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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꽃다발을 든 염세적 구도자의 시간여행 브로큰 플라워
geoidia 2006-01-22 오후 11:45:17 1379   [5]

 
 
0.

 

자.. 이제 돈(빌 머레이)은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내가 떠나 빈집에는 음울함만이 가득한데다

이상한 편지는 오고,

옆에 친구라고 하나 있는 놈은 어서 떠나라고 부추기고

해서 떠나긴 떠나는데 과연 어디로..?

 

바로 20년전 자기가 잘나가던 시절이다.

그때 만났던 여인들에게로의 시간여행 하기.

 - 이것이 브로큰 플라워의 이야기줄기이다.

 

 

 

1.

 

2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니만큼 돈의 여정 또한 순탄치 않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이디오피아 뽕짝(과거로 가는 길의 음악적 변주)과 항상 함께 하며

분홍 꽃다발(이것은 과거를 재현시키는 마법의 물약이다)을 그녀들에게 들이밀어야 하는게

표면상 그에게 주어진 임무.

 

나쁜기억이든 좋은기억이든 20년쯤 지나면 잊을만큼 잊고 나머지는 미화되기 마련인데,

그 미화된 기억이 과연 실제와 아귀가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돈에게 너무나도 고역이다.

(이것을 주인공에게 굳이 시키는 영화 자체가 이미 고약하다.)

 

하지만 실제로 길을 떠나는 돈은 무표정속에서 분명 설레이고 있으며

자신과 그녀들이 과거속에 그대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한 가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노회한 바람둥이를 가장한 염세적 구도자의 로드무비이다.)

 

 

 

2.

 

그래서 만난 첫번째 그녀.

 

과연 분홍 꽃다발은 효험이 있어 20년전의 여인이 그의 앞에(그것도 전라의 몸으로!) 현신한다.

바로 그녀의 딸 - 20년전 그녀의 모습이다.

 

그녀 또한 거의 변한게 없이 과거 속에 그대로 있다.

결정적으로 남편이 없으며

여전히 돈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대해주고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래서 돈이 만족했을까?

글쎄..

다시 오겠다고 말하는 돈의 마지막 인삿말에는 전혀 진심이 들어있지 않다.

아마도 돈이 찾고 싶었던 건 단순한 '과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돈을 맞은 그녀의 딸은, 돈을 마지막으로 보낼 때의 그녀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3.

 

그리하여 만난 두번째 그녀.

 

이번에도 돈은 분홍 꽃다발의 효험에 의지하여 그녀의 과거를 찾는다.

 

하지만 왠걸.

약발이 떨어졌는지, 목걸이 멘트로 유혹을 해봐도 그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딱 봐도 과부 혼자 살듯한 집(미장센에 완전히 속았다)에

남편이 떡하니 들어온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의 과거를 증거하는 건 그녀와 판박이인 딸이 아니라

예전에 돈이 찍어준 흑백사진 달랑 한장.

그 빈약한 과거의 끈을 잡고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는 사진속의 그녀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의 현재의 그녀를 두고 돈은 돌아선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그냥 집에 가겠다고 친구에게 전화로 떼를 써보지만

어디 그게 될 일인가.

시간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4.

 

자 이번엔 세번째 그녀.

 

여기서 그녀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은 그녀의 비서이다.

잘나가던 변호사로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사무적이며 지적인 섹시함을 갖추었을

과거의 그녀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어이없게도 '동물통역사(?)'를 하고 있단다.

합리적이었던 그녀가 거의 마법사 수준의 일을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리고 예전의 애정은 어디 가고 돈이랑 술먹기도 싫고, 밥도 먹기 싫고, 산책도 싫단다.

 

몇분만에 내쫓기듯 나오게 된 돈에게 비서-예전의 그녀-는 분홍꽃다발을 안긴다.

"이런거 갖고 온다고 과거로 갈수도 없고 당신이 원하는걸 찾을 수도 없으니 

그냥 집에 가서 발닦고 잠이나 자세용~"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 비서, 정말 최고다.-_-)

 

 

 

5.

 

하지만 사람맘이란게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을 보고 싶어하는게 있어서,

결국 네번째 그녀.

 

돈이 그녀들을 만날수록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하룻밤->저녁식사->5분->?)

불안하긴 했었는데 역시나,

가서 말 한마디(!) 붙였다가 문전박대, 얼굴에 주먹세례까지 제대로 받는다.

 

물론 여기서 돈은 분홍 꽃다발의 효험이 끝난 걸 알고 야생의 생화를 꺾어가는 꼼수를 부리지만

과거와 현재, 혹은 깨달음이 어디 꽃으로 구해질 문제인가.

 

 

 

6.

 

그리고 돈은 마지막으로,

완전히 세상을 등진 다섯번째 그녀에게 찾아간다.

물론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zero이다.

 

하지만 감독의 배려일까.

여기서도 돈은 그녀의 과거와 잠깐 조우하게 된다.(역시 꽃의 힘으로!)

아마도 그녀는 과거에, 처음보는 상처입은 손님에게 반창고를 붙여줄 정도로

착한 소녀였을 것이다.

 

 

 

 

7.

 

자 그럼,

이 긴 여정의 끝에서 돈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과거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돈이 broken pinky flowers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 그것을 집약적으로 상징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 어쨌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서사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늙은 바람둥이의 평범한 회고록 혹은 지루한 반성문 정도에 그칠 것이다.

브로큰 플라워가 빛나는 것은 힘들었던 여행이 모두 끝났고

그가 나름의 구도를 했다고 생각되는 바로 이 지점부터이다.

 

 

 

8.

 

"말해줄 철학이 있나요?"

영화는 고약하게도 돈이 '깨달은' 것을 모두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한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닌 생판 남에게 말이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돈이 자신의 깨달음을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뭐야, 이거 미친놈 아냐?"

 

 

다시 과거로 가는 길인 이디오피아 뽕짝이 깔리고

자동차에서 20년전 자신의 현신이 돈을 조롱하듯 고개를 내민다.

 

 

 

 

9.

 

도대체 돈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까지 바보로 만들면서까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1) 과거는 여전히,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2) 그냥 깨달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

 

아마도 후자가 아닌가 싶다.

과거에 지은 죄값을 받는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인과론을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일 뿐더러, 1)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렇게 주인공을 조롱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깨달음은 진공을 동경한다'는 이동진의 평은 경청할만 한 것이다.

 

 

 


(총 0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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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플라워(2005, Broken Flowers)
제작사 : Bac Films, Focus Features / 배급사 : 스폰지
수입사 : 스폰지 / 공식홈페이지 : http://www.brokenflow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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