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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좌표이자 앞으로의 가이드라인 <1947 보스톤> 강제규 감독
2023년 10월 5일 목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은행나무 침대>(1996)와 <쉬리>(1999)로 한국 영화판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물꼬를 트고 자양분을 마련했던 강제규 감독이 <장수상회>(2014) 이후 9년 만에 관객과 마주한다. 국민영웅 ‘손기정’(하정우)과 가슴 뜨거운 이인자 ‘남승용’(배성우), 그리고 신예 ‘서윤복’(임시완)이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태극기를 달고 출전해 거머쥔 소중한 승리의 역사 <1947 보스톤>을 사실적으로 써 내려갔다. 과잉 감정과 과한 애국주의라는 선입견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감독을 만났다. <1947 보스톤>이 현재 자기 위치를 냉정하게 가늠할 ‘지표’이자 향후 갈 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라고 말한다.

<장수상회> (2014) 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다. ‘마라톤’이라는 소재에 끌린 이유는.

그러게, 시간이 빠른 건지 내가 게으른 건지 어느새 9년이나 흘렀다. <장수상회> 이후 중국 작품 하다 무산돼서 2년을 허비하고, 또 코로나로 인해 3년 정도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실 ‘마라톤’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영화 <불의 전차>(1981) 등을 보면서 마라톤이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졌었거든. 이런 관심이 있던 차 2018년에 시나리오를 받았다. 일단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장르라 기회가 와서 기뻤다. 또 마라톤에 대해서 조금은 아는 나조차 ‘1947년 보스턴 대회’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라, 이를 영화를 통해 많은 분께 알리면 좋겠더라.

시나리오의 어느 면에 끌렸는지. 실화 자체가 지닌 힘이 크지만, 영화적 상상력을 입히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나. 실화 바탕 영화는 처음 아닌가.

손기정, 남승용, 서윤복이라는 서로 다른 세 인물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과정이 마치 꾸민 이야기인 듯, 영화보다 더욱더 영화 같았다. 이 세 분 삶의 궤적이 이미 너무 훌륭한 시나리오였다.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는 창작자로서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연출자로서 글을 각색하고 반전을 마련하고 상상력을 불어넣고, 인물을 재해석하고 싶은 욕심과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이번엔 내가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되겠더라. 자체로 좋은 이야기를 기교없이 담백하게 그려 나가는 것도 의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마라톤’하면 손기정 선생 아닌가. (웃음) 모든 국민이 다 아는 손기정이 아닌 서윤복에 초점을 맞춘 의도가 있을 것 같다.

보다 많은 관객이 ‘서윤복’에 동화되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손기정이 이미 국민적 영웅이라면 서윤복은 가진 것 없이 어려운 현실을 사는 친구다. 이런 면에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좀 더 이입하겠더라. 서윤복은 경력이라고는 두 번 풀코스를 완주한 것이 다이고, 국제 대회는 더군다나 처음인, 소위 ‘스펙’이 딸리는 마라토너다. 이렇듯 별거 없는 이력으로 거대한 성과를 이룬 그에게 젊은이들이 자신을 투영하고, 이를 통해 힘과 용기를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또한 남승용을 통해서는 1등 뒤에 가려진 2등과 3등의 가치를 새삼 되새기지 않을까 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한을 풀고자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보스톤 마라톤에 참가한 놀라운 투지의 소유자이자, 후배 서윤복을 위해 기꺼이 페이스메이커를 해주는 선배 아닌가. 요즘 보기 드문 인간상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역시 많은 부분을 느끼고 얻어가지 않을까 한다.

보스톤 마라톤에 참가하기까지 초·중반부 손기정의 캐릭터성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화가 결국 서윤복으로 귀결되는 건 맞다. 하지만 ‘1947 보스톤’의 영광이 왜 영광인가, 단순히 태극기를 달고 1등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일제강점기였던 시기다.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일장기를 달고 달려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속은 어땠을까. 그는 영광 뒤 오욕의 상처가 너무 컸던 인물이고, 이러한 서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서윤복의 금메달은 단지 잘 달린 사람이라는 표상밖에 안 됐을 거다. 영화의 모든 서사의 근간과 기둥은 손기정이라, 특별하게 그가 변모하는 과정이나 부연 서사를 더하지 않아도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정우 배우가 굳건하게 중심축을 잡아줬다는 생각이다.

사실 손기정 역에 하정우 배우의 캐스팅은 좀 뜻밖이더라. 너무 현대적인 느낌이기도 하고, 언뜻 연상되는 조합은 아니었다.

고정관념을 부수고 파괴하는 것 또한 창작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2014)를 보고 이 친구(하정우)는 얼마든지 변신하고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손기정 역을 캐스팅하면서 제일 닮은 사람, 유사한 사람은 누굴까 하고 생각해보니 하정우 배우였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손기정 선생은 극 중에서처럼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옷도 잘 입는 원래 댄디한 분이다. 굉장히 멋쟁이라 비슷하게 스타일링 한 거다.

임시완 배우는 ‘서윤복’ 캐릭터에 착 감기는 모양새다. 또 등장 인물이 많지 않음에도 영화가 꽉 찬 인상이다. 네 배우(하정우, 배성우, 임시완, 김상호)가 일당백의 역할을 해줘서 그런가 보다. (웃음)

감독들은 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배우를 눈여겨보게 된다. 앞으로 누구와 작업할지가 큰일이니 말이다. 임시완 배우는 드라마 <미생> 때부터 눈여겨봤는데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을 보며 ‘얘는 물건이다’ 싶더라. 큰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배우들 저마다 개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데 이번 네 배우는 모두 빛깔이 다 달랐다.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120% 소화해줘서 이번에 운이 따르나 보다 했다. (웃음) 너무 고맙고, 앞으로 좋은 작품이 있으면 다시금 꼭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보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궁금하더라. 특히 대회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 운동과 보스톤 마라톤 대회 기자회견장에서 손기정이 무릎 꿇은 장면이 그랬다.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모금운동과 기자회견 모두 사실에 기반해 극화 한 부분이 있다. 마라톤 대회에 참석차 필요한 보증인을 구하기 어려웠고, 이때 ‘백남현’(김상호) 선생이 보증인으로 나선 것은 팩트다. 국민 모금은 실제로 벌이기는 했지만, 모금은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많아서 아마도 마라톤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겠지. 결국 스메들리 여사를 중심으로 주변이 십시일반으로 보태어 참가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소규모 모금을 국민적인 모금으로 확장했다고 보면 된다. 또 보스톤 대회 측이 당시 대한민국은 하나의 국가로 존립하기 전인 미군정 시기라 성조기를 달려고 했던 것은 팩트다. 손기정 선생의 강력한 설득으로 태극기를 달게 된 거로 알고 있다. 극 중과 같은 기자회견이나 무릎을 꿇는 행위는 없었지만, 맥락은 같다고 본다.

마라톤 도중에 개가 난입한 건 당연히 픽션이겠지? (웃음) 사실이라면… 마라토너가 불안해서 뛸 수 있겠나!

아니, 그건 사실이다. (웃음) 마라톤 후일담으로 신문에 기사화되기까지 했다. 보면 극 중과 똑같이 묘사돼 있다. 한 여성이 1등 선수가 지나가니 박수 치다가 개 줄을 놓쳤고, 개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상황에 흥분한 나머지 경주로에 뛰어 들어가게 된 거다. 정말 이야기 자체가 너무 영화적 아닌가!

난입한 견공 때문에 서윤복 선수가 넘어진 후, 일어날 때의 그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참! 정말 임시완 배우의 기막힌 연기였다.

마라톤 장면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장면이었다. 시간도 부족한데 개가 원하는 대로 연기해주는 게 아니니 말이다. 리허설하는데 자꾸 딴 데로 가며 NG 내는 거다. (웃음) 다행히 본 촬영 때는 잘 해줬다. 넘어지는 장면은 임시완 배우에게 통째로 맡겼었다. 넘어지고 가까스로 일어나서 다시 뛰기까지, 보통은 사전에 체크하는데 이때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배우가 설정한 날 것의 상황을 보고 싶더라. 카메라 동선만 체크하고 바로 슛 들어갔었다.

배성우, 임시완 배우 모두 미리 마라톤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는 게 뛰는 자세부터 느껴진다. 근육의 쓰임, 동작, 피지컬 등 허투루 해서 나올 수 있는 폼이 아니더라.

리얼리티가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주인공이 아니라도 역할에 필요한 훈련을 미리 하는 편이다. 영화 <쉬리>(1999) 때 특공대원 역할을 맡은 배우들 모두 몇 달 전부터 훈련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 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은 군인답게 보이도록 미리 준비했고, 이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해온 작업이다. 이번 역시 진정한 마라토너가 되어야지, 가짜 같이 보이면 안 된다는 원칙하에 육상 구락부 열두 명을 뽑을 때도 체형과 체력이 단련된 친구들 위주로 캐스팅했다. 촬영 3개월 전부터 트레이닝을 시작해서 5개월의 촬영 기간 동안 훈련과 식단관리를 꾸준히 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장시간의 철저한 훈련과 준비 덕분에 촬영 자체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소재와 이야기 흐름상 가슴이 저절로 뜨거워지는 지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 신파와 국뽕이라는 허들을 피해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게 관건이었겠다. 젊은 세대의 취향과 정서를 고려한 부분이 있다면.

감독이 자기 목소리를 담는 것도 필요하지만, 예산이 큰 영화일수록 시장의 상황과 트렌드, 관객의 성향 사이 밸런스를 맞추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화를 통해 고정관념을 허무는 것도 중요하다. 실화 바탕 시대극에 (신파 혹은 국뽕 같은) 어떤 선입견을 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선입견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영화를 본 후 ‘역시’가 아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네’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었다. 젊은 세대가 힘든 시기를 극복해 온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를 반추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고, 한 번쯤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했다.

애국주의와 눈물샘 자극을 아예 싫어하는 분도 있지 않나.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과한 애국주의와 강요된 눈물이라고 느껴서,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생기는 것 같다. 이건 영화를 이렇게 만든 우리의 책임이니, 결자해지라고 우리가 풀어낼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중한 승리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 그대로를 들여다볼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당신이다. 한편으로는 성공과 실패라는 명암이 드리운 영화 인생사였겠다. 영화산업이 격랑에 휩쓸린 요즘,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여러 도전을 했고, 그 성취물로 인해 한국영화 발전을 조금이나마 촉진할 수 있었어서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이후 한국영화가 급속히 성장했다. 리스크가 큰 영화를 하며 예전에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라는 말을 했는데, 지금은…(웃음) <1947 보스톤> 속 ‘내가 먼저인지, 나라가 먼저인지’라는 대사처럼, 이제는 ‘나’라는 본질에 대한 물음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물론 한국영화가 잘돼야 한다는 소명감은 여전하다. 그래야 내가 놀 판도 커질 것 아닌가!

여러모로 <1947 보스턴>의 의미가 각별하겠다.

흥행 여부를 떠나서 영화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결국 지금의 내 위치를 알려줄 냉정한 ‘좌표’가 될 것 같다. 향후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영화 또는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또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SF 장르를 비롯해서 여러 개 진행 중인데, 저마다 스케줄이 있어서 뜻대로는 힘들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꿈이라면, 글쎄… 평소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 무엇을 보든 재미있고 개성 있는 콘텐츠는 사진 찍어 놓고 나중에 영화에 활용하려 한다. 늘 영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제 나이도 먹고 힘도 드니 만약 영화를 안 한다면, 그러니까 ‘쉬면서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 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데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불행하면 안 되지 않나. (웃음) 나중에 편집기 하나 갖고 모바일로 찍더라도 영상을 찍는 일이 내 삶일 것 같다. 여기서 완전히 손을 떼면 그야말로 ‘말로만’ 행복하지 않을까 한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2023년 10월 5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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