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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무난했던 그녀 황진이
jimmani 2007-06-06 오후 12:50:59 1198   [5]

의도적인 프랜차이즈 상품이 아니고서야 한 소재를 가지고 거의 동시에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는 사례는 흔치 않다. 일본에서는 같은 원작이 드라마나 영화로 동시에 혹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함께 만들어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사례가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소재만 유사한 것이 아니고 동일인물을 주인공으로 서로 다른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더욱 독특한 사례이다. <황진이>가 그런 사례이다. 하지만 영화 <황진이>와 드라마 <황진이>는 단순히 동일한 인물의 동일한 특징을 연장선상에서 그리는 것을 결코 거부했다. 다른 제작사에서 다른 제작진들과 다른 출연진들을 내세운 만큼, 이 둘은 똑같이 황진이가 주인공이라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했다.

이미 드라마 <황진이>가 인기를 누리면서 1차적으로 황진이의 이미지를 심어놓음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상황에서 영화 <황진이>가 나왔다. 언뜻 떠오르는 이미지부터가 서로 다른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함으로써 드라마와 영화는 분명히 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이 될 것임을 선언했는데, 영화 <황진이>를 보니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드라마 <황진이> 속 황진이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차별화를 이룬 웰메이드 사극이었지만, 어딘가 허전했던 건 무엇때문일까.

성별과 신분에 따른 차별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했던 16세기 조선. 오랜시간 종적을 감췄던 천민 신분의 놈이(유지태)가 주인집에 다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사모해마지 않았던 아씨 황진이(송혜교)를 만나기 위해. 그런데 한양으로 시집을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진이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그녀가 실은 황진사댁의 정실 자손이 아닌, 이 집 몸종의 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 결혼 상대 쪽에서 이 사실을 알고 결혼을 물리게 되고, 진이는 큰 절망에 빠진다. 자신의 친어머니를 알게 되고, 비극적인 과거와 그 속에 숨겨진 양반들의 더러운 위선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 배신감을 느낀 진이는 양반집 규수라는 신분을 스스로 벗고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한편 진이가 기둥서방이 되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정조를 바친 놈이는 어느덧 잠적해 화적떼의 두목이 되고, 둘은 언제 다시 만날 지 알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송도에는 냉혹한 류수 사또 희열(류승룡)이 부임하고, 시시때때로 진이를 품에 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놈이가 이끄는 화적떼가 점차 관아까지 위협하면서 희열은 놈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고, 이에 진이의 신변도 위태로워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송혜교가 황진이 역을 맡았다고 했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 역시 우려의 시선을 갖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기왕에 맡게 된 것이라면 그 역을 맡은 배우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변신하려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송혜교의 연기를 본 결과, 그녀는 변신을 위해 상당히 노력한 듯 했다. 세상을 내 발 밑에 두겠다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양반들을 조롱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준 마냥 발랄하거나 마냥 청순하기만 한 청춘스타로서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독기를 가득 품은 듯한 표정과 붕 떠있지 않고 다부진 말투는 송혜교가 드디어 이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성숙한 배우로서의 길을 걷기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역할이 남성중심사회를 완전히 뒤집고 독자적인 길을 걷는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과의 사랑에 어느 정도 얽매여 있는 역할이다보니, 그런 변신의 폭도 보다 넓게 나아가지 못한 듯해 아쉬움이 든다. 그래도 이 정도 한계 안에서 송혜교의 변신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만족스럽다. 유지태는 사극이 처음인데다가 워낙에 평소 이미지가 현대적이라 잘 어울릴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무난히 잘 적응한 듯 싶었다. 워낙에 풍채가 좋으시다보니 현대적인 매력남 뿐만 아니라 힘좋고 우직한 고전적인 남성상도 꽤 잘 어울렸고, 특유의 나지막하고 안정적인 발성 또한 사극의 분위기에 잘 맞았던 것 같다. 송도 류수 사또 희열 역의 류승룡이 보여준 연기도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영화 내내 자기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속에 품고 있는 능구렁이같은 온갖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분명 악역이라고 해야겠지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과 말씨는 보다 묘한 매력이 있는 악역으로 보이게끔 했다. 이외에도 어렸을 적부터 변함없이 진이 곁에 머물러 주는 할멈 역의 윤여정, 몸종 이금 역의 정유미, 놈이를 삼촌으로 모시는 괴똥이 역의 오태경 등 비중 있는 조연 배역들의 연기도 다부져서 "황진이"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단지 황진이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진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다양힌 인물들에게도 폭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10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그 제작비 덕분인지 대충 만들었다는 인상은 절대 주지 않는다. 황진이가 입고 나오는 수많은 한복들은 정말 지금 시대의 패션쇼에서 선보여도 될 만큼 압도적인 미를 자랑하고, 프로덕션 디자인 또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가 충분히 담겨 있다. 자연의 배경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눈여겨 볼 만한데, 마지막 장면을 수놓는 금강산의 화려한 설경은 분명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않았을텐데도 어쩜 저렇게 그림에서 끄집어낸 듯 아름다울까 하며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퓨전사극의 성질을 어느 정도 띠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황진이>는 퓨전사극이라기보다는 정통 사극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배우들의 어투가 고어체보다는 현대적인 구어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의상의 색감 또한 조선시대에는 쉽게 볼 수 없었을 것 같은 묘한 배치를 이루고 있어 이런 점에서는 퓨전사극의 면모를 어느 정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캐릭터들의 성격이나 이야기 구조를 봤을 때는 정통 사극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홍석중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각색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차라리 원작을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아예 제대로 퓨전사극의 길을 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보문구처럼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영화는 홍보 과정에서 얘기한대로 예인이나 팜므 파탈로서의 황진이가 아닌 "인간" 황진이를 조명하려 한다.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 양반들의 지독한 위선과 그로 인한 배신감, 정서적 상처로 인해 스스로 양가 규수의 모습을 버리고 기생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양반들을 조롱하며 세상을 마음껏 비웃는 가운데 생의 유일한 사랑을 한켠에 품고 살아가는 비운의 여인의 모습까지, 예술적 가치와 같은 외적 가치는 접어두고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서 황진이라는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때문에 드라마 <황진이>와는 당연히 다른 구석이 많다. 여러 남자들을 거쳐가며 황진이라는 인물의 독립적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황진이와 그녀의 필생의 사랑 놈이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부각되고, 역사상에서 꽤 비중있게 다뤄졌던 벽계수와 서경덕과의 에피소드도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에피소드처럼 양념격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예인으로서의 모습도 벗고 팜므 파탈로서의 모습도 벗은 채, 인간 황진이의 모습에 주력하려 한 듯 보이지만 그 시도가 그렇게 대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첫째로 놈이와의 사랑이 너무 부각된 탓이다. 홍보한 대로 세상을 비웃을 만한 황진이의 카리스마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남성들을 향해 썩소를 날려줄 때다. 그 냉혹한 사또 앞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기생을 이리 어렵게 품는 사내가 세상에 어딨답니까?"하며 코웃음을 치는 순간 황진이의 "21세기적 여인"스러운 매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그러나 영화는 어렸을 적부터 이어온 놈이와의 사랑을 너무 지고지순하게 그린 나머지, 앞서 황진이가 보여줬던 이런 진짜 매력을 다소 희석시켜버린다. 똑같이 천한 신분에서 사회 변혁을 노리는 인물로서 단순한 연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동반자의 관계로 나아갔다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가 흘러갈 수록 점점 황진이가 놈이에 다소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져 아쉬웠다. 놈이와의 가슴 아픈 사랑 장면에서 어느덧 황진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눈물 흘리는 여느 청순가련한 여인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니, 그 전에 보여줬던 그 카리스마는 어딜 갔는지 아쉬울 수 밖에. 송혜교의 연기 역시 이런 가련한 사랑에 발목만 잡히지 않았다면 훨씬 대담한 변신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놈이와의 관계의 부각으로 반대로 황진이가 서경덕을 만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과정도 많이 생략된 듯한 아쉬움을 주었다.

황진이의 인간적 면모에만 포커스를 맞춘 것도 황진이의 분명한 매력을 보여주는 데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성별과 신분에 있어서 극심한 차별이 이루어졌던 조선 시대, 더구나 양가 규수로 자라온 사람으로서 황진이가 예술 이외에 자신의 생각을 펼칠 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놈이처럼 옹박급의 액션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때문에 황진이는 글로서 세상을 호령하고자 하고, 영화 속에는 그런 면모가 어느 정도 나오기는 한다. 희열과의 글 대결이나 벽계수를 놓고 희열과 벌이는 일종의 내기는 신체적 노출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관능적으로 다가오며 시대를 비웃는 황진이의 대담한 매력이 잘 드러난다.(고고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이 내기는 흡사 <위험한 관계>를 연상시킬 만큼 도발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황진이의 예인다운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보다는 여느 여인들처럼 사랑에 휩쓸리고 눈물 흘리는 황진이의 인간적 면모를 비추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드라마와 차별화하면서 인간적 모습을 조명하는 데 투자하는 것도 좋은 시도이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속 황진이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것에는 다소 소극적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아쉬웠다. 아니면 황진이를 궁극적으로 예술을 추구하는 예인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그녀가 세상을 마음껏 비웃는 수단으로 예술을 적극적으로 그렸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못만든 사극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미술이나 의상 등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만족감을 주고, 배우들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라는 대담한 홍보문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영화 속 황진이의 모습은 좀 무난했던 건 분명하다. 친모의 무덤을 찾은 뒤 황진이로서의 나도 여기 묻었다고 이를 악물던 그녀의 독립적인 면모는 놈이와의 사랑 속에서 흩어지고, 대담한 예술적 재능에 대한 소극적 묘사에 또 흩어졌다.  주인공이 주인공이니만큼 어느 정도 안정된 완성도를 갖춘 웰메이드 사극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조롱하는 충만한 대담성도 갖추고 있었어야 한다는 걸 가정한다면, 영화 <황진이>가 그려낸 황진이의 모습은 그 기대만큼 대담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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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2007)
제작사 : 씨즈엔터테인먼트, (주)씨네2000 / 배급사 : (주)시네마 서비스
공식홈페이지 : http://www.hwangjiny-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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