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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우리의 일상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파스칼 로지에 감독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 김도형 기자 이메일


너무 무시무시한 영화를 만든 거 아닌가?(웃음) 보는 내내 너무 무섭더라.
영화만 그렇다. 나는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다.(웃음)

잔혹한 표현이 범상치가 않다. 일반 공포영화라고 보기에도 좀 낯설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원래 공포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공포영화 마니아다. 공포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공포영화의 팬이고 보는 관객도 공포영화의 팬이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어떤 밀실에 들어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즐긴다. 그래서 좀 새로운 걸 시도해 보고 싶었다. 뭔가 탈출구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마터스>를 만들게 됐다. 공포영화라는 밀실에서 빠져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내용이나 표현 방식 모두 굉장히 강하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나?
가장 주된 것은 당시의 개인적인 상황이었다. 시나리오를 구상할 당시 어두운 심리적 환경에 있었고, 그런 심리적인 환경을 가식 없이 표현해보고 싶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해서 최대한 솔직한 방법으로 나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설마 평소에도 이런 엽기적인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웃음)
개인 취향이 그렇지는 않다.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고통과 고통을 연결하기가 쉽다. 그때는 굉장히 강한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였다. 그 고통이라는 것도 물론 상징적인 것이고 간접적인 표현이긴 하다. 당시에는 고통에 근접해 있어서 고통 자체를 표현하기가 쉬웠다. 평소에 그렇게 엽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난폭하고 폭력적인 이 사회를 굉장히 멋지고 기분 좋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여자가 중심이다. 심지어 가브리엘의 집은 남녀의 역할도 바뀌어 있다. 여성 중심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나?
항상 여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에 나왔던 미아 페로와 같은 캐릭터를 좋아했다. 소위 말하는 패션 잡지나 방송 미디어에 소개되는 겉보기에 치중한 여성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내면이 훨씬 더 정직하고 그런 것을 표현한 여성상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나는 동성연애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자들하고 일하는 게 훨씬 더 즐겁다.(웃음)

영화에서 절대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뉘앙스가 많다. 루시, 안나, 가브리엘 등 캐릭터 이름도 그렇고, 마지막 안나의 모습도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신이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무신론자이고 종교적인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통이나 희생, 순교 같은 것들이 종교와 관련된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없어진 시기에, 마담이라는 캐릭터처럼 종료를 대신하는 어떤 집단이 생긴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미래 공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만든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종교적으로 해석되지는 않더라. 고통 자체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대가에 대한 강박도 느껴졌다. 큰 대가를 위해서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나?
이 영화는 사람을 고문하는 영화가 아니라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매일 우리가 살면서 일상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영화는 그것을 과장해서 극단적인 고통을 보여주긴 하지만, 고통 자체는 사람이 살면서 항상 느끼게 되는 일상적인 것이다. 근데 그 고통에 대가가 없다면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을 거다. 영화를 준비하며 조사를 해보니, 신이 존재하는 문화건 아니건 간에 그런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 다른 차원을 경험한다는 개념은 어디나 존재했다. 결국 고통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희망을 만든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고통이 아무런 명분도 없고 대가도 없는 것이라면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고통을 통해서 다른 경지에 갈 수 있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보여주고 싶었다. 안나의 경우도 극단적인 고통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큰 고통을 통해서 무엇인가가 얻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얻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 종교적인 개념을 만들어 낸 거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공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 추상적인 개념으로 ‘고통을 견디면 해탈의 경지에 간다’는 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바람이다.

그 해탈이 사후세계인가? 그렇다면 사후세계는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
사후세계나 해탈에 대한 동경이 딱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건 그저 도달하는 도달점으로 삼았다. 당시에 나는 개인적 고통이 너무 심했다. 고통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생존한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고통을 이겨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 고통이라는 것이 존재할까?’하는 고통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지금도 그 관심은 계속 된다. 고통이 있는 삶을 살아도 현재를 즐기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죽고 나서의 세계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프랑스가 전 세계에서 우울증 약의 최대 소비국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고통이나 우울증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 겁을 내고 있다. 내 영화는 어떻게 보면 프랑스가 처한 사회적인 공포증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 상영 금지될 뻔 했잖나?(웃음)
그러게.(웃음)

안나의 눈으로 카메라가 빨려 들어가는 장면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안나는 보통의 희생자들과는 달리 고통을 모두 이겨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도달한 경지에서 보는 것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들일 거다. 결국 안나만이 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쉽게 말해 이런 거다. 똑같은 것을 봐도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는 다르게 보인다. 안나가 보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지화시켰다.

고통을 이겨내야만 다른 경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한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이 처한 사태가 그런 거지 내 영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다른 차원을 알기 위해서는 죽어야 되는데,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영화롤 통해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덜한 것 아닌가?(웃음)
성격은 유쾌해 보이지만 인간사를 보는 시선은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것 같다.
내면으로 보는 세계는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만날 우울증을 나타내서 사람들을 괴롭힐 수는 없으니까. 이 영화를 보고 고통을 통해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불편했다면, 매일 TV 뉴스를 통해 나오는 것들로 인한 고통은 어떤가? 매번 고통을 당하지만, 그 사람들은 대가를 받지 못 하잖나. 전쟁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은 너무 많다. 그런 영화들은 그들의 주제와 관련된 진짜 고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피부가 조금만 벗겨져도 아플 정도로 항상 고통을 느끼며 사는데, 그것에 대한 언급 없이 전쟁이나 사회에 대한 추상적인 얘기만 한다.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마도 관객이 불편했다면, 짐작컨대 고통에 대한 선과 악의 분별을 정확하게 해주지 않아서 일거다. 나는 그런 판단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불편했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데 나는 이 사람이 좋고, 이 사람이 나쁘다는 도덕적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에 대해, 왜 고통을 느끼고 사는 지를 다루고 싶었다. 도덕적 판가름을 이미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반응이 나온 것 같다.

‘불편하다’는 표현은 이미 당신이 무대 인사를 하면서 썼던 말이기도 하다.
그런 표현을 쓴 것은 내 영화가 극단적이고, 확실하게 관객을 둘로 나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포영화라는 것은 어쨌든 극과 극으로 관객을 나누는 것이 맞다. 아니라면 모든 사람을 다 아우르는 코미디나 즐거운 드라마 같은 걸 만들어야지. 관객을 극과 극으로 나누는 것이 공포영화의 에센스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많이 한 배우들이 아니다. 연출의 의도나 방향이 잘 전달됐나?
딱히 촬영을 하면서 어떤 지시를 하진 않았다. 배우들을 잘 리드한 부분은 촬영 전에 두 달 동안 같이 있으면서 영화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를 해봤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연극도 해보고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촬영 때 배우가 감독에게 거리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편하게 웃고, 울고, 실수도 하는 사이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중요했다. 두 달 동안 배우들이 감독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담감 없이 같이 살다시피 지냈다.

안나가 지하실에서 고통을 당하는 장면은 페이드 인/아웃의 반복으로만 이루어졌다. 보는 사람이 같이 겪는 듯 실감이 났다. 대사도 없는 반복적인 장면인데 너무 무섭더라.
안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은 단계가 중요했다. 고통의 과정을 점층적으로 높이면, 관객이 느끼는 고통의 수위도 조금씩 높아진다. 관객에게 고통을 초월한 다른 경지는 아니더라도, 영화를 받아들이는 심경에 변화를 느끼도록 의도한 것이다. 마지막을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으로 구성한 것은, 이 영화는 끝에서 쿨하고 재미있는 영화가 되어 공포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못되고 잔인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만 몰두했다면 의미가 나빠지고 모두가 불편했을 텐데, 순수하게 고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영화 속의 모든 극단적인 공포는 오히려 상쾌한 느낌을 준다. 단지 이것이 관객을 재미있게 하려는 장치였다면 잘못된 영화가 됐을 거다. 하지만 아주 순수하게 전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전했기 때문에 잔인한 영화를 만들어도 떳떳한 느낌이 든다.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이 다른 차원을 경험한 셈이네.(웃음)
어떻게 보면 그렇다.(웃음)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 상처가 치유된 부분이 있다.
안 좋은 감정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작업이 길어지면 우울한 기분도 같이 길어지지 않나?
그래서 4개월 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3개월 만에 촬영을 끝냈을 정도로 굉장히 빨리 작업했다. 빨리 끝내지 않고 생각을 하면서 길어졌으면 이런 극단적인 영화를 만들 용기가 안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빨리 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었다. 짧고 굵게. 정직하고 진실 되게 작업했다.

사후세계를 들은 마담이 자살하는 장면에 대해, 어서 가고 싶어서 자살했다거나 그 얘기를 듣고 살아가기가 힘들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장면들을 보자면 마담은 사후세계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듯하다. 그런 뉘앙스를 주고 싶었나?
말하지 않겠다.(웃음) 몇 년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다.

만약 감독이 순수하게 관객의 입장이라면, 안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뭐라고 짐작할 수 있나? 이건 무슨 말이든 꼭 대답해주길 바란다.(웃음)
그걸 얘기해주면 마담처럼 자살할 지도 모르니까 해줄 수 없다.(웃음)

폭력적인 세상에 길들여진 관객을 의식해 표현 수위를 더 높인 부분도 있나?
절대적으로 그렇다. 요즘 영화에서 죽고, 자살하고, 폭력을 쓰는 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대에 관객들에게 순수한 허상을 보여주고 진짜로 받아들이면서 고통을 느끼는 지도 궁금했다.

곧 개봉하면 일반 관객들이 영화와 만난다. 느낌이 어떤가?
한국에서 개봉하게 돼서 너무 영광이고 기쁘다. 캐나다에서 저예산으로 힘들게 찍을 때는 전 세계에 영화가 소개되고, 이렇게 서울에 앉아 영화에 대해 얘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기쁘다. 한국 관객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가 너무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긴다. 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같은 마음을 갖고 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11 )
mvgirl
잘보고 갑니다.   
2009-08-02 21:42
ooyyrr1004
천국을 보는 눈이란 과연..고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2009-07-31 21:41
kwyok11
고통이란..   
2009-07-3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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