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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잉 어니스트(1952,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어릴적 비디오 빌려서 재밌게 본 영화... ★★★★  oldchan 04.02.11



한 세기 전,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가 상연될 무렵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 혐의로 법정에 서있었다. 와일드의 '외설적 행동'으로 인해 성황리에 상영되던 연극은 일찍 막을 내려야 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는 영국어로 된 연극 중 가장 재미있고, 또한 자주 상연되는 희극 중 하나이다. 2002년, 역시 동성애자로 알려진 루퍼트 에버렛과 영국 배우 콜린 퍼스, 헐리우드 스타 리즈 위더스푼이 출연한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가 제작되었다. 와일드의 예술성은 시대의 도덕적 기준보다 더욱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연극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는 영국 영화계의 괴짜들 중 하나인 안소니 아스퀴스에 의해 세심하게 영화화되었다.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에서 유년기를 보낸 영화 감독이 얼마나 있는가? 아스퀴스는 1909년에서 1916년까지 영국 수상을 지낸 정치가 허버트 아스퀴스와 사교계의 명사 마곳 사이에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상류층 아이답게 퍼핀(매부리코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은 고상한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17살이 되던 해 그는 헐리우드로 가서 메리 픽포드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살았는데, 그들은 그에게 스튜디오를 마음대로 쓰도록 해주었다. 또한 그는 이웃인 찰리 채플린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는 종종 채플린과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진지하고 성숙한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192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성영화 산업에 뛰어들었고,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각색함으로써 국제적 찬사를 받았으며 1938년에는 이미 노련한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귀족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30년 동안 작업복을 입고 다녔으며 허리에는 가죽벨트를, 주머니에는 1919년 메리 픽포드에게 받았던 손수건을 바깥으로 매달고 다녔다(결국 그는 손수건이 닳아 떨어질까 두려워 세탁하는 것을 그만뒀다).
1939년 그는 테렌스 래티건의 [French without Tears]를 각색해서 영화화 했으며 그 후로 그와 30년을 일하며 1951년 작 [The Browning Version] 등의 고전을 만들어 냈다. [The Browning Version]에서는 마이클 레드그레이브가 바람난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편 역을 맡아 그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이듬해 그와 아스퀴스는 기존에 제작했던 것과는 다른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다. 레드그레이브가 연기했던 잭은 코미디가 드물었던 당시 컬러 영화에서 빛을 발했다.

잭 이외 다른 인물들의 캐스팅 역시 이 영화의 맛을 살리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조안 그린우드가 맡은 그웬돌린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이 코미디 영화를 빛나게 하는 하나의 보석이다. 또한 이 영화로 데뷔한 미녀 배우 도로시 튜틴이 세실리 역을 맡았다. 안타깝게도 출연 장면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한 마가렛 루더포드가 연기한 뻔뻔스런 프리즘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녀는 아스퀴스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으며 10년 뒤 오스카 상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디스 에반스가 연기한 당대의 전형적 인물인 브랙넬 부인 앞에서는 모든 광채가 다 사라지고 만다. 영화 제작 몇년 전부터 아스퀴스는 그녀를 뛰어난 연기력이 요구되는 이 역에 쓰려고 생각해왔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핸드백 같은 간단한 단어를 항상 유쾌한 리듬으로 연주할 수 있는 존재는 아마 에디스 뿐일 것이다.

에디스 에반스와 브랙넬 부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스퀴스는 촬영 내내 그녀를 다루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귀족다운 고상한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뭔진 잘 모르지만 늘 카메라가 저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카메라 쪽으로 가는게 아니고요." 미국 영화 배급사들이 미국인들은 Perambulator(유모차)가 뭔지 모를 거라고 말하자 아스퀴스는 에반스에게 그 단어 대신 Baby Carriage로 바꿔달라고 주문했다. "영국 귀족인 나에게 우리의 훌륭한 영국 단어 대신 미국의 그 돼먹지 못한 단어로 바꾸라고요?" 그녀는 브랙넬 부인의 건방진 태도로 소리쳤다. "난 거절하겠어요!" 그러나 결국 그녀는 감독의 요구대로 했다. 50년이 지나 에반스의 Perambulator와 컬러영화의 아름다움은 그 영화의 명성을 살리면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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