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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vs 왕의 남자, 무엇이 다른가 왕의 남자
luvme1010 2006-01-01 오후 9:24:30 2666   [20]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왕의 남자'는 여러모로 '패왕별희'를 닮았단 지적이 많았다. 연산군이 남색을 즐겼[?!]다는 동성애 코드도 그러했거니와, 천한 딴따라 광대들의 이야기를 다룬 점, 오마쥬라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경극 장면도 두 영화를 겹쳐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2005년 최후의 영화, 2006년의 시작을 빛낼 자랑스런 우리 영화 '왕의 남자'와 '패왕별희'를 비교분석 해본다.

 

▽두 영화는 일단 주제부터가 다르다. '패왕별희'는 자신의 성(性)정체성을 상실한 경극 배우의 이야기다. 주인공 데이(장국영 분)는 어렸을 적부터 언제나 경극의 여자역할만 맡았던 까닭에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상대배우인 샬로가 담뱃대로 입안을 쑤시고 난 후에야 '나는 여자'라는 왜곡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샬로의 장난으로 비로소 '나는 남자'라는 진실을 깨닫고 자살하는 장면은 평생을 '나 아닌 나'로 살아온 그의 인생을, 그가 살았던 혼란스러운 당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동성애와 맞물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핵심 축은, 지적했듯이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이다. 중일 전쟁과 세계2차대전을 거쳐 공산화의 물결과 문화혁명으로 치닫는 중국의 현대사는, 오직 경극만을 알고 살아온 데이에게는 저 먼 곳의 낯선 이야기일 뿐이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중국을 지배할 때, 아무런 부끄럼없이 오로지 샬로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본인들 앞에서 노래했던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와중에도 '만약 내 노래를 들었던 그 일본인 장교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일본에 경극이 전파되었을 것이다'라고 겁없이 말하는 데이의 모습은, 그가 현실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술속에서 사는 듯한 느낌을 전한다. 따지고 보면, 그가 샬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경극이라는 예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반면 샬로나 그의 부인인 쥬산은 데이보다 훨씬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르고, 지향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들의 운명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반면 '왕의 남자'의 공길은 자신이 '남자'라는 정체성이 뚜렷하다. 때문에 장생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이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기 보다는 자기 목숨도 내어줄 수 있는 절친한 동료애에 가까워 보인다. 장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길의 남창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며, 연산이 공길을 찾을 때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새지만, 그렇다고 연산마냥 공길에게 빠져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던가, 공길의 입술을 덮치려고[?!] 들지도 않는다. 연극 '이'에서는 장생과 공길의 관계를 동성애로 그리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 그저 나름대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연산의 입장은 보다 뚜렷하다. 당대 최고의 요부였던 녹수를 멀리할 만큼, 연산은 공길에게 푹 빠져버린다. 마치 '패왕별희'에서 원대인이 데이에게 그랬듯이. 그럼에도 공길이 연산곁에 남고자함은, 연산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정했기 때문이었다. 선왕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열등감과 어릴적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생긴 그의 슬픈 광기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달래줄 수 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고로 이 영화의 핵심축은 동성애가 아니다. 영화를 두 번 보고 나서야, 다소 희미하게나마 큰 숲이 보이는 느낌이랄까. 주제찾기가 쉽지 않았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영화가 짜임새있고 치밀하단 뜻이 아닐까.                   

▽이곳저곳 깔려있는 복선에 주목해보자. 장생과 공길을 비롯한 광대들이 궁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처선 영감이 그들을 발견하고 벌하게 되면서였다. 물론 왕에게 자신들의 놀음을 보여달라고 청한 것은 장생이었으나, 이 역시도 처선 영감의 치밀한 계획의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을 뿐이다. 영화 후반부에 처선의 대사에서 우리는 영화의 맥을 절묘하게 읽을 수 있다. "제가 애초에 광대들를 궁으로 끌어들인 것은, 전하의 주위에 있는 간신들을 내치고 전하께서 보다 세상을 올바로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 중 한 잡놈에게 눈이 멀어..." 결국 광대들이 궁으로 입성하게 된 것은 처선 영감의 계략 때문이었다. 소위 '권력싸움'에 말려든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연산이 그들앞에서 호탕하게 웃어제끼던 그 날은, 장생과 공길에게 있어서 '행운'이 아니라 '불운'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모른다. 꼭 한번 처선 영감에게 놀이책을 건네받으면서 "이 책대로 놀면 누가 웃는겁니까"라며 장생이 뼈있는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연극 '이' 의 공길과는 달리 장생은 광대라는 자신의 지위를 역이용하여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야망을 갖고 있지 않다. "배부르게 먹고 놀 수만 있으면 됐지, 광대가 뭘 더 바래" 라던 자신의 말과 조금의 다름도 없다. 장생이나 공길이나 권력 앞에 무관심하고 그저 광대라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신명나게 줄을 타는 그 모습이, '패왕별희'의 데이와 닮았다. 제3자의 관점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는 불쌍한 희생양일 뿐이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줄을 탄다. 그 모습이 세속적인 일은 모두 초탈한 신선마냥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 신선한 충격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짜' 주제가 아닐런지. 천대받던 천한 광대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반란군 앞에서 부질없이 죽는 왕에 모자랄 것이 없었다.

 

▽되짚어보면 왕이나 광대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는 한낱 광대에 불과했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처럼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처럼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고, 바람이 있을뿐.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나 운명과 우연속에 자기네 삶을 던져놓고 방관하는 광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힘겹게 살고, 힘을 내며 웃는다. 운명에 순응하고 광대답게 그들의 삶을 살았던 장생과 공길이지만, 그들의 삶이 애처로워 보인다거나 서글퍼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속박당하고 언제나 굴레에 갇혀 살던 연산에게 애틋한 연민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가. 감독의 말마따나 '신명나게 한 판 놀아보세'라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때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를 배반하고 힘들게 하지만 마지막까지 웃으며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더 위대한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패왕별희'나 '왕의 남자'는 모두 비극으로 끝을 맺지만 그 슬픔에도 차이가 있다. 샬로에게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데이의 모습은 마음을 허전하게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함께하는 장생과 공길의 모습은 슬픈 비극이라 하기엔 흐르는 눈물이 너무도 뜨겁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그들에겐, 죽음마저도 인생의 마지막 행운이 아니었을런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삶에 충실한 그들의 마지막이, 다시 한번 나의 가슴을 울렸다.


(총 0명 참여)
ekduds92
잘 읽었어요~   
2009-07-27 10:46
dasdq
정말 대단해요^^   
2006-01-09 00:33
ririn78
멋진 리뷰에요 ~   
2006-01-07 11:13
elflady09
공감합니다ㅜㅜ   
2006-01-02 17:48
1


왕의 남자(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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