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 이야기>, <인생>, 그리고 최근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와 <집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중세와 현대를 아우르는 격동의 중국 역사와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급작스런 변화에 따른 문화적, 사회적 폐단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사회성이 가득한 작품과 그 격동의 거친 역사를 관통한 중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강인한 그들의 생명력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역사성 가득한 작품 그리고 최근에는 이전의 그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너무도 소박한 느낌의 작고 귀여운 시골소녀들의 심리를 다룬 작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양한 작품에서도 다분히 중국적이면서도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하는) 섬세한 그 본연의 색깔로 중국 제 5 세대 감독의 대표주자로 추앙받는 감독 장이모우. 그런 그가 다루었던 이전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무협영화 <영웅>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왔다.
내 개인적 느낌일 지 모르지만 장이모우가 무협영화를 연출한다는 소식은 조금은 의외였다. 물론 다분히 중국다운 느낌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장기인 그이고, 전형적인 중국느낌을 그릴 수 있는 장르 또한 무협영화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여지껏 그가 관심을 가져왔던 변화무쌍했던 중국 역사 속에 드러난 부조리나 비판의식을 표현하기엔 무협은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로 선이 굵은 작품 속의 꿋꿋한 여성들의 모습을 주로 그려왔던 그였기에 그가 어떻게 무협 영화를 완성하였을 지 궁금했다.
<영웅>이라는 영화가 주는 무게는 비단 감독이 주는 기대뿐이 아니다.
이 영화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스타 양조위(파검), 장만옥(비설), 이연걸(무명) 등의 걸출한 스타들(스타는 아닐지 모르지만 은모장천역의 견지단도 이 영화를 빛내는 인물이다.)과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스탭 즉, 깐느에서 <화양연화>로 촬영상을 수상한 촬영기사 크리스토퍼 도일, <와호장룡>의 음악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음악감독 탄 둔, <동방불패>, <천녀유혼>의 무술감독 정소동이라는 낯익은 이름 외에 의상, 미술, 제작을 맡은 스탭들의 면면이 그야말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인물들이고 보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는 영화의 스케일만큼이나 컸고 영화에 대한 기다림은 일종의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영화 <영웅>은 장이모우에게 있어 일종의 도전으로 보여진다.
헐리웃 블록버스터와는 차별되는 중국영화만 가질 수 있는 거대한 스케일의 (중국의 자존심이 담긴) 중국식 블록버스터에 대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조가 가미된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무협예술에 대한(중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상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간 내면의 감성과 명분 사랑에 대한 도전처럼 그가 여지껏 도전해 보지 않았던 장르, 내용, 영상 등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한 도전을 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영화는 처음부터 장이모우식 임을 거부한 듯 <마지막 황제>에서 보았던 거대한 규모의 군대와 궁궐의 모습, <동사서독>의 주인공들이 황량한 사막에게서 느꼈었을 비장함과 슬픈 사랑, 거기에 <와호장룡>에서 보았던 철학이 가미된듯한 예술적 무술에서 진 일보 된 듯한 특수효과와 와이어가 적절히 가미된 동적인 인상적인 무협장면으로 포장되어 장이모우의 작품이라기보단 새로운 중국형 무협 블록버스터를 개척하는 일종의 영화교본으로 영화 <영웅>은 완성된 듯 싶어 보인다.
영화 <영웅>이 주는 가장 강렬한 인상 : 색채와 무협에 관한 아름다운 영상
지금까지 강렬한 붉은색의 이미지를 영상에 많이 담아온 장이모우이기에 <영웅>에서 색채는 기존의 작품과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화 <영웅>에서 보여주는 색채는 기존의 영화가 주는 느낌과는 좀 다르다. 그가 사용한 붉은 색의 인상이 그 시대 중국인들이 가지는 비극적 심상이나 중국인이 느껴오던 사회적 문화적 폐단이나 국가적 색채를 느끼게 하는 표현이었다면 이 영화가 주는 색채에 대한 감각은 여러가지 색깔로 다분화되어 극의 특징을 지워지는 데 큰 구실을 하고 분리된 색깔과 함께 보여지는 각각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이해를 쉽게하며 극중에 드러나는 인물들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분히 중국적 색채를 나타내는 무채색의 검정색. (기존 황금색이나 붉은 색으로 나타내던 중국의 느낌과는 다분히 다른 모든 색을 다 포괄하는 듯한 검정색.)
진시황과 무명의 의상, 진시황의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 거기에 진시황을 알현하는 궁궐에 이르기까지 온통 검정이다. 진나라를 상징하는 검정은 춘추전국시대를 흡수하는 통일의 색깔로 무명이 입은 검정은 은모장천, 파검과 비설 등의 극중의 무인을 대표하는 격의 색으로 한편으론 그의 이름처럼 진나라에 대항했었던 이름없는 무인들을 대표하는 색으로 상징된다.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은 각각의 분리된 이야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각 인물의 특징을 규정짖는 색으로 대표된다.
처음에 등장하는 붉은 색은 무명이 이야기하는 거짓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의미하기도 하고 극중에 등장하는 여월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여월은 파검을 사모하고 은혜하지만 비설의 존재로 그 사랑을 속으로 삭이며 드러내진 않았어도 은근히 비설을 질투해 왔으리라…
푸른색은 사실에 근접한 짐작뿐인 그래서 완벽하게 하얀색으로 표현되지 못한 진실을 의미한다.(따라서 이 색깔만은 의미하는 인물이 없다.)
무명의 이야기를 듣고 진시황이 유추해낸 사실에 대한 내용이며 이것은 진실과는 좀 거리가 있음을 이후 하얀색으로 표현된 무명의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흰색은 무명, 파검, 비설 그리고 은모장천에 관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흰색은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변함없이 간직하는 하얀 눈을 의미하는 비설에 대한 상징이며 초록색으로 표현된 파검이 이야기하는 무명이 모르는 파검과 비설의 이야기이며 무명도 알 지 못했던 파검의 진심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포스터에서 여월이 붉은 색의 비설이 흰색의 파검이 초록색의 그리고 무명이 검정색의 대표의상을 입고 있는 것도 각각의 인물에 대한 상징 때문이다.
또한 화려한 색채위로 유려하게 발레를 하듯 흐르는 인상적인 무술씬은 이 영화의 백미이며 가장 인상을 각인 시키는 명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 사용된 다분히 과장된 듯한 무술장면과 와이어 액션, 빗발치는 활들을 옷자락으로 물리치는 장면, 떨어지는 비를 피해 움직이는 무술인을 표현한 듯한 초반의 무명과 장천의 대결씬, 마치 날으는 새가 된 듯 물위로 춤을 추듯 대결하는 파검과 무명의 대결씬 등,은 어쩌면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중국영화 <와호장룡>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중국의 무협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최근 헐리웃에 종종 사용되기까지 하는) 중국식 과장이다.
<영웅>이 <와호장룡>과 비슷한 느낌을 가지는 것은 파검과 무명의 물위에서의 대결씬 정도이며 <영웅>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내용이나 색깔 그리고 무협 장면 등은 오히려 이전의 다른 중국 무협영화의 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더 아름답고 더 공들여 찍은 흔적이 역력하다.
장이모우가 비장한(?) 결심을 하고 완성한 듯한 영화 <영웅>은 이전의 어떤 무협영화보다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며 작은 흥분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그것은 물론 이 영화가 가지는 화려한 색감과 그 위에 펼쳐지는 멋진 무협장면에 대한 인상이다.
물론 난 이 영화의 내용이 깊이가 있지 않음을, 그리 철학적인 내용이 아님을, 앞뒤의 내용이 조금은 납득이 가지 않음을 인정한다. 영화는 어떤 사람들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들간의 마음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영웅>은 <와호장룡>이 가지는 철학적(?) 내용보다는 무협이라는 형식이 조금 비교될 뿐이며 오히려 <와호장룡>이 가지는 본래의 뜻인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라는 고대 중국인들의 속담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내용적인 측면만 비교한다면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서 느껴지는 슬픈 또는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감성과 전통의 중국 무협영화에서 중시하곤 하였던 대의를 위하는 무술인들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 부분에서 앞뒤 전개상 가장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비장미만큼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색채와 예술적이라는 찬사도 아깝지 않은 화려한 와이어 액션은 내용의 설득력을 넘어서 영화에 집중하게 한다.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영웅>이 아름다워서 좋고 장이모우 답지 않게 서정적이어서 좋다.
철학적이지도 않고 심각한 내용인 듯 보이나 단순한 내용의 반복으로 이해하기 쉬워 좋았다. 더구나 각 내용에 친절하게 색깔까지 부여해서 구분을 주었기에 보는 맛과 이해하는 맛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재미있었으며 영웅이라 불리지 못했던 이들의 신념이나 아름다운 연인들의 속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멋진 무술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의 단점이 느껴지지만 그 영화가 좋은 영화로 기억될 수 있는 건 그 영화가 가지는 힘일 것이다. 매력일 것이다.
난 <영웅>을 보면서 그런 힘을 느꼈고 이 영화만이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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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01 오전 1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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