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했다, 그리고 울림있었다.
우선 밝혀두지만, 나는 여성관객이다.
멋진 전쟁신, 피튀기는 와중의 리얼하고 섬세한 묘사 따위가 멋졌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물론 이야기(story) 자체의 어떤 메리트는 없다.
거대한 역사적 소재를 차용한 것 치고, 꽤나 멋을 부린 탓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몰입할만하면 슬로우모션이 작동하는 CG기술의 남발도 내용이 없어지는 것에 한 몫 한다.
다만 영상미로만 국한되어져 이 영화가 폄하되는 것이 다소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울림은 어떤 울림이었는가?
그리스의 작은 국가 스파르타를
'스파르타식'이란 표현으로밖에 접근해보지 못한 나는
처음부터 이 영화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의심만 잔뜩 품고 지켜봤다.
역사에 대해 소상히 아는 바도 없을 뿐 더러
이런 근육질에 괴물, 혹은 남성성을 표방하는 영화는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하도 몇달전부터 기대를 하던 탓에
어쩔 수 없이 호응한 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다.
(영화는 예상보다 상당히 친절했다.
뭐야, 왜 저러는거야, 싶을때면 에코효과를 지나치게 삽입하긴 하지만
너그러운 목소리의 나래이션으로 주인공에게 빠져들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처음은 한 아이가 성년이 되던 날,
죽느냐, '최고의 전사'로 살아남느냐의 관문을 통과해 왕이 되었다, 는 것으로 시작한다.
얼핏 군밤이나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듣는 조곤조곤한 이야기의 전개가
이것이 신화와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출발하는구나 호기심을 갖게한다.
최고의 전사가 된 아이는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고,
그는 어떤 두려움이나 역경도 헤쳐나갈 듯한 주인공 다운 면모를 뽐내며
강한 포스를 내뿜는다. (영웅을 창조해내기 위한 설정치곤 너무 뻔하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300명의 전사들 역시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며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것을 기꺼이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사내들이다.
(여기서 잠깐, 영화 속에서 이러한 사내들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을 집고 넘어가보자.
1.
페르시아의 왕이 수백만군을 거느리며 천하의 울림을 안겨준 뒤,
스파르타의 복종을 요구하기 위한 사자를 보내자 왕은 그들 군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의 직업은 무엇이냐? (전쟁에 나오기 이전에 너희들은 무엇을 했냐, 는 의미)"
페르시아의 군사들은 그 말에 "화가요","조각가요" 따위의 대답을 했다.
그러자 스파르타의 왕은 자신들의 부하 300명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의 직업은 무엇이냐?"
300명의 군인들은 더이상 크게 낼 수 없을만큼의 한 목소리로 "전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2.
수백만의 군대와 싸우는 스파르타 300명의 군사들은 한 사람의 군인이 아쉬운 상황에서
그리스 전사들과의 의기투합이냐, 지원은 고맙지만 사양하느냐의 기로에 놓여있을때,
왕은 그리스 전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어차피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왜 하냐, 고 묻는다면
굳이 함께 싸울 필요 없으니 돌아가도 좋다.")
설령, 그것이 작은 스파르타를
엄청난 자국애와 의리로 똘똘 뭉친 결속력 강한 나라로 비추는 장치였을지언정
그들의 왕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내였다.
또한 300명의 전사들(그들은 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직 전사일뿐이었다) 역시,
스파르타를 위해서라면 더럽고 치사하게 굴복하느니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필살의 각오가 되어있는 진정한 전쟁영웅들이었다.
그러면 이런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고 재미났겠는가?
'그렇지, 저들은 저렇게 영웅적인 삶을 살다 갔구나' 하고
화면에 몰입하다,그저 일회성 짙은 관람에 그쳤다면 굳이 리뷰를 쓸 필요도 없다.
나와 같은 여성 관객들 역시 많은 리뷰를 작성한 것 같지만,
내가 여성임에도 사내들의 승부욕과 거친 숨소리에 정색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의 방대한 스케일이나 멋진 영상에 있지 않다.
나는 이 영화에서 주목한 드라마가 '왕비'에 촛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왕비는 진정한 사내중의 사내인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나라에 의한 삶을 철저히 지켜내는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오직 스파르타의 여인들만이
'스파르타의 강한 전사'를 생산해낼 수 있다, 는 자부심이 대단한 여인이다.
(뭐, 이런면에선 왕과 천생연분이지 않을 수가 없다.)
300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계란으로 바위를 쳐보겠다는 왕을
기꺼이 전쟁터로 내몰고 신전(신령은 그들에게 전쟁에 임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과
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을 꺾지 않았던 것은 그녀 역시
이 전쟁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영화에서 큰 비중(분량이나 역할 면에서)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왕비는 분명한 캐릭터를 가지고 영화 속에 위치한다.
왕과 300명의 전사들이 페르시아와의 혈전에 출전한 와중에
왕비는 스파르타군의 지원을 위해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
결코 애절하거나 치졸하기 않게.
의회를 설득해주겠다며 왕비에게 접근한 테론 의원은
그 댓가로 왕비의 몸을 요구하지만
그녀가 순순히 자신을 허락한다는 것은
그녀가 누누히 강조하던 "스파르타 여인의 방식"이 아니었다.
스파르타는 일정 나이가 지나면 어린 아들과 어미를 떼어놓는 것이
일종의 법으로 지켜지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항상 아이와의 작별을 준비하는 슬픔이 아려있다.
왕비 또한 한 아들의 어머니였다.
훌륭한 스파르타의 전사가 될 아들의 위대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스파르타의 여인들 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했다.
자식에겐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
그리하여 모든 스파르타의 군사들은
그런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떼어내질 때 강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믿는 충성심,
그것이 300명의 전사들이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게하는 근간이 된다는 것이
왕비를 포함한 스파르타의 여인들이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그런 왕비가 아들앞에서 부끄러운 어미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에게 다가온 테론의 유혹에 순순히 더럽혀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결국 왕비는 자신의 지아비와 나라를 위해
스파르타군의 파병을 요청하며 그에게 몸을 내주고,
"금방 끝나진 않아. 좀 아플거야. 난 너의 왕이 아니거든." 이란 말을 듣는다.
너의 왕이 아니다, 는 말속엔
왕만큼 그녀를 소중하고 다정하게 대할 순 없다는 치욕적인 비수가 들어있었다.
여자로서 그만큼 모욕을 당하고도 그녀는 스파르타를 위해 이 전쟁이 기적으로 끝날 수 있길 바랬다.
그러나 의회를 소집해 왕비에게 발언 기회를 안겨준 테론은 예상을 뒤엎고
그녀가 일개 창녀밖에 되지 않는다며,
저따위 더러운 왕비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 없으니 그녀를 죽여야한다고 의회에 선언한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위대한 어머니이며, 나라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왕의 숭고한 아내인 왕비는 칼을 뽑아 테론을 찌르며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한다.
"금방 끝나진 않아. 좀 아플거야. 난 너의 왕비가 아니거든."
테론의 말을 그대로 앙갚음 해준 것이었다. 일개 의원 주제에 왕이 없는 틈을 타,
왕비를 농락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를 위해 싸우는 그들을 얕잡아 이르는
테론같은 백성의 왕비는 아니란 뜻이다.
그때, 쓰러지는 테론에게서 쏟아지는 페르시아의 주화들.
그렇다, 테론은 이미 페르시아로 뜻을 옮긴 반역자였던 것이다.
놈을 찔러죽인 왕비는 스파르타의 의원들을 앞에 두고
더이상 설득력 있을 수 없는 전쟁의 명목을 심어준 연설을 한 셈이었다.
왕비의 지고지순한 나라, 왕, 그리고 300명의 용기있는 전사들에 대한 뜻은
이미 훌륭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비록 스파르타를 위해 희생한 전사들이
거칠게 싸우다 죽는 것을 하나같이 후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그들의 전쟁을 강한 자존심 하나로 영예롭게 받아들였을 스파르타의 국민들은
그들의 왕비였고, 아내였고, 사랑이었다.
(my queen, my wife, my love...왕의 마지막 대사였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나라를 지켜내는 전사들,
스파르타의 사내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이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를 저해하는 요소이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전쟁에 대한 이유였다.
왜 그토록 무모하고 처절한 전쟁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항했는가, 하는 이유를
영화 속에서 찾고자 한다면 분명 크게 실망할 것이다.
역사에 한 켠에 사라진 용감하고 무모했던 인물들을
모두 '위인'을 만들려고 했다면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내 보기엔 이 영화가 말하는 300명의 전사들은 위인이 아니다.
그저 우리들의 아버지였고, 남편이었으며, 아들일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300>이 단순히 영상미와 스케일로만 승부하려한다,
빈약한 공감대와 뼈대있는 이야기 전개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고
굳이 폄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무하게만 느껴졌던 왕의 마지막 대사가
돌아서 생각하니 가장 인간적이더라는 것이다.
그토록 처절한 지금까지의 전쟁이 모두 나의 가족을 위해서였다니.
수백만군을 상대하던 스파르타의 전쟁에
이보다 더 극명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여하간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왕비가 아니었다면 판타지 전쟁신만 가득한 유치한 볼거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남자관객들만 '오, 볼만한데.'하고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고르고 왕비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00명의 전사들 못지않은 그녀의 올곧은 강인함 덕분에
이 영화를 지켜보는 여성 관객으로서 볼만했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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