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화들을 통해 수차례 깨달아온 진리이지만, 진실은 자기 모습을 쉽게 드러내고 앞에 앉아 있는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그럴싸한 가면을 앞에 놓아두고는, 정작 자기 몸은 그 뒤에 숨겨놓고 우리들로 하여금 꼭 숨바꼭질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진실이란 것이다. 특히나 진실이라는 것은 다듬어지고 아름답고 할 것없이 진솔하고, 때론 적나라하기 때문에 이런 게 장애가 되는 바닥에서는 오히려 진실이 위험한 것이 된다. 대중을 향한 "이미지"가 먹고 사는 데 필수적인 수단인 연예계와 같은 곳 말이다. 우리가 매체들을 통해 보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수많은 환상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라 그런지, 가끔 인터넷을 돌다가 연예인들 관련 뒷이야기를 들을 때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오히려 이게 진실이라는데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 <스위트 룸>이 바로 이런 묘한 섭리가 있는 연예계, 대중문화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때론 진실이라는 게 너무나 많은 겹옷을 입고 위장하고 있어서, 그 겹옷들을 들춰내 진실이란 녀석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오히려 더 거짓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이 묘한 섭리. 이런 섭리가 덩굴처럼 에워싸고 있는 쇼비즈니스의 세계가 이 "스위트 룸" 안에 펼쳐져 있다.
때는 1957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방송계 최고의 콤비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 이들은 망나니와 모범생의 서로 대립되는 캐릭터로 죽이 잘 맞는 연기, 노래 등을 선보이며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중이다. 소아마비 기금을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장장 39시간 생방송을 줄기차게 뛴 이들 콤비는 마이애미에서의 이 방송을 마치고 바로 뉴저지의 호텔로 날아가는데, 그들이 묵기로 한 그 호텔 스위트 룸 욕실에서 놀랍게도 왠 젊은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으로 발견된 그 여인은 모린(레이첼 블랜차드)이라는 젊은 여성. 그런데 래니와 빈스의 화려한 인기 속에, 이 여인의 죽음은 그저 자살, 약물과다로 처리된 채 묻히게 되고, 이대로 15년의 세월이 흐른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젊은 작가 카렌(앨리슨 로먼)이 이들의 자서전을 쓸 목적으로 이미 해체한 이들과 다시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한편으로 15년전 묻혀버린 이 의문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빈스와 만나면서, 그리고 우연히도 비행기 안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신분을 바꾸어 래니와 만나면서 카렌은 하나하나 진실의 꺼풀을 벗겨나가기 시작하지만, 그녀에게 시시각각 도착하는 래니의 자서전 원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혼란스러운 비밀 속으로 이끈다. 과연 15년 전 그 날, 그 호화로운 스위트 룸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캐스팅 면에서 케빈 베이컨과 콜린 퍼스, 두 연기파 배우를 콤비로 캐스팅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대립되는 점이 많은 이 두 배우의 연기가 마치 퍼즐의 아귀를 맞춰가듯 절묘하게 조화되어서 어우러졌으니 말이다. 이 둘의 대립점은 공식 석상에서 만들어지는 그들의 이미지에서도 그렇고,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케빈 베이컨이 맡은 래니가 활달하지만 대책없고 다소 거친 이미지의 남성적 역할이라면, 콜린 퍼스가 맡은 빈스는 상대적으로 사려깊고 얌전하며 모범적인 여성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모는 비단 그들의 공식적인 이미지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연결되고. 케빈 베이컨은 기존의 왠지 악다구니 있는 듯한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거침없고 파워풀한 연기를 역시나 제대로 보여주었다. 반면 콜린 퍼스는 기존의 매너남 이미지에서 약간의 변신을 시도해서 때론 변태적이고 때론 연약한 이중적 남성의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둘의 스크린을 꽉 채우는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반은 날아간 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야하지만 고급스럽다. 영화 속에는 음모노출, 마약, 환각, 동성애, 트리플 섹스 등 꽤 강도높은 18금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18금 영화에 으레 나오는 평범한(?) 베드신도 강도높게 나오고.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의 분위기가 마냥 적나라하고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참 고급스럽다. 화면의 톤도 요즘 볼 수 있는 원색적인 톤이 강조된 화면이라기보다 황금빛에 은은한 색감이 돋보이는 복고적이면서도 고급스런 화면 톤이고, 영화 속에서 사건 해결의 키워드가 되는 스위트룸의 모습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렇게 영화는 야하면서도 고급스럽고 우아한 기품을 잃지 않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와 같은 전반적 분위기는 영화가 허리춤에 숨기고 있는 메시지와 어쩌면 강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60~70년대 미국의 쇼비즈니스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겉으로는 환상의 콤비라 불리며 전용기까지 타고 다니면서 쉴 새없는 스케쥴을 소화하는, 모든 연령층의 우상이 되는 콤비가 바로 래니와 빈스이다. 그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넉넉하고 여유로우며 팬들에게도 늘 친절하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이미지가 사실은 대단히 억지스럽고 불합리하게 "가공된" 이미지라는 것을 강조시킨다. 그들은 이런 이미지를 유지하고, 이런 살인적인 스케쥴을 이어가기 위해서 활동성을 강화시키는(대신 무슨 행동을 할지 책임지지 못하는) 환각제를 삼시 세끼 복용하기도 하고, 그들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유명세를 이용해 수많은 여인들과 난잡한 관계를 이어가기도 한다. 그들이 벌이는 적나라한 사생활은 그들의 화려함의 정도만큼 난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런 연예계를 둘러싸고 벌이는 매스미디어나 출판업계의 치졸한 행각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책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 자서전 안에 최대한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소재가 들어가야 한다고 그들에 관한 살인 사건을 끝까지 조사하라고 종용하는 한편, 책을 쓰는 카렌은 본의 아니게 래니와 빈스에게 신분을 감추고 이중적인 접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배경 안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적나라한 정사 장면들처럼, 영화 속에서는 이에 못지 않은 미국 쇼비즈니스계의 추악하고 치졸한 이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연예계는 연예인들의 유명세를 위해서 참 많은 걸 버리기도 한다. 한 젊은 여자의 목숨쯤은 연예인들의 유명세에 금이 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암말 않고 버려둘 수 있으며, 연예인인 당사자들 속에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 역시 인기의 추락을 막기 위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며, 오히려 누군가 드러냈다간 목숨까지 위험하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하는 냉혹한 쇼비즈니스 업계의 단면은 분노나 거부감을 넘어 슬픈 감정까지 전해준다. 결국 모든 희생의 슬픔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건 사건의 희생자인 모린의 어머니만이 홀로 해야 하고, 치명적인 비밀을 알게 된 이는 바깥으로 얘기하는 건 꿈도 못 꾼 채 그저 눈물이 흘러나오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애써 삼켜야 한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만큼 그 속에 숨은 진실은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기 때문에, 가끔은 이런 진실을 마냥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좋은 방법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한편으로 강조한다. 사실 사건의 모든 전모는 그 뒤에 숨은 차마 입밖에 낼 수 없는 충격적 진실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것을 발설하려다 사건이 파국을 맞았고. 이런 상황에서 카렌은 차라리 현명한 선택을 한다. 이제 사건의 모든 인과관계를 알았고, 심지어 그녀가 조사하던 왕년의 우상 래니와 빈스의 비밀도 알아버린 그녀는 자신이 마치 진실의 투사인 양 그것들을 모두 세상에 알리기보다는 일단 어느 정도 마음 속에 담아둔다. 그 진실로 인해 생채기를 낼 사람들이 아직 세상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 밖에 드러날 경우 수많은 칼날을 휘두르며 삶을 위협할 진실이라면, 차라리 어느 정도 숨겨 두는 게 진리일 수 있음을 영화는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슬픈 진리 역시, 외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뒤로는 수많은 추악하고 난잡한 일들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수많은 충격적 비밀이 생기고, 그 비밀은 드러나면 오히려 위험해지기 때문에 숨겨져야 하는 연예계의 바람직하지 못한 악순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 내내 깔리는 묵직하고 복고적인 음악처럼, 영화가 전체적으로 스피디하기보다는 느릿느릿 천천히 전개되기 때문에 뭐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라든가 그런 건 찾기 힘들지만, 대신에 이런 느린 전개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한꺼풀 한꺼풀 벗겨놓는 진실들은 너무 적나라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게 남는다. 마지막, 래니는 자신이 알게 된 충격적인 비밀을 감당하지 못해 처량한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 카렌의 표정은 오히려 존경심, 경외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 바닥의 현실이란 이런 것일까.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서 사실은 끊임없이 추악해야 하는 곳, 진실은 드러날 수록 오히려 위험한 무기가 되어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는 위장, 위선만이 어쩌면 생존의 법칙이 될 수 있을 그 곳이 이 곳 <스위트 룸>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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