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라이>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인물을 내세우거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것은 아니다. 전 세계가 폐허로 변한 2043년을 배경으로, 누군가가 했을, 어떤 역할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일은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만들어지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것. 인류의 재건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폐혀가 된 땅덩이를 걷기 시작한다.
2043년, 폐허가 된 지구 위에 한 여행자가 서 있다. 그의 이름은 일라이.(덴젤 워싱턴) 그는 무법천지의 땅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가고 있다. 그가 지닌 물건은 인류의 새로운 희망으로, 카네기(게리 올드만)는 그 가치를 알아보고 부하들을 풀어 일라이를 위협한다. 폐허의 땅에서 새로운 주인으로 군림하려는 카네기는 일라이의 물건으로 자신의 야망에 정점을 찍으려고 한다. 갖은 방법으로 일라이의 목숨을 위협하는 카네기. 결국 물건은 카네기의 손에 들어가지만, 일라이는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인 서쪽 땅에 도착한다.
사실 <일라이>는 이야기 자체가 스포일러일 수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요소가 많다. 일라이의 존재와 여행의 목적, 그가 가진 물건, 서쪽 땅 등이 모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뒤집는 반전과 같은 깜짝쇼를 펼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가 종교적인 성향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라이>를 종교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태생은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와 정치, 문화 등으로 그 폭을 넓힐 수가 있다. 다만, 기준과 방향성이 다소 다르다.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일라이>에서 가장 큰 목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파멸된 인류의 재건이다. 하지만 마법처럼 한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그 작업의 화룡점정이 바로 일라이가 가진 물건이다. <매드 맥스>를 연상하게 하는 황토빛 폐허의 땅덩이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인다.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물건을 빼앗는 악당들의 폭력이 난무하고, 물을 차지한 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이곳은 인류의 폐망과 새로운 시작의 혼란스러운 교차점이기도 하다.
영화 속 비주얼은 그래서 더욱 눈이 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은 모든 것을 말려 죽일 듯 강하고, 사막의 모래를 연상시키는 전체 색감은 다른 설명 없이도 인류의 대재앙을 상징한다. 다리는 끊어졌고, 자동차는 고철이 되어 산을 이루고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은 메말라 갈라졌고, 도시는 형태를 잃은지 오래다. 제작진은 인류의 멸망을 표현하기 위해 뉴멕시코의 황량한 지역을 선택해 레드 디지털 카메라로 질감을 최대화했다. 또한 강한 음향효과와 박력 있는 사운드를 통해 임팩트를 살리는데, 이는 일라이의 상징성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일라이는 거친 사네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길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며 묵묵히 서쪽으로 향한다. 법도 도덕도 실종된 약육강식의 세계를 헤쳐 인류의 희망을 목적지까지 전한다. 길을 걸으며 그가 치른 희생과 험한 여정을 통해 얻은 가르침은 인류 새출발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 재건 사업이 서구적인 시각으로 그려졌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인류 문화의 새로운 시작이 서구인들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기록에 의한 것이라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든 것은 사실이다.
휴즈 형제는 거의 10년 만에 새로운 영화를 내놨다. 하지만 <사회에의 위협> 등과 같은 힘이 넘치는 영화를 찍던 이들이 인류의 구원에 대한 종교적인 소재로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은 다소 의외다. 테두리를 깨부수며 저항 정신을 일깨웠던 그들이, 험한 세상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인류의 희망을 구원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왠지 낯설다. 하지만 이야기의 짜임새와 다양한 해석은 많은 여지를 남긴다. 또한 덴젤 워싱턴의 우직한 연기와 세상의 끝을 보는 듯한 영상은 <일라이>가 가진 가장 도드라진 장점이다.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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