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기억은 물론 사랑했던 모든 기억까지 잃어가는 수진(손예진)과 자신과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지켜주는 순애보의 남자 철수(정우성)의 아픈 사랑을 그린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늦은 가을, 눈물을 쏙 빼는 슬픈 사랑 영화에 목말라 했던 관객들에게 정우성-손예진이라는 빅카드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정통멜로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심금을 울리는 음악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일단 첫 곡은 Chopin : Prelude Op.28 No.7. 쇼팽의 피아노 작품은 어느 곡 하나 빼어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가장 쇼팽다운 영롱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Preludes (전주곡)'은 전체 28곡으로 이루어져 각각의 곡이 하나의 곡처럼 유기적인 짜임을 이루고 있는 동시에 단독으로 연주해도 충분히 아름답다. 영화에 삽입된 7번 곡은 A Major(가장조)에 안단티노 3/4 박자의 극히 짧은 곡으로 마주르카풍의 묘미가 느껴지는 곡. 애수가 깃들어 있는 선율이 이제 곧 시작될 슬픈 사랑을 알리는 듯 가슴을 풍성하게 한다.
아름다운 피아노곡에 질세라 등장하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곡 ‘Paganini : 24 Caprices for solo Violin Op.1(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 ‘Capriccio(카프리치오, 이탈리아어로 '변덕'이라는 뜻)’는 활달하며 느슨한 구조의 악곡을 가리킨다. 쇼팽이 ‘피아노의 천재’라면, 니콜로 파가니니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우는 19세기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영화에 삽입된 7번곡은 간결한 소품곡으로 파가니니 특유의 화려한 트릴과 피치카토를 배경으로 안단테의 경쾌한 변주가 돋보인다.
두 사람의 첫 키스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El dia que me quieras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4인조 여성그룹 빅마마의 이지영이 불렀다. 사랑을 막 시작하려는 연인들이 짜릿한 첫키스를 나누기 전 로맨틱한 무드를 잡아주는 달콤한 러브송. 9집을 들고 돌아온 부활의 새로운 보컬리스트 정단이 부른 ‘내일의 비’ 역시 나른한 달콤함을 선사한다.
편의점에서 손예진에게 콜라를 날치기 당한 정우성. 우연한 만남이 사랑이 될 것 것을 암시하며 두 남녀가 재회하는 순간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 ‘La Paloma’는 빅마마의 신연아가 불렀다. 이 독특한 보사노바풍의 음악은 라틴어로 불리워져 그 이국적인 감미로움이 귀를 즐겁게 하며 관객들을 이제 막 시작되려는 사랑의 설레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 밖에도 철수와 수진의 데이트 장면에 흘러나오는 로맨틱한 음악은 빅마마의 이영현과 박민혜가, 영화 마지막의 엔딩곡은 <내 머리속의 지우개> 뮤직비디오곡이기도 한 ‘날 그만 잊어요’ 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거미가 불러 한층 깊이를 더한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스코어의 작곡은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맡았다.
배우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이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O.S.T는 쇼팽의 피아노곡에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곡까지, 클래식과 보사노바, R&B가 어우러져 영화 속 사랑을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슬프게 노래한다. 멜로 영화에서 관객의 호감과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음악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