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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사랑을 정의하거나 일반화 하는 일은 일견 우매하게 느껴진다. 주관적인 상상의 세상을 객관화 하고 싶지 않다.
알마도바의 영화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사랑들을 한다. 너무 나름대로라 사랑을 나누는 상대와도 결코 같은 것을 바라지 않는 저들 나름대로의 편집적 행동들이다. 이 전 영화들에서도 알마도바의 인물들은 자신의 사랑 방식만을 고집하는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아예 의식이 없는 상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복수를 위한 사랑이거나 성욕의 만족이거나 단순한 호감까지도, 그들의 사랑의 행위에는 공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의 감정이 존재할뿐이다. 만약 상대가 호의적으로 반응한다면 아니 거절을 하지 않으면, 그예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고 그속에서 우리는 자위적 정열을 목격한다.
이러한 일방적인 감정은 감독의 여자의 몸에대한 향수에서도 느껴진다. "Tie me up, tie me down" 에서 욕탕에 누워있는 여자의 음부를 향해 잠수부 인형이 헤엄쳐 가는 장면은 음탕하게 자극스럽다. 누워있는 여자는 느끼지 못하는 음탕함이 감독과 함께 숨어보는 관객들을 자극한다. 이러한 여자의 육체에대한 관음적 관심은 뭔가 부족한 과거를 지닌 남자들의 역에서 더더욱 두드러진다. 정신병원을 막 나온 안토니오 반데라스(Tie me up, tie me down)나 교도소를 출감한 리베르토 라발의 빅토르(Live Flesh), 그리고 어머니와 오랜세월 외롭게 살아온 베니노(Talk to her) 모두에게 애정의 대상은 사랑하는 여자들의 몸이다. 모두가 상대를 실재하는 인물이 아닌 자신들의 상상에서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온 이미지의 여자들로 대체하여 버린다. 때론 이런한 집요한 강요가 상대를 설득하기도 한다.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취하기 위해 이들이 바칠 수 있는 것들에는 한이 없다. 이미 결과를 따지기에는 너무 눈이 멀어있다.
난 과연 이러한 알마도바의 집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궁금하였다. 이제 그 대답이 부분적으로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듯하다. 영화 중에 삽입된 흑백 영화에서 줄어든 남자가 자신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여자의 음부 속으로 파고드는 장면은 욕탕에서 여인의 음부를 향해 헤엄치던 잠수부 인형을 떠올려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 이전의 음탕함은 사라져 버리고 이제 마치 여자의 자궁 속을 놀이터처럼 드나드는 아이의 천진함과 의존된 평안감이 코믹하게 이미지를 지배하게된다. 성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여체의 따뜻함과 아늑함이다. 여성의 자궁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정감을 준다. 어머니에대한 그리움이, 여자에대한 알마도바의 성적 집착 속에서 불거져 나온다. 그러한 감독의 자기 발견 과정이 등장 인물의 미친 행동을 보는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지도 모른다. 모두 지고한 정성을 가지고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간한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행동들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결국 알마도바에겐 이들 모두가 어머니에대한 염원이다(All about my mother).
알마도바는 그렇게 다시 그녀 속으로 들어가 본다. 어머니 속으로 다른 여자들을 통해.
나만일까, 베니노가 알마도바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껴지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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