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잘 알려진 폭군이다. 그의 광폭하고 기괴한 일화는 학창시절 역사시간에도 종종 들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하지만 영화나 예술작품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실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다. 광기어린 면모를 띠는 캐릭터의 현실화는 보는 이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은 확실하니까..
사실 연산군은 비극적인 면도 많다. 연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인해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폐비가 되어 사약까지 마시고 죽어야했던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극은 그의 어린 유년 시절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어린 시절을 사랑없이 삭막한 궁궐에서 홀로 커오며 느꼈던 외로움은 결국 그의 정신질환에 가까운 기괴한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법하다. 애정결핍에서 기인한 성격장애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조선시대 연산군이 다스리던 시절 천민에 불과한 광대가 야심을 무기로 인생을 담보로 잡고 임금을 상대로 한판 거하게 노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구수한 흥겨움으로 출발하지만 비장한 숙연함으로 도착한다. 시종일관 영화를 누비는 놀이판의 경쾌한 장단과 몸짓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만한 볼거리이자 흥겨운 공연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이 점점 그들의 흥겨운 놀이가 아닌 연산을 자극하는 살인게임이 되어가면서 그들의 흥겹던 장단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리고 왕을 가지고 놀아보려했던 사내의 야심찬 희극이 정쟁에 휘말려가는 놀이패의 비극으로 이어지며 여유있는 웃음을 띄던 이야기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이영화는 사극이라기 보다는 시대극에 가깝다. 분명 연산군과 장록수 등의 실존인물이 출연하기는 했지만 사실보다는 픽션에 가까운 내용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구성하여 보여주며 실존인물보다도 영화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물들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형세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대극에 가깝다. 그렇기에 일단 이 영화는 시대상의 묘사가 중요하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의 외관은 일단 합격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거리와 궁궐안의 정경에서 보여지는 시대배경과 함께 인물들의 의상과 왕을 비롯한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의 모습까지 시대의 고증에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놀이패들의 거리공연은 그당시 서민들의 놀이문화를 대변하며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부여할 수 있는 흥미로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흥미로운 재미를 지속시켜 준다. 흥겨움과 긴장감이 고르게 배열되면서 서로 엉키지 않고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서 관객을 지루함으로부터 보호한다. 이는 탄탄한 연출력과 더불어 이야기 구조의 튼실함에서 비롯된 바다.
또한 인물들의 감정선을 살리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 영화를 살리는 일등공신들이다. 감우성이 연기하는 장생이란 캐릭터는 뚝심있으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천생광대기질의 사나이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벗어나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사내다운 기질이 강한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또한 정진영이 연기하는 연산은 변덕이 강한 복합적인 캐릭터다. 난폭하고 사납지만 슬픔을 머금고 있는 정서까지도 표현해내야 하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그는 영화에서 잘 살리고 있다.
그밖에도 여자보다도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신인 이준기의 공길과 장녹수 역의 강성연의 연기 역시 영화에 잘 달라붙는 느낌이다. 여러가지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영화의 성숙도를 한층 더 높여주는 형국이다. 그밖에도 영화를 구성지게 만드는 조연들의 역할 역시 진국이다.
결과적으로 이영화는 전체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 또한 영화가 평이한 수준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관객에게 상당한 만족감을 안겨줄 영화임은 확실하다.
이 영화는 참고로 연극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원작인 연극 '이(爾)'와의 두드러진 차이는 동성애의 코드를 거의 죽여버렸다는 점 정도? 어쨌든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완연한 차별성을 획득한 느낌이다.
영화는 결국 비극으로 고개를 숙이지만 관객은 결코 슬픔을 지니고 극장을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내의 인생을 통해서 통쾌한 해학적 비장감과 인생을 관통하는 통쾌함을 느꼈을테다. 두 눈을 잃은 장생은 마지막 줄타기에서도 아슬아슬한 두려움보다는 그 순간조차도 즐기는 여유를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너털웃음은 분명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즐거운 여흥으로 채워보라는 일종의 권고가 아니었을까. 그의 허무맹랑할 법한 야심은 우리에게 즐거운 이야기 한마당아니었는가. 비록 우리가 보는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었지만 그에게는 후회없는 한판 인생의 종착역이었을 따름이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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