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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eudo-현자의 플라토닉 에로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nott86 2012-07-17 오전 12:33:56 322   [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자, 현재 작가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등의 작품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세계에 알렸던 그가 현재는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어 집필 활동을 일절 중단했다는 소식과 겹쳐,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속의 주인공은 90번째 생일을 맞으면서도 실제 마르케스와는 달리 칼럼니스트로서 정열적인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모습과 강하게 대비되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냅니다. 

 

 
영화는 소설의 전개를 충실히 다루고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라는 아흔 살 주인공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채 서글픈 언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사비오(Sabio)”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인데요. 이 명칭도 주인공의 실제 이름인지, 아니면 경의를 표하는 칭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에 “El”이 붙은 걸로 봐서는 주인공을 존경하는 의미로 주위 사람들이 부른다는 점이 좀 더 설득력 있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어에서는 알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두 개가 있는데요. 하나는 “conocer”이고 다른 하나는 “saber”입니다.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번역되는 두 단어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쓰이는데, 전자는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을 때 사용되고 후자는 지식으로 알고 있을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그녀를 안다고 말할 때, 그녀를 직접 만나서 알고 있다면 전자를 쓰는 것이고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이름과 신상 정도를 알고 있다고 하면 후자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사비오라는 말도 saber에서 유래되어 현자, 똑똑한 사람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주인공이 기자이자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가지고 이 직업이 지성을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인공은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에게 있어 지식은 마르지 않는 원천과도 같지만 아흔 살 생일을 맞아 바라는 선물은 순수한 처녀와의 하룻밤입니다. “지식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설정인데요. 이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절대적인 여성상으로 사모해 왔던 주인공은 우연히 창녀와의 하룻밤을 보내고 이후 진실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창녀들의 육체적 욕망만을 갈구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서도 어머니의 환영은 그를 떠나지 못하고 주인공의 그리움 혹은 괴로움을 증폭시킵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표상합니다. 그에게는 기자로서의 지성은 넘쳤지만 이에 대응하는 감성은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순수한 여성에 대한 판타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거대한 비판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김기덕이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들이 여성을 특정한 이미지의 체계에 가두어 놓는다는 점에서 여성 관객 또는 비평가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강간당한 여성과의 섹스를 통해 그 여성을 정화시킨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도 사실은 이러한 반박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룻밤의 상대로 순수한 소녀를 원하는 노인의 설정은 현실에서는 충분히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심지어 원작 소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시간에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창녀인데 순수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모순 형용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녀와 악녀 모티브는 대립관계를 띄면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성녀이자 창녀로 묘사되는 막달레나 마리아를 들 수 있고, 이 영화처럼 창녀가 제목에 나오는 루이스 푸엔조 감독의 고래와 창녀에서도 한 남자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지만 순수를 갈구하는 남자의 그릇된 욕망과 질투로 창녀로 전락해 버린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요. 이처럼 순수와 타락은 마치 샴 쌍둥이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사비오가 사모하는 소녀는 노인에 의해 델가디나로 불리는데 델가디나는 멕시코 전래 민요에 나오는 인물로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인물입니다. 사비오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소녀에게 델가디나의 모습을 투영시킴으로서 여성의 순수에 대한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들의 거부감을 불식시키고 마음 속에 잔잔한 파고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소녀를 만난 후 점차 달라지는 주인공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소녀와 몸을 섞는 대신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의 옆에 가만히 눕고, 노래를 불러 주고 그녀의 몸을 닦아 주면서 그는 섹스는 사랑 없는 자의 위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하녀에게 화를 내며 진정한 사랑을 하기 전에는 죽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옛 여인의 충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이제 사랑에 미친 자신을 발견하며 웃음을 짓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이전의 허울 뿐이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갑니다. 사랑이 인간의 성숙을 이끄는 단계라는 사회적 관점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게끔 이끌어 주는 것은 분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나이는 그저 형식적인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원작 소설과 더불어 영화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미술과 음악입니다. 소녀가 나체로 누워 있는 모습은 여성의 육체미를 극대화시키면서 고야, 앵그리, 마네의 그림들을 연상시키고 영화 전체에 걸쳐 흐르는 쇼팽의 피아노 음악들이 가진 섬세함, 은은함, 부드러움은 그 자체로 관객들의 감정선을 자극하면서 주인공의 사랑에 순수성을 가미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자벨 코이셋 감독의 엘레지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문학작품(필립 로스의 “Dying Young”)을 원작으로 한다는 점, 피아노 음악(에릭 사티)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즘을 강화한다는 점, 그리고 지성을 갖춘 문학교수가 젊은 여자와의 만남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점 등이 그러한데요. 어쩌면 이 영화와 영화의 원작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모티브로 탄생시킨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기쁨에 젖은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 모든 집필 활동을 중단한 작가의 상반된 모습이 겹쳐서 가슴 한 쪽이 아파 옴을 느꼈습니다. 이제 노인에게는 생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죽음의 끝을 알면서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 전체를 환하게 비추어 주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순간이 인간의 감정을 열어주고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게 열어준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삶은 결코 지식, 명예, 부 등 표면적인 기준으로만 좌우될 수는 없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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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2011, Memories of My Melancholy Wh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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