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단과 대중의 평가가 100% 일치하는 영화란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어둠의 세계에선 일찌감치 그 작품성과 상업성에 만장일치의 평가를 받으며 많은 영화팬들을 설레게 만든 <이터널 선샤인>이 정식 개봉하게 됐다. 이 뒤늦은 개봉에 일부의 영화팬들은 불만을 토해냈고, 나머지는 지금에라도 개봉하는 게 어디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양극단의 반응 속에서 11월 10일 개봉하는 <이터널 선샤인>에 무비스트는 절대지지와 절대공감를 표하며 ‘미셀 곤드리’와 ‘찰리 카프먼’이 창조한 지워진 사랑의 기억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리다.
애인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과 심하게 다툰 후 조엘(짐 캐리 분)은 그녀가 '라 쿠나'라는 회사가 제공하는 ‘기억삭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면 중 뇌에 자극을 주어 특정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억삭제’를 통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워버린 거지요. 조엘도 홧김에 동일한 치료를 받기로 하지만 ‘기억삭제’가 클레멘타인과의 씁쓸한 기억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까지 삭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그녀와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꿈’ 속에서 동분서주하는데...
자아(self)는 기억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아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어버리게 되고, 기억이 조작된다면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하게 되지요.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은 <토탈 리콜>처럼 철학적 무게감을 갖는 SF나, <메멘토>처럼 기억 상실 이전의 진실을 찾아가는 스릴러에서 즐겨 이용되는 소재입니다. 로맨스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불의의 교통사고 혹은 그에 버금가는 뇌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옛사랑을 기억 못하는 슬픈 사연들을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통해 질리도록 보아왔습니다. 코미디의 감각이 아니라면 정색을 한 로맨스에 사용하기엔 민망할 만큼 진부한 클리쉐지요.
‘기억과 함께 옛사랑을 잃어버렸지만 결국 되찾았다’는 동일한 과정이, 전자에서 추적과 성취의 드라마로 묘사된다면, 후자에서는 상실과 회한 끝에 뒤늦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묘사되지요. 전자가 추리극이라면 후자는 심리극인 셈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운 정조가 느껴지는 이유도, 소중하지만 지켜낼 수 없는, (사라져버린 기억이 아니라) 지금 사라져가는 기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사랑이라면, 다른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 흔히 새로운 사랑으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 기억상실 후의 그/그녀는 과거와 동일한 정체성을 갖는 동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사랑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설령 과거의 연인과 다시 사랑에 빠진다해도 그건 우연의 결과일 뿐, 이전 사랑과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선택적 기억삭제술’이라는 가상의 기술을 통해,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옛사랑에 대한 기억만 잃어버렸다는 설정을 가능케 합니다.
영화에서 ‘기억삭제’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은 세 명의 연인들은 다시 동일한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게 되구요. 모든 상황이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으로 되돌려졌는데도, 동일한 사람들이 동일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진정한 사랑은 운명으로 맺어지므로 어떤 역경이 있어도 영원히 지속된다’는, 낭만적 애정관을 피력합니다. 동양적 전통에서라면 <은행나무침대>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처럼 ‘환생’의 형태로 제시될 수도 있겠지요.
사랑의 운명성/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터널 선샤인>은 여러 ‘한계 사례’를 시험합니다. 가령 패트릭(일라이저 우드 분)은 조엘이 사용한 언어와 선물을 클레멘타인에게 그대로 반복하지만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하지요. 기억삭제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무의식속에 남겨져 있던 그녀의 ‘속삭임’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다시 재회하게 만들구요. 이쯤 되면, 사랑이란 동일한 과정이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는 결정론적 과정이 아니라, 운명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예정론적 과정이며, 과학의 힘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결합이라는, 지독히 낭만적인 애정관과 조우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쯤은 시대착오적인 지나친 낭만성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헤어짐과 재결합이 관객에게 깊은 정서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의 영속성과 절대성을 믿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심리에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이 해외의 관객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
낭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터널 선샤인>는 어쩔 수 없이 찰리 카프먼과 미셸 곤드리의 색깔이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우선 뇌와 자아에 대한 관심부터가 그러하거니와 역전된 시간구조 역시 흥미롭습니다.영화의 태반이 꿈속에서 진행되는 탓에 CG를 최대한 배제하였지만 영화는 때로 기괴할만큼 무척 환상적입니다. 전혀 다른 배우인 듯,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는 짐 캐리와 불안정하고 즉흥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인 클레멘타인을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도 언제나처럼 훌륭합니다.
국내개봉이 늦춰지며 많은 영화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이터널 선샤인>은 오랜 기다림에 충분히 값하는 뛰어난 영화입니다. 쓸쓸하고 안타깝고 기괴하고 환상적이며 동시에 코끝 찡해지는, 이 모든 게 가능한 영화, 드물죠. 지금의 사랑에 희열을 느끼려는 관객이나, 과거의 사랑의 반추하려는 관객, 각본가나 감독에 관심을 갖고 극장을 찾는 관객 모두 만족할 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