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차라리 뒈져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이상은 <권태>의 첫머리에서 대뜸 이렇게 토로한다. 어디로 가야 끝이 나는지 모를 내일이 또다시 창 밖으로 엄습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공포라고. 모든 인간 이욕과 승부에서 초월할 수 있도록, 권태를 인지할 수 있는 신경조차 마비되도록 아주 바보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그렇게 탄식한다. 그러나 천재는 아니되, 역시 권태가 두려운 우리들은 그 행간을 읽는다. 지리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것이 정말 그의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운 것은 권태 그 자체가 아니라 조금도 나아질 것 없는 내일을 알면서도 그저 습관처럼 살아내는, 거기에 익숙해져버리는 자신. 권태를 인지하는 사람들은 달리 말해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딘가 분명히 있을 좀더 나은 삶을 움켜쥐고 정말 사는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은, 그러나 마치 피안처럼 아득하기만 한 희망을 그들은 결코 버리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 역전’은 복권당첨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 같은 남자를 만나 가격표도 붙어 있지 않은 부티크의 옷들을 마치 과자 사듯 쓸어 담는 것도, 번쩍거리는 스포츠카를 몰며 선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 것도 결국은 삶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문제는 결국 나이기 때문에. 좀 나은 인생을 꿈꾸는 것은 이 지긋지긋하고 남루한 ‘나’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욕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신세 사정없이 꼬여버린 한 남자가 겪는 한 바탕의 백일몽을 다룬 <역전에 산다>의 설정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실 <역전에 산다>는 소위 ‘인생 역전’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기에 역부족이다. 골프채 놓은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판에 며칠 연습해서 챔피언을 간단히 누를 만한 기량을 획득한다는 설정은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 넘긴다 해도 다분히 어이없으며(차라리 그저 운의 산물이라고 눙쳐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이는 우여곡절 끝에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승완에게 연이어 일어나는 행운들을 보더라도 마찬가지. 마치 승완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는 김승우의 연기는 좋은 편이지만, 하지원의 경우 거북살스러울 정도로 어색한 부분들이 적잖이 불거진다. 많은 사람이 <역전에 산다>에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고 나면 화면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코미디 프로―설명하려니 장황하지만―를 떠올리는 것은 설정상의 유사성 뿐 아니라 그 만듦새에도 이유가 있다는 얘기. 그런 점에서 영화는 관객을 너무 얕봤다.
그러나 동시에 <역전에 산다>가 가지고 있는 소박한 미덕들은 영화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일약 골프 황제로 변신한 주인공이 소위 잘 나가는 인생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 어그러져 버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그 예. 승완이 반항심 때문에 등 돌려 버렸던,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김성겸)와 해후해 “아버지 잘못했어요.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를 읊조리는 장면은 상투적이라면 상투적인 부분이지만 관객의 보편적인 심리를 두드린다. 모르긴 해도 현실로 귀환한 그는 늘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었을 것이고, 그건 제목 그대로 좀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요건으로 충분하다. 승완과 지영―남편이되 남편이 아닌 남자와 부인이되 부인이 아닌 여성이 서로 가지게 되는 가슴 떨리는 끌림에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오래 입은 옷처럼 익숙한 모든 것들을 새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 변화도 사랑도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