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나왔던 해적영화들이 워낙에 우렁차게 망해서인지 애초부터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올해 3편까지 나오면서 전세계적으로 천문학적 흥행을 기록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해적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만 해적이지 하는 행동은 여느 정의의 용사와 다를 바 없어서 인간적인 매력이 덜한 해적 캐릭터가 아니라, 한없이 자유를 꿈꾸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얼마나 콩고물이 떨어질지에만 신경쓰기에 "해적이라면 저래야지" 싶게 공감이 가는 캐릭터라 이전에 나왔던 해적영화들의 징크스를 보란듯이 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3편까지 걸음을 내디뎠다. 1편만 해도 블럭버스터긴 하지만 저주와 보물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모험극 정도로 보였던 시리즈는 2편을 거쳐 3편에 이르면서 어림잡아 상상하기도 힘들만큼의 스케일을 담보로 하는 거대한 여정으로 발전했다. 아마도 등장인물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가 그만큼 끝간 데 모르고 뻗어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망망대해를 무대로 갈 때까지 간 이들이 드디어 3편에 이르러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에서는 제목 그대로 그 절정 또는 한계에 이르렀고, 마침내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과 대결한다.
2편에서 거대 해저 괴물 크라켄의 뱃속으로 사라진 캡틴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윌 터너(올랜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여기에 이번엔 1편에선 적이었던 캡틴 바르보사(제프리 러쉬)까지 합류했다.(뭐, 이 바닥에선 아침의 적이 저녁엔 동지가 되기도 하니) 그런데 이런 해적들의 여정을 가로막는 강력한 장애물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동인도 회사의 압력. 커틀러 베켓 제독은 플라잉 더치맨과 선장 데비 존스(빌 나이)를 끌어들여 전세계 해적들의 활동에 완전히 요절을 낼 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장애물 앞에 우리의 주인공들은 싱가폴까지 건너가 그 지역의 해적 영주인 사오펭(주윤발)과 협상을 시도하는 등 세계 곳곳의 해적 영주들과 회합해 맞서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하나의 목표로만 달려간다면 싱겁기 이를 데 없을 것. 이 와중에도 각자 원하는 바는 다르다. 잠시 딴 세상에 갔다 온 잭 스패로우는 여전히 자기 배를 되찾는 것에 목을 매고, 윌 터너는 데비 존스에게 붙잡혀 있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또 나름의 계획을 짠다. 한 배를 탄 가운데에서도 서로 딴 생각들에 정신없는 가운데, 이들은 드디어 바다의 주인 자리를 둘러싸고 동인도 회사 및 플라잉 더치맨과 최후의 전투에 돌입한다.
3편까지 꾸준히 이어온 데다 불과 1년도 채 되기 전에도 만났던 캐릭터들인지라 새삼스럽게 이들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하지만 2편에 비해 3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은 또 조금씩 다르다. 물론, 여전히 조니 뎁이 보여주는 잭 스패로우의 매력은 눈부시다. 1편에서 빛을 발하며 2편에서 그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잭 스패로우는 3편에 들어서는 다른 캐릭터들에게 비중이 골고루 분배되는 탓에 상대적으로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그 자유로운 영혼의 매력은 여전히 빛난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통해 블럭버스터에서도 아카데미급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조니 뎁은 멋에 살고 멋에 죽는 동시에 철저히 자기 이익만 따지는, 어리버리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멋있어져 버리는 잭 스패로우의 매력을 3편에서도 변함없이 이어간다. 더불어 이번 3편에서는 한동안 오래 홀로 있었던 잭의 곁에 그의 환상 속에 복제된 여러 잭 스패로우들이 등장하면서 아주 단체로 그 몽롱한 매력을 발산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산만할 수도 있겠지만, 별난 성격을 지니고 있던 캐릭터가 보여주는 별난 정신세계인지라 독특한 매력이 배가되었다.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가 하도 인상적이다보니 어쩌다 하게 될 "저 사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실현된 듯한 모습이랄까.
3부작의 긴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인물들이 내적으로 성장해 가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졌다. 3편에 들어서 확실히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아버지를 구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윌 터너는 그 성격이 보다 남성적이고 과감해지는 만큼 올랜도 블룸의 연기도 더욱 선이 굵어진 듯하다. 후반부에 들어서 여느 선장의 모습처럼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맘껏 해적의 위용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확 다른 묵직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2편까지 늘 조니 뎁의 포스에 밀려 안습이었다는 평가를 떠올리면 진일보한 것임은 틀림없다) 이와 함께 엘리자베스 스완 또한 3편에 들어서 이전에 보여줬던 양가 규수의 모습은 완전히 버린 채 해적 모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여전사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이전 영화들에서 대부분 청순하고 차분한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 온 것을 생각하면(<도미노>에선 물론 그렇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색다른 변신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싱가포르의 해적 영주 사오펭 역의 주윤발 역시 이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날카롭고 굵직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오펭의 비중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작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긴 하지만. 아,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티그로 등장하는 롤링스톤즈의 키스 리처드의 모습도 놓치면 아쉽다. 정말 잭 스패로우가 어째서 키스 리처드를 모델로 삼았는지에 대해 절로 수긍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시간 반도 되지 않았던 전편들에 비해 2시간 50분에 가깝게 대폭 늘어난 러닝타임에 걸맞게, 영화는 대작으로서의 위용을 마음껏 과시한다.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전투신은 주로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세상의 끝에 다다르면서 만나는 마치 악마의 목구멍과도 같은 폭포, 세트인지 실제 지역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소금땅, 동인도 회사와의 최종 협상이 펼쳐지는 망망대해 위의 모래섬, 무풍지대를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배를 전복시키기 위한 거대한 움직임, 블랙펄과 플라잉 더치맨이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치는 그야말로 사정없이 무시무시한 "다이다이" 전투 장면 등 제작비를 마구 들인 흔적이 확실히 보이는 볼거리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 이러한 거대한 볼거리들이 주로 후반부에 왕창 몰려 있기 때문에 긴 러닝타임에 살짝 지루해진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바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드디어 3편에 이르면서, 한없는 자유를 꿈꾸는 해적들의 활동범위는 걷잡을 수 없이 넓어지고, 해결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하나씩 쌓여가며 더 복잡해진 이야기 구성을 보여준다. 잭을 구하고 동인도 회사 및 데비 존스와 맞서야 한다는 하나의 과제 아래에서도 각 등장인물들은 각자 제 갈 길을 찾고 있다.(나름 힘을 모은다는 하나의 여정도 마지못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살 길을 찾다 보니, 지금 동지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지속되리라는 걸 보장할 수가 없이 이쪽에서 새로 편을 만들고 저쪽에서 새롭게 적을 만든다. 잭 스패로우를 비롯한 해적 일당들이 이전부터 보여줬듯이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관계를 마음대로 조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인지라, 금방까지 적이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모종의 거래를 맺고, 금방까지 동료였던 사람들에게서 어느 순간 모진 소리를 듣는다. 여기다 플라잉 더치맨의 저주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윌 터너의 노력, 전투의 승산을 좌우할 여신 "칼립소"의 등장 등 곳곳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바꿀 만한 변수들이 등장하다보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영화는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매편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요, <스파이더맨> 시리즈처럼 오프닝마다 친절하게 전편을 요약해 주지도 않은 가운데 전편의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실 분들이라면 전편들을 먼저 숙지해 놓는 것을 강력히 권장해 드리는 바이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 속에서도 적절한 타이밍 속에 터뜨려 주는 나사 풀린 듯한 유머감각은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도 어느 정도 부담없이 지켜볼 수 있게 해 준다. 바라던 대로 여전히 긴장 풀린 채로 부산하게 설치는 선원들의 모습, 대규모의 전투 가운데에서 양념 격으로 첨가된 꽁트같은 에피소드들, 살벌한 전투 중에 이게 뭔일이여 싶은 청혼의 순간 등 위엄 있는 어드벤처의 분위기를 시시각각 깨뜨려주는 개그 신공들은 여전히 유쾌한 모험극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게 한다.
갈수록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여기저기로 얽혀가는 이야기처럼, 해적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구속이란 있을 수 없다. 좁다는 세상 속에서도 활동 범위는 무한히 넓혀나가고, 인간 관계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마음껏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데비 존스와 그의 선원들의 모습처럼 구속이란 해적에게 있어서 저주나 마찬가지다. 그 어떤 정의감도 도덕률도 없이 멋대로 마음대로 살아가기에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인 이들은 3편에 이르러서 자신들의 운명의 벽에 부딪힌다. 다른 선택은 불가피한 막다른 길에 서서, 또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할 갈림길에 서서. 잭 스패로우나 윌 터너, 엘리자베스 스완 모두 이러한 고민을 안고 있다.
잭 스패로우는 세상의 끝에까지 갔다 오게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어느 정도 느낀다. 예전에는 없었던 또 다른 자아들과 친구먹지를 않나, 헛것이 너무 자주 보이는 나머지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일행들을 보고서도 헛것이 아니냐며 헛소리를 한다. 이후 위기와 고민의 순간마다 다중이 친구들이 나타나서 수시로 말을 걸며 잭의 머리 속을 때론 더욱 헷갈리게, 때론 명쾌하게 만든다. 더욱 안그래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에게 실은 심리적으로 꽤 복잡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을 맺는 순간까지도 허허실실거리며 특유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만냅두질 않는 그의 성격상, 이런 나름의 고민은 생각해 보면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정작 꽤 생각해 볼 만한 것은 급격히 늘어난 비중과 존재감에 따라 급격한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이다. 해적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잭을 구하고 해적의 활동무대를 되찾는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사랑도 얻어야 되고 동시에 아버지도 구해야 하는 그지만, 사람 가지고 놀기를 곧잘 하는 운명은 막무가내로 달려가던 윌 터너 앞에 예상치 못한 선택의 기로를 갖다놓는다. 결말부에서 보이즌 기약없는 미래를 담보로 한 윌의 선택은 그동안 가뿐한 활극처럼만 느껴졌던 영화의 분위기에 생각지 못했던 무게감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엘리자베스 또한 윌을 따라 해적들의 여정에 합류했지만, 그래도 드레스는 어느 정도 챙겨 입었던 2편까지와는 달리 3편에 들어서는 적극적으로 선원들을 이끌며 나서야 할 상황에 놓인다. 해적들과의 삶 속에서 하나 둘 씩 포기해야 할 것도 생기면서, 그녀는 이전의 그저 당돌한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과 나아가 선원들 전체의 앞길을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이끄는 리더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자로서 견디기 쉽지 않았을 시련을 거치면서, 결국은 남자들과 함께 해도 전혀 뒤처질 것이 없는 강인한 면모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3편에 이르러 한없이 자유로운 듯 했던 이들의 여정에 제동을 거는 운명에 맞서게 되면서, 이들의 마음은 이 항해를 그저 망망대해를 향한 설익은 치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맞서기 위한 성숙한 여정으로 발전하게 했다. 한없는 자유를 꿈꾸게 하는 바다에서의 여정 속에서 급기야 자신들의 운명과도 만나 대결을 벌인 이들과 함께, 아기자기한 재미가 살아 있던 어드벤처는 어느덧 특유의 유머는 유지한 채 웅장한 스케일과 꽤 듬직한 여운을 이끌어내는 대작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스파이더맨>처럼 만화 원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지의 제왕>처럼 완벽한 소설 원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영화치고 이만큼 완결성이 어느 정도 안정된 3부작이 탄생했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임이 분명하다.(물론 4편 제작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지만, 결말을 봤을 때 4편이 만약 나온다면 꽤나 억지스러울 것 같다) 생각없이 막 노는 듯하면서도 어느덧 꽤 멋있는 모습으로 대미를 장식한 잭 스패로우와 그 일행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한 마디 더 : 전편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엔딩 크레딧 뒤에 특별영상을 숨겨놓는 장난기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상까지 본 사람으로서, 이번 특별영상은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부가영상 정도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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