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나서 선택하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다음엔 화면 속 주인공이 움직인다. 게임은 관객의 결정이 화면 속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다. 방법이 조이스틱이건 키보드건 단순한 행동이라도 게임 속에서 게이머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그러니 게임을 영화로 바꾸어 놓으면 시시해질 수 밖에. 아귀가 맞지않고 빈틈 투성이 유치한 시나리오가 필름에 옮겨지면 엉터리 영화가 되지만, 게임에서는 수작이 될 수도 있다. 게임은 짜임새 있는 배경보다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니까. 필름과 조이스틱 사이의 간극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게이머가 강조하는 '손맛'이라는 것은 게임과 영화의 간극을 대표하는 존재다.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재미가 게임의 '손맛'에 숨어있고 서사를 자처하는 게임이 절대 따라 잡을 수 없는 호흡이 영화에는 살아있다. 영화와 게임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각색이 소설의 경우보다 훨씬 까다로운 것은 재미를 느끼는 위치 자체가 다른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최소한 소설과 영화는 내러티브에 관심을 갖지만, 훌륭한 게임이 꼭 내러티브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격투의 신천지, 오락실을 평정한 <스트리트 파이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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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데를 구사하는 두 주인공으로 게임을 진행시켰던 <스트리트 파이터>는 더 강한 상대가 차례로 주인공의 앞을 가로 막는 스테이지 단위의 게임이었지만, 속편인 <스트리트 파이터 2>는 매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세계 각국의 무술가들을 모조리 게이머가 운용할 수 있는 캐릭터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가라데 무술가만을 조종하며 세계의 강자들을 격파하는 단선적인 구성은 서로 다른 개성과 장단점을 가진 각종 무술인들이 자웅을 겨루는 무술대회 형식으로 바뀌어 버렸고 게이머는 전작의 몇 배에 이르는 개성 강한 무술인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각종 무술의 특징과 장단점을 살리려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시도는 느리지만 잡기에 강하고 한방의 파괴력이 강력한 레슬링이나 돌진능력이 탁월한 스모, 빠르고 섬세하지만 기술의 강함은 다소 부족한 쿵푸 식으로 게이머의 선택을 늘려놓았고 혼자 오락실에 앉아서 즐기던 게임을 두 사람이 기술을 겨루는 '대전격투'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일년 만에 오락실의 풍토를 바꾸어 놓고 새로운 게임 장르를 구축한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줄거리는 대단하지 않다. 전작 <스트리트 파이터>는 일본 가라데를 평정하고 세계를 돌며 강한 상대를 찾아 싸웠던 희대의 파이터 최영의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바, 주인공이 세계를 돌며 싸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구성이었다. 문제는 <스트리트 파이터 2>에 이르러 늘어난 주인공들이 각자 세계를 돌며 싸우는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점이었다. 전편부터 주인공을 맡은 두 가라데 무술인은 전작처럼 세계를 돌며 무사수행을 하는 것으로 설정하면 되지만, 러시아 출신의 레슬러와 요상하게 생긴 치파오를 입은 중국여성과 거대한 덩치의 스모선수같은 인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세계를 떠돌며 강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게임의 프로듀서 아키라는 주인공마다 각기 다른 이유를 달아놓는다. 요가수행자는 마을을 위해서 레슬러는 명예를 위해서 중국무술가는 사실 인터폴인데 범죄조직의 배후를 찾기 위해서라고 하는 식이다. 모든 캐릭터에 각각 배경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매번 게임을 할 때마다 새로운 캐릭터로 새로운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고, 이러한 배려는 게임의 수명을 늘려주었다. 더불어 캐릭터의 개성이 더 분명해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격투 과정의 '손맛'이 중시되는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치밀한 배경 줄거리는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 캐릭터에 부여된 배경 이야기는 허술하고 과장된 뼈대만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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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어느 국가를 장악한 군사집단 샤돌과 그에 맞서는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배경 이야기는 원작 게임에서 미국 대표 가일(영화에서 장 클로드 반담의 배역)과 중국 대표 춘리(영화에서 밍나 웬의 배역)의 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다. 영화는 기본줄거리를 핵심으로 각색한 기묘한 게임 캐릭터가 단연 압권으로 샤돌의 수장 바이슨 장군 역을 소화하는 라울 줄리아의 모습이 특히 허탈하다. 구미와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빅히트한 게임이다보니 각색한 괴작이 꼭 헐리웃에만 있는 것은 아닌데, 유덕화 - 곽부성 - 장학우 - 정이건의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이는 1993년작 홍콩영화 <스트리트 파이팅>은 원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거의 90%이상 들어냈음에도 캐스팅이 아까운 수준이고,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이제규 감독의 1993년작 한국영화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스텝과 배우 전부가 정신이 나가 있는 희대의 괴작 아동영화다.
아류의 B급 감수성, 비주류를 타고난 <모탈컴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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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작사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와 SNK의 <아랑전설>이 주도한 초창기 '대전격투'게임에서 미국적인 감수성으로 만들어진 어클레임의 <모탈컴뱃>은 동일한 장르의 게임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실제 배우를 촬영해 게임 캐릭터로 사용한 것이 <모탈컴뱃>의 특징. 잔혹함과 사실감 덕분에 구미에서의 인기는 상당했고 본 고장과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만화적인 과장과 연출이 결여되고 일본 제작사의 혁신적인 게임 스타일을 따라가지 못 한 <모탈컴뱃>은 3편을 넘기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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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B급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목표로 만든 영화임을 감안하면 <모탈컴뱃>은 제법 볼 만 하다. 이 영화를 만든 폴 앤더슨 감독이 이후 <레지던트 이블>이나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같은 결과물을 낸 것을 보면 게임을 각색하는데 재능이 있다고 인정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작은 성공 이후 속편도 나왔고 TV시리즈도 나왔지만 첫 작품 <모탈컴뱃>을 뛰어넘지는 못 했다. 물론 게임도 그랬고.
키치 소녀의 메이저 진출, 인디아나 존스와 홍콩느와르의 잡종교배 <툼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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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헐리웃 영화를 즐기는 청년들로 이루어진 코어 디자인의 게임 제작진은 스펙타클한 고대 유적을 배경으로 쌍권총을 휘두르며 활약하는 게임을 착안한다. 간단한 조종으로 다양한 액션을 연출하는 <툼레이더>의 게임 디자인은 매우 완성도가 높았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영향받은 함정과 비밀로 가득한 고대유적도 게임을 풀어 나가기엔 흥미로운 배경이 되어 주었다.
게임으로써 게이머와 교감하는 '손맛'이 훌륭한 수작 게임이었던 셈. 게임 제작진의 대부분을 구성하며 <툼레이더>를 구매한 대부분의 고객을 구성하는 성별이 남성인 것을 감안하면 쌍권총을 들고 유적을 헤집는 주인공이 가슴 크고 핫팬츠를 입은 미녀인 이유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남은 것은 게임의 매끈한 컨셉을 적당히 받쳐줄 낭만적인 배경 이야기를 만드는 것 뿐이다.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의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고 헐리웃 메이져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가 엉성하고 소년 취향의 환상으로 가득한 게임 <툼레이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고아 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을 상속받은 거부에 옥스포드 졸업에 공수부대급 육체능력을 가진 완벽함이 라라의 인기요인이었으니까. 덕분에 영화 <툼레이더>는 인물 사이의 긴장과 드라마를 허락하지 않는 지나치게 완벽한 주인공을 데리고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근본적으로 뻣뻣한 드라마를 스펙타클한 스턴트로 수습할 수 밖에 없었다.
라라의 캐릭터에 인간미를 더하려고 했던 <툼레이터2>도 결국 라라의 완벽함을 근본적으로 손 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드라마로는 시시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결국 영화 <툼레이더>는 라라와 놀랄만큼 일체가 된 스타 안젤리나 졸리를 즐기는 맥빠진 작품이 되었다.
좀비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좀비척살게임 <하우스 오브 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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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형총을 게이머가 들고 화면 상에 나타나는 좀비를 사격하는 '체감게임'은 좀비가 나타나는 정황의 공포나 홀로 남겨진 외로움의 경악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덤벼드는 적만큼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적을 꼬꾸라트리는 손맛 이 좀비척살게임 <하우스 오브 데드>에는 존재한다. 영화로 치자면 <하우스 오브 데드>의 매력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공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흥분에 있다.
짧은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자극을 즐기는 오락실 환경에 최적화된 <하우스 오브 데드>는 스토리를 알기 조차 힘든 오락실 게이머의 특성을 고려하여 앙상하기 이를 때 없는 기둥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좀비가 들끓는 집에 권총 한 자루 들고 쳐들어가 적을 사살하는 게임에 뭐 복잡한 이야기가 필요하겠느냐 마는 세심하게 디자인한 다양한 좀비가 등장하는 게임에는 그에 걸맞는 화려한 이야기가 필요한 법이다. 오히려 좀비가 나타난 이유조차도 알기 힘든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보다는 <하우스 오브 데드> 쪽이 일목요연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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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원작이 가지고 있던 사격의 쾌감, 명중의 흥분에 집중한다. 좀비가 들끓는 섬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청년에게선 공포를 찾기 보다 광란을 찾기가 쉽다. 하지만 영화에서 게임의 '손맛'을 살리는 것에는 실패한 듯 미국에서의 흥행 참패에 이어 한국에서도 곧장 비디오로 직행했다.
좀비와 음모론의 만남, 아드레날린으로의 초대장 <레지던트 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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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도 많은 장르가 존재한다. 매체가 다른 만큼 영화의 장르 구분과는 전혀 다르게 구분되는 게임의 장르 중에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치밀한 연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르가 있다. 오락실을 지배하는 빠르고 격렬한 게임이나 온라인을 지배하는 지리멸렬한 앵벌이 게임 사이에 있는 '어드벤쳐'라는 장르의 게임은, 게이머가 주인공의 대화와 행동을 지시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플롯과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이다. 빠른 판단력과 반사신경보다는 상상력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어드벤쳐'게임은 가장 영화나 소설과 닮아있고 이야기가 풍부한 게임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영화 각색 게임(<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과 고전적인 탐정물과 추리물(<진구지 사부로> 시리즈), 음산하고 복잡한 호러물(<사일런트힐> 시리즈)같이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은 대부분 '어드벤쳐' 장르를 기반으로 삼고있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 역시, 큰 히트를 한 캡콤의 호러 어드벤쳐 <바이오하자드>(미국 수출판 제목이 <레지던트 이블>이다)를 각색한 작품이다
외딴 저택이 엄브렐라의 핵심 시설 '하이브'로 이어지는 기둥 줄거리와 장면 구성은 실종된 대원을 찾아 정체불명의 저택으로 들어왔던 등장인물만 교체한 체 그대로 진행된다. 인체실험 후 깨어난 주인공 앨리스(밀라 요요비치)가 발견하는 폐허 도시가 인상적인 엔딩은 <매드니스>나 <28일후>같은 황량한 공포물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원작 게임 <바이오하자드2>와 <바이오하자드 3>의 오프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속편인 <레지던트 이블 2>는 좀비 바이러스에 의해 전 시민이 좀비가 된 라쿤시티와 실험 실패를 무마하려는 군산복합체 엄브렐라의 음모를 중심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담이 전개되는 전형적인 좀비물이다. 넓어진 무대와 많아진 좀비, 더 더러워진 음모로 업그레이드된 속편은 헐리웃의 속편 공식 임과 동시에 게임 <바이오하자드 2><바이오하자드 3>의 전략이기도 했다. 더구나 원작 게임 팬이라면 <바이오하자드 3>와 똑같은 복장으로 등장하는 질 발렌타인(시에나 길로리)의 모습에 열광할 지도 모르겠다.
때로 '아이들 전자오락'과 유치한 영화를 동일시하는 평자들의 무지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수작 게임이 유치한 영화가 되는 것은 게임이 '유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과 영화가 전혀 다른 자극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매체기 때문이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유치해 지는 것은 소설 각색의 100분의 1 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제작진의 무성의 때문이다. 원작의 매력을 잘 알고있는 <레지던트 이블 2>에 기뻐하는 것은 그런 작은 애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름에서 '손맛'을 느끼는 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