트볼처럼 공 한 개와 채 하나로 치는 파크 골프를 주로 하시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불백 산행’에 나가신다. 불백(불러주지 않으면 백수)은 지역에서 선생님을 따르는 분들의 모임이다. NC 팬이라 야구장도 한 번씩 가는 등 건강을 챙기며 가족들과 소소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 <어른 김장하>가 방영된 후 언론이나 매체에서 인터뷰와 수상 제안 등 여러 요청을 했으나 모두 칼 같이 거절하셨다.


사진제공. ㈜시네마달

2023년 11월 1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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