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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 포도나무를 베어라
kharismania 2007-02-07 오전 4:58:20 1269   [9]

믿음은 심리적인 구원의 징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맹목적인 목적의 대상이 되어 사고를 짓누르기도 한다. 신앙은 그 믿음이라는 단어의 속성에서 가장 극단적인 지점의 단계일 것이다. 신부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신앙의 범주안에서 사고하며 자신을 그 세계안에 가둔다. 하느님을 모시는 것은 신성한 사업이므로 속세의 범인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 차이는 바로 욕망에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부터 수많은 부가적 욕망을 다스리고 제어하는 일은 모름지기 신앙을 지닌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 5-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포도나무에 비유된다. 포도는 알맹이가 모여 하나의 과실을 이룬다. 그 탐스러운 알맹이가 온전할 때 포도는 탐욕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포도는 위태로운 과실이다. 알알이 박힌 그 알맹이들이 제자리를 지켜야만 한송이의 포도는 완성된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불완전한 본성과도 같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고뇌한다. 그것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고 문명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종(種)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역시 어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욕망이라는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위치에서는 이유는 그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 바로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내하고 억제할 수 있는 의지가 가능한 것은 분명 동물과 인간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대한 종속적 믿음 결국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고뇌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하는 방편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신부는 하느님을 모시는 자이며 동시에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는 이들이다. 마치 무당의 속성처럼. 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존재가 그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가 만무하다. 그 존재를 감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발언은 신성모독의 견해로 들릴지 모르지만 현상을 보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에 대한 주장은 사실 의미가 없는 일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는 결국 믿음이 동반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결국 신부가 인간과 신의 중간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신앙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자리이며 하나의 심리적 권좌인셈이다.

 

 시작부터 영화는 인간의 고뇌를 들춘다.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 수아(이민정 역). 그리고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남자, 수현(서장원 역). 하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뿐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망설인다. 그 사이 기차는 떠나고 수아는 홀로 기차를 탄다. 수현은 그 망설임 끝에 다시 돌아간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 찰나의 번뇌는 확실히 각인된다.

 

 수현은 신학과의 학생이다. -아마도 그는 그래서 수아에게 갈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강우(이호영 역)가 학교를 그만 둘 것임을 듣게 된 수현은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나 번번히 엇갈린다. 수현은 그에게 무언가를 듣고 싶은 척하지만 실상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다. 고요하던 수면에 파문이 일어 조용히 수면이 떨려나가듯 작은 계기는 위태롭게 잔잔하던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 사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린다. 그 수평선 위에 서있다고 스스로 안도하고 믿으려 하지만 실상 누구보다도 출렁이는 마음을 감추고 있다. 신앙의 궤도안에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은 꽤나 버거운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탈을 결심하고 누군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그러나 수현은 고민한다. 그는 타인을 보며 자신의 고민을 가늠한다.

 

 영화는 수현을 통해 인간의 나약한 심성이 지닌 고뇌의 무게감을 관찰한다. 그것은 애초에 그 세계에 발을 들인 수현이 짊어져야 할 그 세계의 무게감, 즉 두려움 그 자체다. 한번쯤 찾아오는 흔들림. 분명 그 과도기는 어딘가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자들에게 한번쯤 찾아오는 약속된 시련이다. 특히나 일생을 종교에 귀의해야 하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다만 그 길에 정진하는가 이탈하는가의 결과는 본인이 그 과도기를 어떻게 결론짓느냐에 달렸다. 수현은 나약한 감성을 자신의 강박같은 의지로 바로잡는 인물이다. 그에 반해 강우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아마도 수현은 그래서 그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에게 발견하고 그에게 무언가 위안을 얻기 위해- 영화는 수현을 통해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 자의 평범한 고뇌를 들춘다. 신성한 길을 걸어야 되는 자의 고독의 정서. 과거 사랑했던 연인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았지만 성스러운 길의 뒷편에 묻어두어야 한다. 사실 영화는 후반부까지 그가 지닌 고뇌의 확실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 고뇌가 어떤 것이리라는 것을 직감하게 하지만 그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없음은 그의 고뇌가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무지에 가깝다. 그가 강우와 같은 결정을 내리려 하는 순간까지도. 그가 지닌 고뇌가 과거에 대한 되돌림의 욕망인지 혹은 미래에 대한 속박의 두려움인지. 물론 그는 강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수현과 별개로 영화에서 또다른 방점으로 자리잡는 인물은 문신부(기주봉 역)이다.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완성된 인물이다. 이제 길을 들어서는 수현과 같은 과도기 따위는 없다. 그의 고뇌는 그 길위에서 발견되는 것들에 대한 사유다. 그는 이미 성스러운 위치에 서 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도를 바란다. 기대와 성취의 괴리감은 크다. 신부는 스스로가 사람임을 인식하지만 신자들은 신부를 종종 하느님과 일체화시키곤 한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신성함을 찾으려하고 그에게서 그 세계의 완벽함을 찾으려 한다.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도에 감사한다. 그가 운영하는 영세한 수도원은 교구로부터 성지개발의 압박을 받지만 그는 신의뜻을 빙자한 교구의 알력앞에서 자신의 인간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전지적인 시점의 관찰자가 되기도 하는데 수련수사인 정수(성준서 역)의 밀회를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다. 그가 후에 담을 넘으려 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떄도 그 사실로부터 유추할 뿐 그를 추궁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불경한 죄악일지 모르나 사실 그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억압된 본질의 은폐일지도 모른다. 그가 종종 몰래 마시는 포도주의 욕망처럼 젊은 수련 수사가 애정에 대한 욕망을 꿈꾸는 것과 비단 다를 바가 없다. 결국 그 정도의 차이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품은 것 자체가 이미 죄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기에 지니는 당연한 욕망이지만 그들이 그 욕망을 제압해야 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임과 동시에 신의 매개가 되어야 하는 신부의 존재가 지니는 양면적인 고뇌. 결국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발견되는 고뇌의 파생이며 그렇기에 용서될 수 있는 변명같은 사실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을 응징해야한다는 종교적 논리도 신의 뜻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신의 뜻을 행하는 자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이 지극히 신의 뜻을 대변하는 셈일지도 모른다.

 

 '벌이 날다'.'괜찮아, 울지마' 두 작품으로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활동하던 민병훈 감독은 처음으로 국내에서 찍은 작품을 통해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적 고뇌, 즉 그 고뇌를 부르는 외부적 두려움을 담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뇌끝에 희망을 배치한다. 복수를 위해 땅을 파던 아노르가 결국 우물을 파내듯 범접할 수 있을지 불분명한 커다란 이상에 접근하는 나약한 과도기 청년의 현실적 고뇌에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돌아가게 해준다.

 

 수현를 고뇌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수아와 뺴닮은 헬레나(이민정 역)이다. 그는 헬레나를 통해 은폐하려했던 과거에 다시 괴로워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의 유기하려 했던 고통을 해갈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외적으로는 수아를 떠올리게 하여 수현의 고뇌를 외부로 끌어내게 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수현과 동일한 과거를 짊어진 인물로서 그와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는 과거 수현이 강우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애인이 있을 것이라는 강우에 대한 풍문은 그의 고뇌와 비슷한 질감의 동감대였을 것이고 그래서 수현은 강우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백하고 속죄를 빌며 수현은 그런 속죄를 받아들인다. 마치 자신의 거울같은 내면을 지닌 헬레나는 수현의 고백을 대신 해주고 동시에 헬레나를 통해 자신의 고백을 듣게 되는 수현은 동시에 헬레나를 용서함으로써 수아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간접적인 체험을 얻게 된다. 그의 오랜 체증같던 고뇌의 속박이 풀려나면서 그는 비로소 위안을 얻고 안정을 찾는다. 헬레나는 수아의 도플갱어이면서 동시에 수현의 페르소나이다. 그녀는 두인물의 외모와 내면의 분신 역할을 수행하며 영화의 갈무리적 장치로 활용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4, 8-20-

 

인간이 믿음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그조차도 비속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이 신을 대변한다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뜻이며 생각이다. 교황이라해도 그는 결국 신을 모이는 인간의 대표일 뿐, 신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단지 신의 뜻이라 믿으며 그 믿음을 좇는 것이 뿐이다. 물론 믿음이 없는 필자같은 경우는 논외지만 결국 필자같은 무교인들 역시 어떤 믿음이라는 초현실적 사실에 대한 불신을 지닌 것은 아닐것이다. 그것은 결국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그 믿음에 대한 속박의 정도차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으랴. 다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어리석은 고뇌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을 모시는 자는 심각해져서는 안됩니다. 깃털처럼, 가볍게." 극중 나오는 이 대사는 수현이 베어내야 할 포도나무가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그 신성함에 대한 지나친 무게감. 그것은 신을 모시는 신부로써의 중압감에 가깝다. 하지만 그 것은 하나의 오만이다. 신부는 신을 모시는 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신의 뜻을 빌어 인간을 상대하는 자이니까. 결국 그 믿음은 그 수행을 방해할 뿐이다. 결국 수현이 베어내야 할 포도나무는 지나치게 버거운 신의 중압감이 아닌 스스로가 쌓아가는 인간적 고뇌, 즉 스스로가 버리지 못하는 축적된 두려움일 뿐이다. 그 고뇌를 한풀 벗겨낸 수현의 시계바늘은 이제 멈춰있던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향해 돌아갈 것이다. 결국 모든 번민과 고뇌는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짊어져야하는 십자가와 같다. 그 십자가를 내려놓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지닌 미련 혹은 욕망의 끈을 놓는것. 그 포도나무에 열릴 탐스러운 포도를 얻기위해서는 그만큼의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포도를 얻기도 전에 그 힘겨운 작업을 두려워한다면 포도를 얻을 수 없다. 포도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망상의 포도나무를 베어야 한다. 우리는 미천한 인간이므로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을 인정하면 우린 가벼워질 수 있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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