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주제의 뉴스를 몇 차례 접하면서 나를 포함한 한국 관객들에게는 이런 소식에 대해 일종의 불신이 쌓였을 법도 하다. 막상 나온 결과물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말이다. 매체가 얘기하는 이들 영화들은 사실 알고보면 할리우드 자본이 일부 투입된 '반쪽짜리 할리우드 영화'거나, 아니면 대사만 영어일 뿐인 다른 나라 영화거나, 아시아권에서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서 일부러 영미권 취향에 맞춘 '할리우드용 아시아 영화'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국 자본이 투입되긴 하되 독립영화에 가까운 규모라 주목받기 사실상 힘든 경우였다. 이렇게 기대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이 나오면서, 이제는 또 이런 소식이 들리면 '이번에도 보나마나 뻔하겠지' 하는 보기도 전해 실망하는 안타까운 시선이 적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지훈의 할리우드 진출은 그 와중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왔다. 그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미국 자본으로 미국의 거대 제작사가 미국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출연하며 할리우드 진출 기회를 잡았다. 이 영화의 감독은 어중간한 인지도를 가진 이도 아닌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라는 점에서 더욱 신빙성을 얻었다. 비록 <스피드 레이서>는 후루룩 말아먹었지만 워쇼스키의 신임을 얻은 정지훈은 그들이 제작할 차기작의 주연으로 점지되었고, 언제 나오려나 싶었던 그 차기작은 아니나다를까 불과 1년만에 <닌자 어쌔신>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비중 있는 조연도 아니고, 주조연급도 아니고, 크레딧의 가장 처음에 이름이 오르는 주연으로 말이다. 이 역시 워너 브라더스라는 할리우드 톱 영화사와 조엘 실버라는 톱 제작자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번에는 시원찮은 결과물은 나오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중 앞에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영화는, 정말 기대 이상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야쿠자 집단이 정체 모를 암살자들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조사하던 유로폴의 증거 분석관 미카(나오미 해리스)는 이것이 천년의 전통을 지닌 일본 닌자 조직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한다. 오랜 세월동안 개인 또는 정부의 사주를 받아 전세계적인 암살 활동을 벌여 온 닌자 조직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미카는 그 과정에서 라이조(정지훈)라는 의문의 사내를 알게 된다. 라이조는 과거 악명 높은 닌자 조직 '오즈누'에 있었던 이.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결과 출중한 실력으로 인정받던 그는 어떤 일을 계기로 조직을 뛰쳐나와 조직에 맞서게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의 목숨을 마구 짓밟는 오즈누의 잔혹한 생리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오즈누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라이조는 곧 미카와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귀신 같은 오즈누는 섣불리 닌자 조직의 비밀을 캐려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고, 결국 피할 수 없는 결전이 다가온다.
미국 입장에서는 또 한편의 동양적 분위기의 액션 영화일 뿐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국 관객 입장에선 도무지 그럴 수 없는 것이 바로 한국 배우인 정지훈이 정말 '주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과묵한 성격, 놀라운 실력으로 무장한 그의 캐릭터는 사실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여느 할리우드 액션영화 속 동양인 캐릭터와 다른 부분이 그다지 많지 않다. 있다면 기럭지 등 외모가 좀 우월하다는 정도(이마저도 영화 내내 대부분 부상을 입은 상태로 있는지라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정지훈이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준다고 하기는 힘들다. 영어 발음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긴 하나 목소리를 너무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 성우마냥 깔고 가려는 경향이 좀 보이는 듯 해서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펼치는 액션을 보고 있자면 그의 노력과 그 결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긴 팔과 다리가 때로는 절도 있게 때로는 무용처럼 펼치는 액션을 보고 있자면,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화면도 볼거리지만, 정지훈의 몸이 움직이는 모습 또한 중요한 볼거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가 여주인공인 나오미 해리스와 펼치는 앙상블도 꽤 볼만하다. 옷 사이즈 개그, 표창에 맞아 그로테스크한 꼴이 된 자동차의 모습 등 중간 중간 예상치 못했던 유머를 던지기도 한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라이조의 청소년 시절로 등장하는, 정지훈이 키웠다는 요즘 한창 활동중인 남성그룹 '엠블랙'의 멤버 이준의 모습도 흥미롭다.
이 영화의 액션은 매우 극적이다. 피로 샤워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고 넘치는 피의 향연을 전시한다. 제목도 등장하기 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겁을 한 움큼 집어먹게 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고어 호러물 뺨치는 영상을 선사하는 이 영화는 수시로 펼쳐지는 닌자 액션을 매우 스타일리쉬하면서도 매우 잔혹하게 묘사한다. 무기에 맞을 때마다 피가 마치 케첩처럼 약간은 응고된 듯한 느낌으로 터지는데, 한 차례 액션 신이 지날 때마다 사방이 피범벅이 될 만큼 피의 양이 많다. 홍콩 무협영화와 같이 깔끔하고 담백한 액션보다 이렇게 피바다급 액션을 보여주는 이유는 아마도 닌자라는 소재도 그렇거니와 영화가 일본 사무라이나 닌자 액션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일본 사무라이 혹은 닌자 액션물은 현란한 칼부림 속에서 마구 솟구치는 피를 묘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데 이는 영화는 물론이요 <천주>, <닌자 가이덴> 등 게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 빌> 1편을 통해 이런 스타일을 전세계 대중에게 널리 알린 바 있다. 칼이나 표창이 스치고 박힐 때마다 화면 곳곳을 수놓는 피의 이미지는 섬뜩하다가도 한편으론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데, 이는 할리우드 주류 블록버스터 또는 액션 영화에서 쉽게 느끼기 힘든 마이너풍의 감정이다.
R등급을 피해가면서 쉽게 쉽게 보다 많은 관객층을 흡수할 수 있는 액션영화를 꾀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이런 길을 택했다는 것은 아마도 닌자 액션에 대해 감독이나 제작자가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뜻일 거다. 워쇼스키 형제는 잘 알려졌다시피 실제로 <매트릭스>를 통해 동양사상이나 무술 등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었고, <스피드 레이서>에서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함은 물론이요 표현방식까지 일반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흐름에서 살짝 비껴간, 원작 애니메이션의 색감을 그대로 빌려온 듯한 영상을 펼쳐놓음으로써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긴 했지만 원작만화에 대한 뚜렷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한 동양문화에 대한 애정이 <닌자 어쌔신>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만 맡기는 했지만 감독을 맡은 제임스 맥티그도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호흡을 맞춘 적 있는 '워쇼스키 사단'이라 할 만한 감독인지라 그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영화 속에서 닌자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만든 이들은 일본의 닌자 또는 사무라이 문화에 애정을 갖고 있다기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액션에 애정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액션 장면들 중 대다수가 밤에 펼쳐진다는 것도 주류에 편승하기보다 취향을 따르기로 한 것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눈으로 직접 봐야 제맛인 액션 장면이 어두운 밤에 펼쳐진다는 것은 자칫하면 시각적으로 많은 부분을 잃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도 오프닝이 아무래도 밝은 실내라 이미지가 가장 충격적이고 확실하게 다가오고 그 이후 펼쳐지는 액션 장면은 주로 밤이라 상대적으로 충격 효과가 덜하다. 하지만 닌자라는 집단이 백주대낮에 공개적인 액션을 펼치는 것보다는 야밤 중에 잠입 액션을 펼치는 것이 특기이고, 제작진은 이 중요한 특징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대담하게도 밤 액션 장면을 많이 삽입한 것 같다. 물론 어두운 와중에도 잔혹함은 충분히 느껴지고, 인물들의 민첩한 몸놀림을 비추는 실루엣이나 타격감을 배가시키는 소리 등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불리한 부분을 어느 정도 상쇄시킨다. 심지어 결말 부분에서는 어둠과 그림자를 절묘하게 활용한 꽤 매력적인 결투 장면이 클라이맥스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동양 액션에 대한 만든 이의 취향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가 한국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미국 전 지역 30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대규모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개봉한다는 사실은 꽤 주목할 만하다. 물론 닌자라는 존재와 그들의 아지트가 신비롭게 묘사되고, 캐릭터가 전형적이라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지만(동양 배우들의 대사 대부분이 영어이기는 하나 이는 미국 관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게이샤의 추억>에서 보여준 '오네상 쌩유' 수준은 아니다.), 극도로 과장된 잔혹함이 강조된 사무라이 닌자 액션의 전형적 특징이 충실하게 반영됐다는 점에서 그 정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감독과 제작자가 이 동양적 캐릭터를 적절히 활용해 <매트릭스>나 <브이 포 벤데타>의 뒤를 이어 기존 체제 속에서 반역을 꾀하는 영웅의 캐릭터를 선보였다는 점도 이 영화가 마냥 동양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영화의 개성은 뚜렷하게 해주는 부분이 될 수 있으나 정지훈이 할리우드 배우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 있어서는 보다 노력을 요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분명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이 영화가 단지 동양이 배경이고 동양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캐스팅된 경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합작도 아니고 순전히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닌자 어쌔신>은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B급으로 취급될 수도 있는 동양적 비주얼을 생각보다 눈치 보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 영화는 왜 이렇게 불필요하게 잔혹하고 피가 많이 등장하지 하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대중적 인기를 더욱 더 의도하며 밍숭맹숭한 수위에서 놀기보다 만든 이의 취향을 더 선호하며 아찔하지만 확실한 파괴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장점으로 인정하고 싶다. 이처럼 <닌자 어쌔신>은 영화 자체로만 봐도 꽤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데, 여기에 정지훈이라는 한국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했으니, 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 재미와 충격 효과 면에서는 기대치를 웃돌기에 충분하다. 굳이 정지훈이 출연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한동안 기억될 파괴력을 가진 액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