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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안내! 용감한 노장의 귀환
블랙북 | 2007년 3월 26일 월요일 | 이지선 이메일

폴 버호벤이 돌아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충격적인 영상으로 관객에게 도전장을 던지길 꺼리지 않는 용감한 노장의 귀환이다. 영화 <쇼걸>로 인해 한때 골든래즈베리 선정 최악의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적도 있고, 이후 야심차게 발표한 SF <스타쉽 트루퍼스>와 <할로우맨>은 처절한 실패와 극단적 악평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다. 시대를 거슬러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도전하고 있지만, 폴 버호벤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격렬한 역사적 충돌의 시기, 파란만장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또 한 번 얄팍한 인간의 본성과 욕망 앞에 비루한 삶을 들춰낸다. 당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했다는 영화, <블랙북>이다.

영화는 이스라엘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다. 성지순례를 온 서구 관광객들의 무리가 몰려들고, 그 왁자함 속에 예기치 않은 만남이 이루어진다. 역사의 격랑 속에, 파란의 삶을 살았던 유태인 여성 레이첼. 한때 자신을 도와주었던 네덜란드인 친구와의 짧은 만남을 가진 그녀는 이내 회상에 젖는다.

역사의 파고 앞에 인간은 한낱 작은 존재일 뿐이라던 누군가의 지적대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랑의 시기를 지나야 하는 레이첼의 삶은 한 순간도 쉽지 않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무대도 없고, 볼 품 없는 식사라도 얻어먹기 위해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비난에도 의연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자처한 남자의 제안에 따라 도모한 국외도피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이제 가족과 재산 모두를 잃었다. 몸뚱아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현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그녀를 레지스탕스로 만든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질주하던 그녀는, 이내 사랑에 발목을 잡혀 주저 앉는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인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졌으니, 운명의 장난도 이쯤 되면 서사시급인 셈이다.

감독 폴 버호벤은 이 아름답지만 불행한 여성의 부침투성이 삶을 스릴러 드라마의 관습으로 풀어간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 모호해진 선과 악의 구분은, 평온할 새 없는 유태인 여성의 삶을 긴장의 연속으로 만든다. 인종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생존을 위해 통곡을 미뤄야 하는 인간적 자괴감,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발견되는 비열함, 복수를 위해 간단히 무시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복수보다 강렬한 욕망들, 총구를 들이민 호의와 속고 속이는 협잡, 그리고 거듭되는 배신을 통해 기어이 마주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회의까지. 안심해도 좋을 순간은 별로 없다.

다양한 감정의 틈새를 헤집고 다니는 감독의 오지랖은 넓지만, 매끈한 화면과 편집은 이 같은 8천평 오지랖을 비교적 구석구석 커버한다. 다양한 인물에 비중을 나누어주면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 드라마 연출도 비교적 안정돼 있다. 그는 이념이 충돌하는 순간에조차 욕망으로 갈등하는, 혹은 점철된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습자지처럼 얄팍한,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무거울 수밖에 없는 삶의 무게를 ‘스케치’한다. 이전의 작품들과 직접 비교한다면 묘사에 있어서의 도발성은 한 수 접어줌이 마땅하겠지만, 내면에 대한 천착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여전히 욕망의 포로이고, 삶을 개척하는 씩씩하고 섹시한 여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앞에 솔직한 인물이다.

이름도 얼굴도 낯선 배우들의 활약은 감독의 이 같은 도전을 전방위에서 돕는 투사. 주인공 레이첼을 연기한 캐리스 밴 호튼의 연기는 단연 발군으로,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여인과 복수를 위해 온몸을 사르는 팜므파탈 사이를 무리없이 오간다. 특히 반전이 밝혀지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온몸을 떨며 오열하는 그녀의 연기는, 의외로 허술하게 처리된 해당 시퀀스의 약점을 능히 덮고도 남을 수준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독일배우들이 호연을 펼치고 있는데, 이들 또한 탄탄한 연기로 꽤나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는 극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지적이고 양심적인 독일군 장교로 분한 배우 세바스티안 코흐. 영화 <타인의 삶>을 통해 고뇌하는 지식인의 얼굴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그는, 사랑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는 독일군 장교 역할 역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누군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했지만, 때때로 삶은 바로 그 예측불허함으로 인해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의 배경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자리한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격랑 속에, 유태인 출신의 부유한 가수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레지스탕스로, 순정에 사로잡힌 독일장교의 연인으로, 그리고 다시 역사의 증인으로. 쉴 틈 없이 변화하는 삶을 겪어낸 뒤, 회한 어린 눈으로 먼 하늘을 응시하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어떤 여운을 느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예측불가능한 삶의 질곡에 대한 공감, 혹은 욕망 앞에 한 순간도 자유로운 적 없었던 인간존재의 얄팍한 본성에 대한 반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폴 버호벤 감독의 팬이다.
-실화 소재 영화에 쉽게 혹하는 편이다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스릴러를 좋아한다
-어설픈 액션보다는 안정된 이야기 쪽이 더 매력적이다
-<타인의 삶>에서 이미 주목한 배우, 세바스티안 코흐가 궁금하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규모 전투씬이 없는 건 배신이다
-영화의 묘미는 무조건 놀라운 반전이다
-영어 이외의 외국어는 귀가 참아내지 못한다.
-<원초적 본능>류의 에로틱 스릴러를 기대했다
27 )
hrqueen1
폴 버호벤,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이네요!   
2007-03-27 00:29
theone777
보고 싶어요~ ㅎ   
2007-03-26 23:34
ffoy
중후한 멋이 있는 영화일 것 같네요~   
2007-03-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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