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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시네마 천국, 서울극장 고은아 대표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집니'는 고은아 대표가 故곽정환 회장을 부르는 애칭이다.


서울극장의 외양이 어딘가 달라보여요.
한꺼번에 엄청나게 바뀐 건 아니지만 서울극장은 끊임없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어요. 아마 로비에 있던 스탠드 테이블 때문에 극장이 더 변했다고 느낄 거예요. 그 전에는 극장 한복판에 의자가 있었거든요. 사실 그 의자가 우리에겐 참 고민거리였어요. 연세 높으신 분들 중에 영화 관람객이 아닌데도 극장에 와서 머무시는 분들이 조금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의자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잖아요. 하여튼 지금은 그 자리에 스탠드 테이블을 뒀는데 아마 의자가 없어진 것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종로 주변이 옛날과 달리 많이 낙후한 것 같아 안타까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도시가 확장하면서 신도시가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지역이 신식의 콘셉트로 따라가면 그것도 좋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각 지역마다 그 곳의 특색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최근에는 신구 두 지역이 함께 조화를 이뤄가는 추세인 것 같아요. 잊혀진 옛날 거리도 찾아내고 그 속에 담긴 역사를 발견하는 일들도 많아졌어요. 살다보면 사람들이 종로의 추억도 찾게 되겠죠.

선배들 말로는 서울극장에서도 예전에 언론시사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영화의 유통 구조가 지금과 달랐거든요. 한 극장에서 하나의 영화만 상영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서울극장이 가장 좋은 작품을 많이 확보하는 영화관 중 하나였으니 시사도 많이 했죠. 하지만 지금은 동네마다 극장이 들어섰고 유통망도 달라졌어요. 특정 극장에 가야만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서울 극장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영화가 있었으니 시사도 많이 했죠.
대표님이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1억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그런데 서울극장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인연이 있었던 걸로 알아요.
벌써 20년 전의 일이에요. 그때는 영화제를 처음 개최하는 거라 전체적인 예산이 굉장히 적었나봐요. 그런데 우리 집니가 영화제는 첫 회가 성공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며 첫 회가 성공해야 2회, 3회로 이어지고 영화제를 키워나갈 수 있다고 그랬대요. 그렇게 첫 기부자가 되신 거죠.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다른 기부자가 생겼나봐요. 그런데 그분은 늘 그랬어요. 지금은 서울국제사랑영화제로 이름을 바꾼 서울기독교영화제도 이제는 꽤 횟수가 되는데, 회장님이 첫 기부자예요. 그건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서울극장은 매년 큰 액수의 적자를 내고 있다 들었어요.
맞아요. 밖에서 보면 여유가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극장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대한 재산세가 해마다 올라가는데 그 액수가 사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땅을 팔지 않으면 극장에서 나는 수익은 사실 관객에게서 비롯된 게 전부라 한계가 있는데 세금은 계속해서 오르기 때문에 적자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그리고 극장을 유지하는 데는 여러가지 비용도 발생하기 때문에 수익이 매년 증가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적자를 줄이기 힘들어요.

그런 상황에서 적지 않은 액수를 기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어렵죠. 그리고 만일 영화제 측에서 먼저 기부를 요구해 왔다면 절대 기부를 안 했을 거예요. 사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일년에 한 번씩 영화제를 하나보다, 정도로만 영화제를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터넷 기사를 통해 영화제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강수연씨가 공동 위원장에 임명됐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돌아가신 회장님이 만일 살아계셔서 영화제가 어렵다는 걸 아셨다면 당연히 기부를 하셨을 거예요. 처음 출발할 때부터 지켜봐 오셨으니까요. 그래서 기부는 내가 했다기보다 영화를 너무나 사랑했던 그 분이 당연히 했을 법한 일을 내가 한 것일 뿐이에요. 그리고 후원이나 기부는 기부 자체가 소중해서 해야지 손익을 따지기 시작하면 절대 못해요. 가진 게 이것 밖에 없는데, 이걸 주면 내가 가진 것이 이만큼 줄어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평생 기부 못해요.

하지만 적자가 해마다 늘어나면 압박을 느끼실 텐데 그런 상황에서 선뜻 기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요(웃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또 너무 대책이 없었나, 라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농담이에요.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우리 집니도 그렇게 살았고 저도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니까요.
기부 이외에도 곽정환 회장님이 생전에 실천해 온 것 중 유지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극장 자체죠.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극장을 지켜나가는 것이 그분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자 아내인 제가 해야 되는 일이에요. 아들이 나중에 무엇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지금은 아들이 서울극장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옛날부터 하던 대로 자금 돌아가는 걸 관리하고요. 각자에게는 주어진 다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집니가 어쨌든 서울극장을 혼자서 지금만큼 일궈놓았으니 그걸 할 수 있는 한 잘 유지하는 게 우리 몫이죠.

서울극장은 다른 영화관과 달리 극장 특유의 정서가 느껴져요.
맞아요. 다른 곳은 쇼핑몰이나 특정 건물을 들어간 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이동을 해야 영화관에 도달할 수 있지만 서울극장은 마당에 들어오면서부터 극장이 시작되니까요.

대표님은 아버지때부터 극장을 운영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태생적으로 영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살아온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그럴 수 있죠. 그렇게 본다면 우리 아들은 외가 쪽부터 시작해서 3대째 극장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고요. 하지만 사실 저희 아버지는 처음부터 극장을 하신 분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업을 하시다가 극장을 인수하시고 그걸 돌아가실 때까지 했던 거죠. 저는 부산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혼자서만 서울에서 극장을 하셨고 가족은 모두 부산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셨죠. 전시가 지나고 서울을 수복한 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극장 사업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아버지는 6.25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오는 걸 모두 보셨기 때문에 가족은 절대 서울에서 살면 안된다고 생각하셨거든요. 그때만 해도 안정적인 시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방학 때라야 서울에 올라와 극장을 봤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극장사업을 한다는 게 전혀 실감이 안 났어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다니면서 실감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극장을 운영하시는 아버지가 있다는 정도로만 인지했어요. 내가 영화배우를 하기 한 두해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가족이 극장에서 모두 손을 뗐거든요. 그리고 남편과 함께 서울극장을 시작한 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어요.

어떻게 해서 영화배우가 되신 건가요.
그건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픽업된 뒤, 관계자들에게 끊임없이 설득 당해서 한 작품만 하기로 한 게 이렇게 이어지게 된 거예요.

영화배우의 삶은 어떠셨나요?
후회냐, 만족이냐,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연기를 할 당시에는 영화에 대한 그 어떤 기본적인 지식도 없어서 힘들었어요. 영화배우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 중에는 영화사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엄청나게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난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였어요. 지금처럼 입시 정보가 많았던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영화배우가 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연극영화과를 나오거나 적어도 배우학원을 다녔더라고요. 하지만 나는 아무런 교육받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를 시작한 거라 늘 힘들었어요. 기본도 모르는 내가 눈치로 배우며 연기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연기를 그만 둔 것에는 별로 미련이 없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어요. 보통 사람들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추억거리를 가졌다는 거! 그건 나에게 굉장히 좋은 거라 생각해요. 배우생활을 잘 했든 잘 못했든, 그런 기간이 나에게 있다는 건 소중한 것 같아요.
활동을 그만두고 난 뒤 연기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영화를 하다가 한 동안은 TV 드라마를 꽤 오래 했어요. 영화는 낮밤없이 촬영을 하지만 그 당시 TV 드라마는 지금처럼 야외 촬영이 많지 않았고 스튜디오 촬영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는 드라마를 했어요. 그런데 처음 활동을 그만두고 한 1~2년 동안은 드라마를 볼 때 순간적으로 저 프로그램은 내가 해야 될 일, 내 역할이였는데, 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어요(웃음). 늘 함께 일하던 PD와 작가의 작품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촬영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촬영이 그만큼 힘들다는 걸 사전에 알았더라면 시작도 안 했을지 몰라요.

어떤 면이 그렇게 힘드셨나요.
촬영 환경이 지금보다 더 열악한 시대였어요. 선배들은 더 했겠죠. 그런데 나는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거든요. 부산에서는 눈이 오거나 야외에서 얼음이 어는 걸 보는 일이 드물었어요(웃음). 끽 해야 바람 부는 것 정도였는데 촬영할 때는 눈 속에서 마구 뒹굴어야 되는 데다가 후황까지 틀어가며 눈바람을 날리니 그 추위가 상상을 초월했어요(웃음). 밤 세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지만요. 태어나서 서울 올 때까지 눈을 딱 한 번 봤거든요. 그런데 첫 작품 첫 신을 대관령에서 스키타는 장면을 찍었어요. 196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스키 타는 인구가 어딨어요. 일단 리프트가 없으니까 스키를 매고 산으로 올라가야 됐는데 산 위에서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 있다가 확 밀더라고요. 산을 넘어지면서 내려오면 스키를 가지고 다시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몇 번만 그렇게 산을 오르내리면 해가 져요. 천지를 둘러봐도 눈 밖에 없어서 어디 앉을 곳도 없고, 그런 촬영 환경이 적응할 수가 없었어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드셨던 거군요.
네. 춥다고 해서 나를 위해 뭐 하나 이뤄지는 것도 없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면서 산을 내려와야 했어요(웃음). 또다른 한 가지는 배우가 되고 나서 생애 첫 인터뷰를 했는데 나와 상관없는 질문에도 대답을 해야 되더라고요. 지금도 서울과 지방 사이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조금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어요. 그래서 부산에서는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에 가는 걸 제외하면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무슨 영화가 감명 있었냐, 어떤 배우를 좋아하냐, 자꾸 묻는 거예요. 도대체 아는 배우가 있어야죠. 그런데 저를 뽑은 영화사에서 저더러 여배우는 피어 안젤리, 남자배우는 제임스 딘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나와 잘 어울린다며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나는 피어 안젤리가 무슨 영화에 나왔는지도 몰랐어요.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나온 영화를 EBS에서 제목도 모르고 봤죠(웃음). 지금도 배우의 얼굴은 기억 안 나요. 그렇게 두 배우의 이름을 외우느라 혼줄이 났는데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대학생 때였는데 내가 모르는 것까지 구태여 거짓말로 인터뷰를 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지금은 셀프 디스까지 유행하는 세상이지만 60년대에는 영화가 유일한 대중 오락이었기 때문에 배우에게 포장은 필연적인 시대였거든요. 그런 문화가 이해는 됐지만 저와는 잘 안 맞았어요.
영화가 유일한 대중오락이었다고 말씀하시니 생각났는데 예전에는 서울극장의 매표소 줄이 흥행을 짐작하는 바로미터였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왜냐하면 오락문화가 오직 영화 밖에 없었으니까요. 자가용도 지금처럼 많지 않은 시기였고, 놀이 시설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이 영화관 뿐이었기 때문에 영화가 개봉할 때면 서울극장 앞에 극장가 코너를 돌아서까지 줄을 길게 섰어요. 그래서 흥행여부를 짐작하려면 서울극장 마당에 와야 했어요. 예전에는 예매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직접 극장에 와서 줄을 선 뒤 표를 사야했거든요. 극장에 온 건 1 시라도 남아있는 표가 5시 영화라면 5시 표를 사야했어요. 지금처럼 몇월 몇일 몇 회에 상영할 영화를 좌석위치까지 선택해서 표를 사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영화표를 샀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그렇죠? (웃음) 그리고 매표는 일일이 표에 도장을 찍는 수작업 형태로 진행했어요. 매표가 전산화 된 건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이나 되어서예요. 그때도 통합 전상망이 아니라 극장내부 전산망에 불과했고요. 예를 들면, 서울극장에서 표를 몇 번에서 몇 번까지 입고해서 몇 장 팔고, 몇 장 남았는지를 기록하는 정도였죠. 통합전산망이 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 당시는 극장이 주변을 번화가로 만드는 데도 영향을 많이 미쳤겠어요.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오면 상영이 시작할 때까지 어디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요. 서울극장이 근방을 변화시켰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왔다가 극장 내부로 들어오기도 하고 일대를 다녔던 거죠. 지금은 줄이라는 게 전혀 없는데다가 극장에 와서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잖아요.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암표 파시는 분도 많았어요. 그분들은 가족과 지인들을 총 동원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 표를 샀어요. 그리고서는 저 멀리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5,000원 짜리 표를 10,000원에도 팔았던 거죠. 하지만 우리는 누가 암표상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지금은 암표도 완전히 사라졌죠.

손님이 몇 명 왔는지 모두 수작업으로 세어보던 시기가 너무 먼 옛날처럼 느껴져요.
맞아요. 그리고 티켓은 아무데서나 프린트 되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지정한 곳이 있었어요. 우리는 몇 장의 표를 프린트 해야 되는지를 정하고, 표가 입고가 되면 구청에 등록을 해요. 표는 완전히 밀봉된 박스에 담겨 도착하고요. 세금하고 연결이 되는 문제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표를 찍을 수 없거든요. 다른 곳에서 찍은 표를 100만 장 팔아놓고 정상적인 표는 적게 팔았다고 신고하면 탈세잖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수불장(물건의 입고와 출고에 대한 내역을 기록한 문서)에 몇 번에서 몇 번까지는 몇월 몇일 몇회의 표라는 걸 모두 기록했어요. 전산이 되면서 모두 사라진 거죠.

그때의 수불장은 폐기처분 했나요? 남아있다면 영화극장 문화의 사료로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찾으면 창고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우리도 상영관이 늘어날 때마다 사무실을 정리하다보니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요.
극장은 지난 50년 동안 정말 많은 변화를 겪은 장소예요. 예전보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이 많이 사라졌고요.
많이 사라졌죠. 포스터 그리는 사람 없어졌죠, 매표수도 줄었죠, 영사 기사님도 더 이상 안 계세요. 옛날에는 모두 필름으로 상영했기 때문에 관마다 영사 기사님이 한 사람씩 붙어서 한 회 상영하고 나면 필름 릴을 휘리릭 감았거든요. 지금은 릴 상영을 할 수 있는 대형 화면이 서울극장을 비롯해 몇 군데 없는 걸로 알아요. 그래서 지난 번에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때 필름으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겠다고 서울극장에 찾아온 분들도 꽤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고 지금은 대부분 디지털로 상영되기 때문에 소스만 넣어주면 그만이죠. 그래서 영사기가 모두 없어졌어요. 우리 극장에도 영사기가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전시만 해 놨어요. 그러고보니 기획실 선전부도 없어졌네요. 옛날에는 극장 안에 선전부가 있어서 신문에 실릴 영화 포스터의 동판을 우리 직원들이 직접 오리고 붙여서 만들었어요(웃음). 간판도요. 한 영화과 개봉하려면 예고 간판이 한 번 올라가야 되고 본 간판이 한 번 올라가야 돼요. 예고 포스터와 본문 포스터도 만들어야 하고요.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 심재명 대표도 그런 포스터를 만들었던 건가요?(웃음)
아니요(웃음). 그건 밑에 아이들이 하는 거고요. 지금은 용어가 글로벌화 됐지만 예전에는 모두 기획실이라는 이름 대신 선전부라는 이름을 썼어요. 극장이란 이름도 서울극장과 대한극장 뿐이고 나머지는 CGV나 메가박스라고 부르잖아요. 네, 심재명 대표도 있었고 이준익 감독도 서울극장에 있었죠.

경영인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디지털화 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을 내보내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미안했죠. 하지만 점점 디지털화되가는 과정에서 본인들도 새로운 기술을 노력해 배워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필름을 다뤄오셨기 때문에 변화에 적응을 잘 못하셨어요. 안타깝긴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한계라는 걸 아시기도 했고요.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뭔가요.
글쎄요(웃음). 지금까지 너무 좋은 영화를 너무 많이 상영했어요. <미션>도 있었고 <사랑과 영혼>도 있었네요. 1979년부터 극장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한 극장에서 하나의 영화만 상영할 때라 좋은 영화는 서울극장에 모두 있었어요.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에서 거의 모든 영화들이 시작했죠.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어떤 영화들이 스쳐지나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과 영혼>은 서울극장이 처음으로 직배를 시작한 외국영화에요. 제가 영화관에 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외국영화들이 많이 들어와 있던 시기라 그때의 상황이 궁금해요.
세대가 다르니 모를 거예요. 결국 시장개방의 문제인데, 어디든 이해관계가 얽힌 곳은 변화가 생길 때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직접 나와 일을 할 때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 직배 반대 운동이 엄청났다는 건 알아요. 직배가 들어오면 한국영화가 굉장히 위축될 것라고 생각해서 스크린 쿼터 사수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 당시 개방에 대한 문제는 꼭 영화계만의 변화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정책적인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단지 영화는 문화라는 특수함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알려진 사안이 됐던 것 같아요. 직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해외 영화사의 지사들이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었거든요. 영화 시장개방은 국제적인 균형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와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였죠.

시장이 커지자 90년도에는 대기업이 영화 시장에 손을 뻗었어요.
삼성도 들어왔고 대우도 들어왔었죠. 제일제당은 후반에 삼성이 빠져나가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왔고요. 시장이 커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자본이 이기는 거니까요. 제작, 배급, 상영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자본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 능력이 없는 곳이 우리는 형편이 이러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본들 아무 소용 없는 거죠. 어쨌든 삼성은 처음에 극장 형태로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삼성은 그 자체의 극장을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상영관을 빌려 대관 형태로 운영했어요. 예를 들면, 지금 서울극장에 들어와 있는 아트시네마 같은 개념인 거예요. 하지만 곧 빠져 나갔어요. 대기업이 할 업종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IMF가 겹치면서 대기업이 영화시장에서 손을 뗀 걸로 알아요.
IMF 보다는 비디오 시장이 무너지면서 복합적인 이유로 손을 뗀 거라 볼 수 있을 거예요. 당시 비디오 시장이 굉장히 컸거든요. 대우 비디오가 엄청났잖아요. 그리고 대기업이 처음 사업에 진출했을 때는 지금과 영화제작 과정이 많이 달랐거든요. 영화는 몇 달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데다가 다른 공산품처럼 원가 개념이 뚜렷하지 않잖아요. 지금은 많이 투명해졌지만 그때는 얼마가 어디에 사용됐는지, 얼마를 투자해야 얼마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요. 그때는 영화를 모두가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요. 배우들 개런티를 제외하면 그날의 진행비나 필름 사용비는 주먹구구가 많았죠. 그러니 투자 하는 사람과 제작하는 사람과의 이해관계에 있어 괴리가 너무 큰 거예요. 투자하는 분은 본인이 투자한 10억이 어디에 사용됐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성과는 보이지 않고 촬영분의 반도 못 찍은 것 같은데 돈은 이미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죠. 좀 과장되게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과도기를 거쳐서 모두들 제작에 있어 도사가 된 거고요. 우리 회장님도 쭉 제작을 해오셨지만 투자자본하고 제작이 만나는 과정에서 지금의 제작 시스템과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나중에는 제작을 거의 중단하셨어요. 연세도 높으셨고요.
어떤 부분이 잘 맞지 않으셨나요?
우리 회장님 생각은 당신 돈을 들여 만든 영화니 손해를 봐도 당신이 봐야 되고, 이익을 봐도 당신이 봐야 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제작자는 빠지고 투자자만 손해를 보라고 하는 게 못마땅하셨던 거예요. 손해에 대한 책임을 투자자에게 넘기면 제작비는 무한정 늘어나기 쉽잖아요. 그런 시스템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회장님은 평생을 자기 돈으로 제작하신 분이었거든요. 하지만 시장은 이미 투자자본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었죠. 일장일단이 있는 거겠죠. 투자제작으로 영화의 규모가 커질 수도 있는 거고 또 반대로 그래서 투자가 건실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요. 그래서 회장님은 <그놈은 멋있었다>를 마지막으로 제작을 안하셨어요. 그 영화도 본인이 순제작 한 거예요.

회장님은 생전에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를 어떤 기준으로 정했나요.
예전에는 한 극장에 하나의 영화만 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걸어야 했어요. 그 이후에는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영화가 극장에 들어오는 형태로 바뀌었고요. 요즘은 시사회를 가는 이유가 영화의 상영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영화에 관객이 어느 정도 들지를 예측해서 어떤 상영관에 어떤 영화를 걸지를 정하러 가는 거죠. 예전에는 회장님이 영화를 직접 고르셨죠. 한참 홍콩 영화를 수입했을 때는 직접 영화사에 가서 영화를 전부 보고 밤을 세워 영화를 골라 오셨어요. 그때는 지금같은 빅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동물적인 감각으로만 영화를 고르셨죠.

지금은 시사회에 누가 가나요?
대부분 기획실장이 가고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 부사장이 가고 그러더라고요.

서울극장을 제외한 종로 주요 극장이 모두 이름을 바꾸거나 사라졌어요. 전성기를 함께 누렸던 다른 극장들이 사려져 가는 걸 보면 느낌이 또 남다를 것 같아요.
그럼요. 그런데 도시가 확장하고 상권이 변하는 건 유행이 돌 듯이 되풀이 되거든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저희는 극장 사업을 주어진 천직처럼 알고 살아왔고 극장만 바라봐 왔거든요. 세월이 지나서 또 번화할 수도 있겠죠.

더 이상 대기업이 관장하지 않는 멀티플렉스는 생기기 힘든 것 같아요.
이제는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사실 하면 바보죠. 세를 내고 쇼핑몰 속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땅에 극장을 한다는 건 힘들 거예요. 100평, 200평의 땅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같은 상황이 많이 부담되시겠어요.
당연히 부담 되죠. 하지만 어떻게든 노력해 타개해 나가야죠. CJ나 메가박스 극장 같은 경우는 모두 쇼핑몰 속에 들어가 있잖아요. 그분들은 계약으로 건물안에 들어간 거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빠져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본인 극장을 가진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쉽게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극장 건물 자체가 구조적으로 일반 건물과 달라요. 서울극장의 구조는 건축의 발전과도 연관이 있거든요. 층고 자체가 일반 건물과 다르죠.

충무로와 종로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서울극장과 대한극장 뿐이에요.
대한극장도 아버지 때부터 운영하던 거니까요. 대한극장도 원래 극장과 제작을 모두 했거든요.

서울극장과 대한극장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두 극장이 영화에 대해 갖는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는 절대 이야기 못해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애정이 더 많겠죠. 어떻게든 이어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지금은 대부분의 경우 극장이 자본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잖아요. 그래서 선대로부터 물려 받지 않고 본인이 시작한 사람들은 하다가 사업이 잘 안 되면 팔거나 극장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많죠.

오랜 기간 지켜본 서울극장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시겠어요.
곱씹어 보라 그러면 애착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특별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건 아니에요.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시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부분이거든요.

서울 극장이 다른 극장들과 달리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살아 남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하고 있죠. 그리고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고 하니 살아남으려고 해야죠.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면 살아왔으니까 살아있는 거지, 살아 남기 위해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한 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참 애매모호한 말이지만요. 회장님이 돌아가신 지 채 2년이 안됐는데 그분은 오직 영화 하나밖에 생각 안 하셨던 분이예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분이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대로 따라 왔어야 했고요. 우리는 그 분 뜻을 받들어서 이걸 유지하는 거고요.
회장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우리 회장님은 바보 같을 정도로 영화말고는 아무것도 생각을 안 했어요. 오직 극장이었지 영화 이외의 것에는 단 한번도 눈을 돌린 적이 없어요. 제작, 영화 상영, 배급을 모두 했지만 영화라는 큰 울타리 바깥을 기웃거린 적이 없어요. 극장이 아닌 곳은 땅을 사 본 적도 없고요. 서울 장안에서 서울극장 옆에 붙어 있는 땅만 사서 여기까지 넓혀져 온 거예요. 사람들이 어떤 지역에 곧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분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보세요. 서울극장이 집을 몇 채를 사야 이렇게 될 수 있겠어요. 어마어마한 집채를 사서 여기까지 늘린 거죠. 말 그대로 극장이 커가는 걸 지켜본 거예요.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극장이 커져나가는 걸 봐 왔다면 아무리 생활의 일부처럼 받아들여 감흥이 무디다 해도 극장에 대한 애정이 엄청날 것 같아요. 내 새끼 같을 것 같고요.
당연하죠. 서울극장은 대한극장이 가지고 있던 세기극장에서 출발했어요. 그때는 개봉관이 있고 재개봉 관이 있고 3번관이 있던 시절이였는데…

잠시만요.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해 재개봉관, 3번관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잘 안 돼요.
이해가 안 되나요(웃음)? 한 극장에서 하나의 영화만 상영했던 시절에는 개봉 극장에서 먼저 영화를 상영한 다음 2번관으로 옮겨 상영해요. 2번관은 극장 요금이 뚝 떨어지죠. 그러다 영화가 내리면 3번관으로 옮겨 동시 상영을 해요. 그러면 더 적은 돈을 내고 볼 수 있어요. 대신 영화 두 편을 보여주죠.

원 플러스 원 같은 거군요(웃음).
그렇죠. 하지만 그때가 되면 벌써 화면에 비가 와요(웃음)

필름이 닳은 거군요.
맞아요. 필름으로 상영했던 시절은 영화과 2번관에 가면 이미 많이 달라져 있고 3번관에 가면 줄이 찍찍 가죠(웃음). 회장님은 재개봉관이었던 세기극장을 사서 개봉관으로 만드신 거죠. 그런데 조연 배우가 주연 배우되는 건 참 어려워요. 항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 배우는 조연이라는 인식이 있어 주연하기가 힘들어요. 마찬가지로 재개봉관에 개봉관의 이미지를 심는다는 건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에요. 대부분의 경우 주연은 처음부터 주연으로 출발하거든요. 그런데 회장님은 세기극장에 서울극장이란 이름을 달고 극장을 완전히 수리하고 작품을 갖다 붙여서 개봉관으로 만드신 거예요.

서울극장은 한국 최초의 복합상영관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처음에는 단관이었던 서울극장의 층을 높여서 3개관의 멀티플렉스로 만들었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던 집들을 사서 4개 관을 더해서 총 7개 관을 만들었어요. 그런 뒤 다시 옆에 있는 집들을 사들여서 또다시 4개관을 추가해 모두 11개의 상영관을 만들었죠. 이게 1979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극장의 이야기에요. 회장님은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옆을 보지 않으시고 영화만 보셨던 분이에요. 상영관을 늘여서 겨우 적응할 무렵이면 또다시 옆에 있는 집들을 사서 끊임없이 극장을 확장해 나갔어요. 그런데 사실 극장 주변에 있는 집들을 하나 둘 씩 사 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집들이 한꺼번에 싹 팔고 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마지막 집은 알박이처럼 절대 안 팔려고 하기도 하고요(웃음). 그러면 회장님은 그걸 또 힘들게 설득해서 극장을 넓혀나갔어요. 그 작업에 자신의 정열을, 모든 걸 바친 거죠. 그러니 다른 사업을 하자, 뭐 이런 생각이 전혀 없었죠.

그분이 서울극장에 갖는 애정은 정말 말도 못하겠어요.
그럼요. 그러니 살아계신 동안에 다른 사업을 하자는 말은 감히 꺼내지도 못했어요. 그건 그 분에게 있어선 쿠데타였어요(웃음).

그런 회장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셨을 텐데 어떻게 저러실 수 있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그때는 영화가 잘 되던 황금기였잖아요. 그러니 그냥 영화를 하시나보다 했죠. 그리고 처음부터 영화를 하던 사람을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진 적이 없어요. 영화를 안 하던 사람이 영화를 하면 왜 이런 걸 하나,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회장님은 처음부터 영화를 천직으로 알고 살던 분이거든요. 이번에도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곽정한 씨 이름으로 남겨 놓은 땅이 한 평도 없어요(웃음). 향후 몇 년 안에 개발되는 택지라든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웃음).
옛날에는 극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는데 이제는 극장 문화도 향유보다는 소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아쉬워요. 예전과 비교해 관객과 극장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많죠. 어쨌든 예전에는 사람 손을 여러 번 거쳐야 했으니까요. 표를 살 때 매표원하고 한 번 이야기 해야지, 상영관 들어갈 때 수표원과 이야기 해야지, 심지어 극장 내부를 안내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어렸을 때는 영화관 안밖에 매점이 있는 게 아니라 목에 조그만 가판대를 두르고 오징어 구이 같은 걸 손님 사이를 걸어다니며 파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는 편의점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시절이 너무 바뀌어서 대부분은 식음료를 편의점에서 사서 들고 오죠. 서울극장에도 예전에는 층마다 매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1층에 자판기만 있어요. 인건비와 기타비용을 생각하면 비효율적이니까요. 사람들이 더 이상 극장에서 머물지 않으니 그런 시설이 필요없게 된 거죠.

기억나는 단골 손님이 있나요?
사실 기억을 잘 못해요. 옛날에는 바쁠 때 직접 내려와서 팝콘 파는 것부터 이것 저것 도와주기도 했지만 사실 얼굴은 기억을 잘 못해요. 너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거든요. 오히려 지금은 조금 알아요(웃음). 영화가 바뀔 때마다 오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지금은 연세 높으신 분들을 위한 가격이 또 따로 있어서 그런지 자주 오세요.

서울극장은 다른 극장에 비해 영화표가 저렴한 편인 것 같아요.
수익율은 적어지지만 어쩔 수 없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마케팅 일환이긴 하지만 서울극장이 영화과 학생들에게 영화표를 할인하는 걸 보니 훈훈했어요. 한국의 영화 발전과 함께 하는 것 같고요.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기획된 건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살아계셨을 때는 영화과 학생들의 작품 발표를 가끔 했던 것 같아요. 워낙 극장에서 많은 일들이 돌아가다 보니 그런 부분까지 모두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요.

영화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나 힘든 순간이 있다면요.
특별한 일이 기억난다기보다 매표소 밖으로 줄이 길게 섰을 때는 제작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너무 고마워요. 그 감사함은 정말 말로 다 못해요. 그런데 관계자들이 극장 앞을 애타게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애써 만든 영화의 매표 창구에 줄이 하나도 없으면 내가 다 미안해져요. 지금은 집에서 컴퓨터로 관객수를 확인할 수 있으니 현장에 올 일이 없어 실감이 덜하죠.

영화를 연출하거나 제작한 분들이 서울극장 앞에서 초조해 하는 모습이 상상되네요.
그럼요. 제가 서울극장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마당에 있는 CCTV를 보면 창구 하나는 줄이 길게 뻗어 있는데 다른 창구 하나는 줄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었어요. 그럴 때면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CCTV 화면에서 손으로 한 쪽 창구의 줄을 뚝 떼어서 다른 쪽으로 밀어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니까요.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영화가 관객의 호응을 받으면 저도 제작자와 똑같은 기분으로 너무 감사하고 보람돼요. 반대로 관객이 안 들면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그 분들 가슴 아픈 게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요. 그러니 작품이 좋았으니, 작품의 완성도로 승부봤으니, 손님은 안 들어도 된다는 건 너무 고상한 이야기예요. 작품이 좋았으면 기왕에 손님이 들어야 그 사람도 다음 작품을 할 거 아니에요.
지금 이 사무실에 걸려있는 포스터가 모두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인가요? (합동영화사는 故곽정환 회장이 설립한 영화제작사다.)
우리가 직접 제작한 영화가 150편이 조금 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사무실에 걸려 있는 포스터의 스틸도 우리가 모두 돈을 주고 산 거예요. 당시에는 이런 사진 자료를 확보해 놓지 않았거든요. 따지고 보면 이 포스터들은 모두 옛날에 우리 회사에 소속돼 스틸을 전적으로 찍던 사람이 찍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모두 회사 작품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은 지적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만 그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진사들이 포스터의 네거티브를 모두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필요한 스틸을 그들에게서 장당 가격을 치르고 사야 되고요. 그러니까 결국 영화는 영상자료원에 있고 이런 부가 자료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예전 작품은 대부분 그래요.

뭔가 억울하네요(웃음).
그렇죠? (웃음) 네거티브(negative)도 제대로 보관하지 않을 때니까요. 예전에 합동영화사에서 <경찰관>이라는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얼마 전 종로 경찰서에서 그 영화가 굉장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을 가져왔죠. 그런데 사운드는 모두 있는데 네거티브가 한 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영화 중간에 갑자기 대사만 들리고 암흑 화면이 보이는 거죠. 그런데 그분들은 그런 개념을 잘 모르시니까 그래도 괜찮다면서 그래도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보게 해 드려야죠. 실장에게 옛날 영화는 보관이 잘 안됐기 때문에 권이 없을 수 있다는 설명을 잘 해드리라고 일렀어요. 옛날 작품은 네거티브나 사운드가 전부 없는 경우가 참 많거든요.

필름을 보호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아요.
지금은 영상 자료원에서 모두 보관해요. 그래서 우리 작품을 반출해서 쓰려면 반드시 우리에게 허가증을 받아야 하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99% 허가를 안 해주죠.

왜요?
지방에서 영화제를 한다 그래서 이만희 감독, 임권택 감독과 같은 감독들의 작품을 반출해주면 반드시 영화가 다운로드 형태로 돌더라고요. 지난 번에는 국방부 측에서 우리 영화를 허락없이 사용해서 저에게 아주 혼이 났어요. 결국 제가 법적으로 처리를 했는데 알고보니 청계천 시장까지 유통단계가 몇 단계에 걸쳐 있더라고요. 그들은 영화가 그런 불법적인 단계를 거쳤다는 걸 모르죠. 그저 영화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자신에게 판권이 있다고 하니 영화를 사용한 거죠. 그런 경우들이 자꾸 생겨서 이제는 옛날 작품들의 반출은 제가 99% 안해줘요.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이 극장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군요.
그럼요. 옛날 작품들에는 더 지장이 많죠. 얼마전에도 대학교 친구가 심심할 때 보라면서 카톡으로 파일을 보냈더라고요. 열어보진 않았지만 굉장히 많은 수의 영화가 있더군요. 얘가 지금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에게 보내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 친구도 어딘가에서 받았으니까 그 파일을 저에게 보낸 걸 텐데 말이에요. 제목도 모르는 옛날 영화들이 10편 넘게 들어왔어요. 옛날 영화가 저런 식으로 도는 거죠.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실리를 떠나서 이런 식으로 작품이 도는 게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일 것 같아요.
맞아요. 게다가 우리는 제작으로 출발했고 작품이 있으니 의미가 또 다르죠.

벌써 너무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지금은 기계가 하는 일이다 보니 중간에 오류가 나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상영해야 하지만 옛날에는 영사 기사님들이 각 관마다 늘 지키고 있다가 영화가 중간에 끊기면 마이크로 죄송하다 이야기하고 필름을 붙여서 끊어진 곳부터 다시 상영했어요(웃음). 이제는 그런 게 없죠.

스텐벡(steenbeck) 편집기가 극장에 있다길래 의아했어요.
회장님이 편집을 하셨거든요. 편집 하는 걸 너무 좋아하셨는데 편집을 잘하세요. 필름을 탁하고 끊으며 손목을 튕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해요.

회장님을 직접 뵙진 않았지만 정말 멋있는 분이셨을 것 같아요.
그냥 영화가 너무 좋은 사람. 그런 분이었어요.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가 서울극장에 둥지를 틀었어요.
맞아요. 하지만 각 극장의 관객은 완전히 달라요. 서울극장이 이것도 반, 저것도 반, 이렇게 상영하면 색깔이 없어지니까요. 아무리 크로스 오버의 시대라고 해도 클래식 노래 하나 부르고 대중 노래 하나 부르고 이럴 수는 없잖아요. 어쩌다 한 개는 모르지만요(웃음). 어쨌든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영화를 상영하는 분들이 서울극장에 장소를 찾으신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영화라는 장르는 같으니까요. 한 공간 안에 모두 있다는 건 좋은 거죠.
대표님은 사무실에 언제 또 나오시나요.
내일도 나와야죠. 매일 9시면 사무실에 나와요.

연세도 있으신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25년 이상을 해 오던 일이라 안 나오면 어색해요.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
극장사진제공_서울극장

1 )
kagetsu35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잘봤어요!!   
2015-12-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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