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달콤한 인생> 인가?
한 남자가 있다. 보스의 명령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감정도 가져 본 적 없는 그는 보스의 애인을 감시하던 중, 난생 처음 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조직이 그를 적으로 돌리고 그는 모든 것을 건 전쟁을 하게 된다. 멜로도 아닌 느와르 액션에 붙은 ‘달콤한 인생’이란 제목은 그러므로, 달콤했던 한 순간. 정점에서 추락이 시작되는 한 남자, 선우의 인생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
김지운의 느와르 액션 – 무엇’이 다른가?
코미디와 호러. 고유의 규칙이 강한 장르에서 김지운 감독은 그만의 독특함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산장에 온 손님이 차례로 살해 당하는 잔혹한 상황에서 폭소를 자아냈던 코믹 잔혹극 <조용한 가족>, 공포보다 자매의 슬픔이 긴 여운으로 남았던 <장화,홍련>.김지운의 느와르 액션 또한 느와르의 틀에서 비껴 난 새로움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느와르가 조직 간의 암투와 배신 등을 비장하게 그렸던 것과 달리 <달콤한 인생>은 한 편의 시와 같은 호흡을 선 보인다. 사소한 감정에서 대립이 시작되고 그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영화가 전개되는 것. 보스의 애인을 향한 순간의 감정은 대립의 계기로만 작용할 뿐. 선우는 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전쟁의 여정에 오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따라가며 인물들의 감정을 주시한다. 사소한 계기를 엄청난 전쟁의 원인으로 삼아 영화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 어둡기만 한 느와르 영화들과 달리, 유머와 감성이 골고루 배치된 것은 김지운의 느와르 액션이 지닌 매력이다.
불 각목에서 화려한 총격전까지 - 돌이킬 수 없다면 끝까지 간다!
<달콤한 인생>의 첫 번째 볼거리는 액션이다. 대역 없이 직접 차고,때리고,맞고,쏘고. 이병헌이 소화한 액션의 영역은 다른 어떤 영화보다 다양하고 풍부했다. 카 스턴트 용으로 엔진이 개조된 차량을 직접 몰아 시멘트 벽을 뚫고 나오는 정도는 약과. 맨주먹, 불붙은 각목, 시멘트 블록, 휴대폰 배터리, 권총에서 다연발 기관총까지. 선우(이병헌)가 절박해 질수록, 그의 눈에 띄는 모든 것은 무기가 된다. 특히, 러시아제 쉬테시킨, 스미스 앤 웨슨 38구경 리볼버 등 실제 총이 등장하는 총격전은 쉬리 이후 최대 규모. 사지를 빠져 나온 직후, 조직에 홀로 맞서기 위해 총을 손에 쥔 손간, 한 자루의 총은 선우의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선우의 물음이 총알이 난무하는 격전의 한 가운데서,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스피디하게 연출된 <달콤한 인생>의 다양한 액션은 볼거리에 머물지 않고, 인물의 감정까지 표현해 준다.
빛과 어두움,화려함과 음습함 – 충돌로 빚은 강렬한 스타일
선우의 영화 속 여정이 정점과 추락을 동시에 상정하듯, <달콤한 인생>의 공간은 빛과 어두움, 그리고 화려함과 음습함이 공존하는 묘한 충돌로 구성된다. Dry하게 시작해서 Wet하게, Cool하게 시작해서 Hot하게. 이는 인물의 감정 뿐만 아니라 영화 <달콤한 인생>의 공간과 스타일을 지배하는 모토이기도 하다. 선우가 근무하는 호텔은 화려한 고객용 공간과 기능만 남은 건조한 직원용 공간으로 양분된다. 스카이 라운지는 가장 화려하면서 선우의 위상을 말 해 주던 공간에서, 총격전의 현장인 폐허로 변하며 빛과 어두움의 대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트와 로케가 동일한 톤의 공간감을 내는 것 또한 <달콤한 인생>의 미술이 이룩한 성과.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끔찍한 악몽의 산실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자매에게 닥친 공포를 극대화 시킨 바 있는 <장화,홍련>의 김지운 감독.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류성희. 온갖 컬러가 화려한 군무를 선 보였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듀서 이유진. 남다른 스타일 감을 가진 이들이 한 데 모인 크레딧은 <달콤한 인생>의 화면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형 느와르의 시작, <달콤한 인생>
2차 대전 직후, 전쟁의 비관주의로부터 채 벗어나지 못 한 인간들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된 필름 느와르의 역사는 유독 한국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코믹 잔혹극 <조용한 가족>에서 코미디 <반칙왕>, 본격 호러인 <장화,홍련>까지.장르를 불문하고,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비극적 선택과 운명'이라는 느와르적 코드를 모티브로 삼아왔던 김지운 감독에게 느와르 액션 <달콤한 인생>은 필모그래피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읽힌다.'달콤할 수도 있었을'한 남자의 인생이 단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나락으로 치닫는 영화의 설정. 이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게 뻔한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들의 서사시인 느와르 본연의 궤적을 충실히 쫓는다. 또한 영화 전편을 아우르는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조는 느와르 특유의 비장한 형식미를 유려하게 완성한다. 마초와는 거리가 먼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으로 인물의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스크린에 구현했던 감독 김지운과 가장 남성적인 장르인 느와르의 만남. 그 만남이 어떤 화음을 조율해 낼 지. 느와르 액션을 표방하는 영화 <달콤한 인생>이 불러 일으키는 기대는 여러 색깔을 띈다.
순간에 폭발하는 핏빛 폭력, 그리고 액션의 협주곡
일생을 걸고 쌓아 온 한 남자의 세계가 처연하게 무너져 내린다. 오직 조직 밖에 몰랐던 한 남자, 선우(이병헌)는 최선이라 믿었던 단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았던 자신의 조직을 상대로 혈혈단신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에서 그가 기댈 곳은 목숨 걸고 휘둘러야 할 폭력 뿐이다. 수 많은 적과 1:1 혹은 다찌마리로 붙어 싸우는 <달콤한 인생> 속에서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답게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개처럼 죽어 간다. 스카이라운지 장면을 몰아 찍었던 양수리 1세트 에서만 23명이 죽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농담은 단적인 예. 사방으로 피가 튀는 그 한 가운데, 주인공 선우(이병헌)는 불 붙은 각목을 휘두르며 죽음 직전에서 탈출하는 스피디한 카 액션을 보여주거나, 혹은 권총과 다연발 기관총을 난사하는 등 액션의 모든 영역을 선 보인다. 그리고 그 액션들은 여느 영화와 달리 몸으로 하는 행동임에도 인물의 감정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순간에 모든 감정을 응축해서 "네가 죽든,내가 죽든" 단 1초에 결론을 내는 사무라이의 장검처럼 선우의 권총은 발사 직전 묘한 망설임을 내 뿜다가, 찰나에 작열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죽어 나자빠진 시체 보다는 선우의 눈빛을 충실히 따라간다. 모든 폭력에 우선하는 것은 그 폭력을 자아내는 인물의 감정이라는 듯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달콤한 인생>의 액션은 여느 액션과 다른 묘한 잔상을 남긴다.
쿨(Cool)한 남자들의 뜨거운(Hot) 전쟁
<달콤한 인생>은 남자들의 영화다. 보스인 강사장(김영철), 같은 조직의 No.2지만 선우와 달리 주먹이 앞서는 행동파이자 보스의 절대적 신뢰를 받는 선우를 질투.끊임없이 견제하는 문석(김뢰하). 선우에게 단 한번 갈굼을 당한 후 복수의 이를 가는 백사장(황정민). 백사장의 행동대이자 비정함의 선두 주자 오무성(이기영), 선우가 권총을 구하기 위해 만나게 되는 권총 밀매 조직의 보스 태웅(김해곤), 태웅의 끄나풀 명구(오달수), 러시아인 조직원 미하일 등,크레딧이 걸터듬는 남자 배우들 만으로도 실미도 이래 최다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 이 선 굵은 배우들은 선우의 앞길을 가로 막는 적들로, 선우와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르게 되는 당사자들. 하지만 특유의 개성을 자랑하는 이들답게, 그 배우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을 재미와 윤기를 영화에 덧보태 주기도 한다. 한참 진지해야 할 순간에 의외의 웃음이 삐져 나오거나 단 한 컷 밖에 등장하지 않는 배우에게서도 강렬한 캐릭터가 느껴 지는 등 <달콤한 인생>에 등장하는 '멋진 남자들'은 영화의 질감을 한결 풍성하게 하는 일등 공신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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