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셀러 원작 실화가 전하는 감동
제임스 브래들리, 론 파워스 원작 <아버지의 깃발>은 사진 속 군인의 아들이기도 한 제임스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추적해 알게 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누구와 싸웠는지, 누구의 죽음을 애도했는지를 사진이 찍힌 후 60년이 지나서야 밝히게 된 것. 본래 책을 출간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모든 미국인이 그 사진을 알지만 정작 내용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책을 내기로 했다. <아버지의 깃발>은 2000년도에 출간되어 6주간 1위를 차지하고 46주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조 로젠탈의 사진 속 깃발을 세웠던 군인 중 한 명이 이오지마 전투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베스트셀러를 읽자마자 영화를 제작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의 깃발>의 판권은 이스트우드보다 한발 앞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소유하고 있었다. 다행히 스필버그는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을 제의했고 이에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미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바 있는 스필버그는 이스트우드의 탄탄한 경력과 제작자로서의 자세를 고려해 분명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을 확신했다. 또한 영화의 깊이와 폭, 자신감, 완성도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주제의 다양성이나 감정 포착에서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스트우드에 대한 신뢰로 감독을 제의했다. 특히 그는 이 영화의 숨은 보석은 이스트우드라며 그가 즐겨 말하는 ‘감독의 역할은 최소한으로’(Lessness is bestness)의 자세를 극찬했다.
같은 사건, 다른 시점 승자와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의미
감독 제의를 받고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의 자료 조사에 착수했다. 방대한 자료를 읽고 이오지마 전투에 대한 미 해병대와 명예 훈장을 받은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조사 끝에 감독은 <아버지의 깃발>뿐 아니라 같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본군 병사의 시점으로 이오지마 전쟁을 이야기하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만들기로 했다. 어렸을 적 자신이 본 전쟁영화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등장했지만 인생이 흑백논리가 아니듯 전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제작의 이유. 때문에 이 두 편의 영화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과 전쟁으로 시간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사진작가 조 로젠탈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과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활기를 띠게 된 미국과 사진 속 주인공들의 내적 갈등을 조명한다. 반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원치 않는 전쟁에 조국의 이름으로 끌려와 하루하루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오지마 땅에 섰던 군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태평양 전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담은 이 영화들은 이오지마라는 대격전지에서 펼쳐지는 전우애와 용기, 생존과 희생을 다룬다. 또한 전쟁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런 전례 없는 거장의 도전에 세계는 극찬을 보냈고 두 작품은 이례적으로 이스트우드를 올해 골든글로브 감독상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했다. 이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2007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시카고 비평가협회 외국어영화상, LA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했고 키네마준보 선정 최고의 영화로 뽑혔다.
인간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모인 이스트우드 감독과 그의 오랜 동료들
<아버지의 깃발>을 찍기 위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간의 베테랑 제작진을 총동원했다. 제작자 로버트 로렌즈는 최근 이스트우드가 찍은 영화의 필름 현상에서부터 제작, 후반제작, 마케팅, 배급을 도맡았다. <스페이스 카우보이> 이래로 이스트우드와 작업해온 마이클 오웬즈는 시각 효과 수퍼바이저이자 액션 디렉터로 합류했으며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촬영 감독 5회, 수석 조명 기사를 수 차례 맡은 톰 스턴이 촬영을 맡았다.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의상 담당 5회 데보라 호퍼가 의상을, 이스트우드와 20차례 같이 작업한 조엘 콕스가 편집을, 미술은 11회나 함께하고 이제는 고인이 된 헨리 범스테드가 맡았다. 이스트우드는 동료일 뿐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쌓았던 필리스와 범스테드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고 말했다. 이오지마 전투씬은 군인들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영상에 감정이 베어나게끔 한 반면 기금 마련 행사와 미국에서의 삶은 사실적으로 찍었다. 이런 시도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미스틱 리버> 때 시도된 방식으로 색상을 조절하고 밝기를 낮춰서 인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표현한 것. 의상은 엑스트라의 유니폼만 오백 벌이 넘었다. 고문을 맡은 제임스 데버 특무 상사가 의상과 소도구에 대한 조사를 했고 화면에서 모든 것이 시대상에 맡는지 검토했다.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은 늘 그렇지만 음악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버지의 깃발> 음악은 이스트우드가 직접 작곡했는데 20세기 전반 풍의 곡들이라 관객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운드트랙엔 다이나 쇼어와 아티 쇼의 명곡도 삽입됐다. 음반 제작에는 감독의 아들인 카일과 파트너인 마이클 스티븐스가 함께 했고 오케스트라 지휘는 <승리의 전쟁><버드>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레니 나이호스가 담당했다.
칠백 여명의 출연진과 제작진의 노력 이오지마 되살리기
<아버지의 깃발>은 총 61일 동안 촬영했다. 촬영 장소는 캘리포니아주의 LA, 버지니아주의 알링턴, 일리노이주의 시카고, 텍사스주의 휴스턴, 아이슬란드의 해변, 그리고 이오지마 섬이다. 출연진과 제작진은 모두 칠백 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고 이스트우드와 제작진은 이오지마 섬을 방문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이며 스토리 전개상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현지 촬영을 진행했다. 그러나 영화 촬영 때문에 섬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미군들의 섬 착륙 장면은 아이슬란드의 수도(레이캬비크) 남서쪽의 화산섬, 레이캬니스에서 촬영했다. 이곳은 지질학적, 지형적으로 이오지마 섬과 유사하다. 이오지마 해변과 똑같은 장소를 찾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레이캬니스는 이오지마처럼 화산섬이라 늘 약진이 조금씩 일고 모래색 역시 검고 두 섬 모두 화산에서 증기가 분출된다. 위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다행히 아이슬란드의 8월은 이오지마의 2월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나 더욱 사실적인 화면을 위해 제작진은 평평한 아이슬란드의 해변에 모래를 쌓아 침략 방어벽을 만들었다. 실제 전투 상황과 비슷하게 연출하기 위해 백오십 입방야드의 검은 모래를 아이슬란드로 옮겨 4, 5미터의 모랫둑을 쌓아 실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만들었고 이에 관객들 역시 실제와 흡사한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실제상황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전투장면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장갑차와 상륙정 등장
침략 장면을 재현하는 데는 모든 팀이 동원됐다. 실제 이오지마 전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격전이었고 따라서 신경 쓸 부분도 많았다. 지상에선 쉴 새 없이 박격포가 날아다니고 상공에선 전투기가, 바다에선 전투함이 떠다니는 현장 침략 장면을 감독은 휘발유를 이용해 검은 연기를 치솟게 하는 방식이 아닌 미사일이 땅에 떨어져 폭파되는 모습으로 리얼하게 담고 싶어했다. 이에 안전한 방식의 폭파 장면을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감독은 언제 어디서 특수효과 팀이 폭발물을 터뜨릴지 배우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실제로 위험에 처한 적은 없지만 배우들은 늘 폭발 소리에 놀랐고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을 보여줄 수 있었다. 특히 영화 속에는 바다에서 바로 해변으로 대원들을 옮겨주는 60년 된 상륙용 장갑차와 해안선까지 병력과 차량을 수송하는 40년 된 차량∙병력 상륙정을 이용했다. 군인들이 일본 바다를 건너는 장면에서 제작진은 ‘S. S. 레인 빅토리’라는 화물선을 사용했는데 이는 실제 2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유물을 미술 팀이 재정비한 것으로 이번 영화 제작의 묘미라 할 수 있다.
특수 훈련을 통해 병사로 거듭나기 실제 전우애를 배운 배우들
라이언 필립은 <아버지의 깃발>의 저자이자 실제 자신의 역할의 모델이 되는 존 닥 브래들리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를 만났고 제임스 작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감정 연기 외에도 위생병 역인만큼 지혈법, 압박 붕대 사용법, 삼각건 사용법을 배웠다. 특히 라이언 필립은 아버지, 삼촌이 베트남전 해군이었고 할아버지 두 분이 세계 2차 대전 참전 용사로 이런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매우 영광이었다고. 감독은 주연들이 진짜 군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신병 훈련소에 보내는 대신 영화에 참여한 군인 고문단에게 집중 군사 훈련을 받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전쟁터를 연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젊은 군인들이 느꼈을 혼란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출연진만도 수백 명이 넘는데 실제로 뉴욕, LA에서 수 백의 연기자를 오디션 하기도 했다. 오디션으로 선발된 배우들은 군수 물자를 옮기는 법, 총 발사하는 법, 폭발이 났을 때 다치지 않도록 물러서는 법 등을 배워 실제 병사들 버금 나게 되었지만 촬영 중 가장 감격스러웠던 날은 전투 장면들보다도 국기 게양식을 찍던 날이었다고. 모든 배우, 스태프들은 그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고 촬영 전날 밤 배우들은 리허설을 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촬영을 마치고 서로 악수를 하고 축하 인사를 나누며 역사의 감동을 나눴다.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는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에 해당했다. 전략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오지마를 먼저 점령해야만 했고 이에 이오지마는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진 첫 일본 영토가 됐다. 연합군은 마리아나 제도(사이판)에서 매일 같이 섬에 폭격을 퍼부었다. 초기 경고 단계에서 이오지마 섬의 군대는 이 사실을 일본 본토에 알렸고 연합 폭탄병이 도착했을 때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고 미국은 금세 전투력을 잃었다. 1945년 2월 16일, 미국은 일본군 2만 2천명이 주둔해 있던 이오지마 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미 해병대는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섬의 남쪽에 위치한 가장 높은 지점인 170미터의 수라바치산을 확보하기 위해 해변에 먼저 상륙한 미 해병대 삼만 명은 수라바치산을 포위했고 뒤이어 사만 명이 추가로 섬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섬은 초토화되고 2월 23일 해병대는 수라바치산을 점령해 성조기를 꽂았다. 그 후 31일 간 미군과 일본군은 섬에 갇혀 있었다. 해병대는 공군을 장악하러 북쪽으로 옮겼고 일본은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3월 26일 전세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져 일본군 2만 2천 명 중 1,083명만이 살아남았고 미군 2만명이 부상을 입고 6,821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국기 게양대였던 마이클 스트랭크, 할론 블록, 프랭클린 소우슬리도 사망했다. 이오지마 침략 작전의 성공으로 27명이 훈장을 받아 단일 전쟁으로는 가장 많은 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기록됐으며 이는 세계 2차 대전 때 수여한 훈장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사진작가 조 로젠탈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 로젠탈의 사진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우표, 포스터, 수많은 잡지와 신문을 장식했고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위치한 해병대 전쟁기념관 추모비로도 제작됐다. 로젠탈은 징병 시 신체검사에서 나쁜 시력 탓에 면제를 받았다가 재검을 받아 징병 유예로 분류됐다. 당시 타임매거진은 걸작을 남긴 로젠탈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의 여지는 또 있다. 사진이 신문에 실려 미국 전역으로 퍼진 뒤, 한 리포터가 로젠탈에게 사진은 연출된 것이냐고 물었고 로젠탈은 해군들이 성조기를 꽂으며 포즈를 취했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진에 찍힌 성조기가 그날 두 번째로 치러진 게양 의식이었다는 것도 혼란을 가중시켰고 그 후 50년 동안 로젠탈은 사진을 조작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인터뷰와 취재 문의가 쇄도하자 AP 통신은 아예 ‘로젠탈 데스크’를 따로 만들었다. 로젠탈은 대통령을 만났고, AP 통신으로부터 1년 치에 해당하는 월급을 보너스로 받았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사진 속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2006년 8월 94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뉴욕 타임즈 부고란에 리처드 골드스타인은 그의 걸작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사진은 일본 영토의 일부를 미국이 처음 점령했을 때의 승리감을 포착했다.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선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됐고 그의 사진은 미국 문화에 다양성을 더했다.’ 로젠탈은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사진이 나오기까지 제가 기울인 노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군들이 섬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목숨을 바쳤기에 깃발을 산에 꽂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가 사진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셔터는 제가 눌렀지만 이오지마를 점령한 건 미군이었습니다.’
성조기를 꽂기까지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꽂는 사진은 AP 통신의 사진기자 조 로젠탈이 찍었다. 하지만 사진에 찍힌 성조기는 두 번째 꽂힌 성조기다. 1945년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해병 5사단은 수라바치산 점령에 나섰다. 침략 닷새째 미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을 섬의 동굴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투에서 피 흘렸던 수많은 군인들을 위해, 그리고 희망의 의미로 그들은 스라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다. 그러나 첫 번째 꽂은 성조기를 해병 장교가 기념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회수를 명령했고 화가 난 챈들러 존슨 대령은 통신병에게 더 큰 깃발을 세워 첫 번째 것을 대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병사들은 낡은 일본 파이프관을 다시 들어 옮겼고 이 광경을 본 로젠탈은 그 역사적 순간에 셔터를 눌렀다. 로젠탈은 필름을 괌으로 보냈고 AP 통신 편집자는 무선으로 사진을 뉴욕에 보냈다. 사진을 찍은 지 17시간 30분 후의 일이다. 사진을 찍은 후 일어난 전투에서 게양 대원 중 세 명은 전사했지만 살아남은 군인 셋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미국 정부는 세계 2차 대전에 쓸 보급품을 위해 이 세 군인들에게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할 것을 부탁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