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장르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한 명성을 자랑하는 노희경 작가는, 지난 해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배우 이재룡의 입을 빌어 말했다. “지켜? 텔레비전 연속극을 봐도 그렇고 남자라고 하는 것들은 개나 소나 뭘 지킨다면서 떠들더라. 대체 지킨다는 게 뭐냐?” 사람들은 이재룡 입을 빌어 쏟아져 나온 저 독설에 가까운 말들을 명대사라 불렀다. 사랑하는 여자를, 순수한 사랑을 세파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전통적 마초 로망은 그렇게 박살났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사랑>, 그 지독한 시대착오적 정서
21세기형 액션신파 쯤으로 명명하면 좋을 영화 <사랑>에서 곽경택 감독은 주진모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내가 니 지켜주께.” 사랑이 분쟁 중인 국경지대인가? 사랑에 빠진 남자가 동네 자율방범대라도 되나? 그러나 남자의 선언은 결연하다. 바로 이 결연한 선언이 영화 <사랑>의 비극성을 추진하는 동인이다.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그리고 또 그들을 막아서는 지독한 운명. 남자는 여자를 위해 칼부림을 마다 않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잠적한다. 출소한 남자는 주먹으로 출세해 용역깡패를 부리는 ‘실장님’이 되고, 몸으로 빚을 치러야 했던 과거 때문에 여자는 요정의 기생이 된다. 건설회사 회장님의 수족으로 살던 남자와, 그 회장님의 ‘세컨드’로 살아가던 여자는, 하필이면 그 회장님으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된다. 오래도록 보류되었던 사랑이 다시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믿는 도끼에 양쪽 발등을 찍힌 회장님에게, 그들의 사랑은 배신이요, 배반이기 때문이다.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설정, 그리고 그 안에서나 유효할 듯 보이는 그들의 사랑. 지고지순하지만, 극단적인 ‘죽일 놈의’ 사랑. 아무리 복고가 유행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지독한 시대착오라 해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물론 영화 <사랑>의 연기, 조명, 촬영, 편집 등 기술적 측면은 2007년의 영화답게 매끈하고 화려하다. 문제는 이야기와 정서다. 어떻게 해도 극복되지 않는, 촌스러울 정도의 마초로망.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을 위한 비극이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감정은 관객의 공감대 언저리를 배회할 뿐, 그 안으로 틈입해 들어오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실소가 터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난 추석 연휴의 승자로 등극하더니 벌써 150만을 훌쩍 넘겼단다. 진심으로 살짝 놀랐다.
마초로망의 성대한 귀환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굿바이 솔로>는 신파답지 않은 신파를 그려낸 훌륭한 드라마였지만, 시청률에서는 노희경의 대다수 작품이 그랬듯이 참패를 면치 못했으니까. 창업부터 스포츠, 의상에서 다수 문화장르까지 복고주의가 대세라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전통적 마초로망은 건재한 모습으로 금의환향했다. 술을 따르고 몸을 팔지언정 마음만은 지고지순한 여자와 10년을 한 결 같이 한 여자만 사랑했던 남자는, 기어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 사랑에 관한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 정절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이 부럽지 않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그런 감정은 아름답다. ‘한 놈만 패’가 무섭듯이, ‘한 사람만 봐’는 지극하다. 그러나 그 지극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현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의 남성적 재해석이라 불릴 만한 영화의 성공에는 의문부호가 뒤따른다. 기술적으로는 매끈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어딘가 뒷걸음질치고 있는 이 극렬한 신파를, 과연 옹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친구>로 시작해 <별들의 고향>으로 끝나는 영화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향해 대놓고 직진 일변도인 탓에,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비슷하게 복고적인 신파멜로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영화 <행복>은 조금 다른 양상의 답변을 관객과 평자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역시나 진심으로, 살짝 놀랐다.
곱게 ‘필터링’된 통속 신파, <행복>
찌든 도시인. 술과 담배로 완전히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시설에 들어간 남자는,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지극히 어려보이는 외모에, 달리면 죽을지도 모르는 연약한 폐의 소유자임에도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의연함의 소유자인 여자. 그녀는 들꽃을 닮았고, 남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생존을 위해 기존의 방식과 가치를 버린 남자는 여자의 소박함에 반하고, 순수하고 착한 심성의 여자는 남자를 위해 평온한 요양원 생활을 포기한다. 그들은 그런 대로 행복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40% 남은 폐를 가진 여자는 미래보다 오늘이 중요하지만, 요양만 잘하면 완치가 가능한 남자에게는 오늘보다 내일이 중요하다. 아니 처음부터 남자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의 쾌락에 의지해 살았던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은 처음 만나보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새로움이 다하고 나면 모든 것은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애틋했던 사랑이 망가지는 것은, 그리하여 순식간이다.
<외출>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허진호 감독의 신작 <행복>은 완전히 다른 처지의 남녀가 비슷한 처지가 되어 만나 사랑하다가 다시 처지의 차이를 깨달으며 헤어지고 다치는, 그리하여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다. 허진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대사와 화면, 그리고 여백을 남겨둔 편집은 애틋하고 아이러니한 두 남녀의 사랑을 담담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그려낸다. 통속적이기 그지없는 이야기가 허진호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세련된 멜로드라마의 옷을 덧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지극히 통속적이기에 진부할 수밖에 없는 남녀의 사랑은 담백한 대사로 인해 새로운 힘을 얻지만, 파멸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감한 생략은 이 지극한 통속성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결과를 낳는다. 디테일을 통해 통속을 벗어났던 이야기가 바로 그 디테일의 부족으로 통속의 한계 안에 갇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한계 앞에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는 어쩐지 무력하다.
그 여자, 그 남자의 진부한 사정
남자는 버리고, 여자는 버림받는다. 한 사람은 떠나고, 다시 한 사람은 남겨진다. 징글징글한 파멸의 과정이 존재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도 낳을 수 있었겠으나, 그냥 그들은 그렇게 깨어질 뿐이다. 오래된 사랑이야기의 한 페이지를 들춰 보는 기분.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전통적 역할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서로의 길로 나아갈 뿐이다.
남자의 배신 앞에 울며불며 소리치지만, 고작해야 ‘개새끼’라는 욕설이 저항의 전부인 여자는 심지어 남자를 위해 짐까지 싸준다. 그리곤 소리를 지르며 큰길로 달려 나간다. 그러나 찢어질 듯한 폐를 쥐고 쓰러지는 그녀의 입에서 ‘아아악~’하는 익숙한 비명이 터지는 순간, 눈물겨운 그녀의 아픔은 익숙한 신파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변질된다.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남자는 어떤가. 그는 우습게도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다시 온 몸 바쳐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아무 여자나 끌어안는 도회적 마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딱히 적당한 명분이나 욕망이 있어서는 아니다. 어떤 당위나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생략된 표현 속에서 그는 그냥 그렇게 사는 남자라 추정할 뿐이다. 그가 한때 죽음이 두려워 훌쩍였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죽음 앞에 그렇게 용감해질 수 있었는지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친구를 잃고, 여자를 잃고, 사랑을 잃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 뿐이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여자도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돌보기에 앞서 사랑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결코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 그런 남자도 있을 것이다. 내일이고 오늘이고 순간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구제불능의 인생을 돌아보는 남자.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인다고 해서 영화 <행복>이 지니는 통속적 한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한 순간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그럼 ‘지고지순’이라는 이름 앞에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보이는 캐릭터의 진부함은?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한 토막을 반추하기 위해 꼭 버림받는 여자와 버리는 남자가 등장해야 하는 걸까? 그 지긋지긋한 예스러움조차 복고주의라면 이건 해도 좀 너무하지 싶다.
뒤로 가는 남과 여
순애가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조건 따라 흘러가고, 즉석요리처럼 일회적인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한다. 사실, 이런 말들이 나온 지도 꽤 오래 됐다. ‘인스턴트’와 ‘찰나’가 넘쳐나는 시대에 사랑의 다른 얼굴을 찾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목숨도 걸고, 가진 것 다 주고도 후회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향수, 있을 수 있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일컬어 지고의 선이라 말한다. 평생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사랑>이나 <행복>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 그 자체는 눈물겹게 소중하긴 하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봐도 이 두 편의 주목받는 영화가 지닌 이야기와 대사, 캐릭터 묘사, 전달방식은 너무 구시대적이다. 여자는 꼭 몸을 팔고, 남자는 꼭 주먹질을 해야 하나? 사랑을 잃은 슬픔을 극복할 길은 죽음밖에 없던가? 다 퍼준 뒤 우는 것은 여자고, 버리고 후회하는 것은 남자여야 하나?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삶의 극단적 찰나성을 드러낼 방법은 꼭 가녀린 시한부와 한적한 농촌생활, 자기 파괴적 즐거움과 답답한 도시생활과의 대비를 통해야만 가능한가? 대체 왜 늘 그들은 그렇게 자기 반복적인가? 굳이 뭘 지키고, 일방적으로 버리고 버림받는 과정이 없으면, 마초적 로맨스나 복고적 신파멜로가 아니면 사랑이나 행복은 표현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감정인가?
순애보에 대한 그리움,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아련함, 따뜻하고 포근했던 시절에 대한 반추, 사라진 행복에 대한 회한. 모두 아름다운 감정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방식은, 그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그릇은 이제 좀 달라질 때도 됐다. 뒤로 가는 남과 여의 진부한 사랑이야기 대신 삶이 묻어 있는 진솔한 연애담 하나쯤 세상에 나온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다.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갖고 버티고 살아가는 남녀의 지고지순하고 끈질긴, 그리하여 결국은 생활을 뚫고 궁극적 감정의 판타지에 도달하는 그런 사랑이야기를 기대하는 건, 역시나 무리인 걸까?
2007년 10월 9일 화요일 | 글_이지선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