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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디 아워스'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3월 7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인용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아, 아내의 울음 소릴 들었으면. 아내의 통곡 소리에 의해 고막을 확인했으면. 아내의 몸부림에 의해 육신을 확인했으면. 이 정적, 이 무관심은 정말 견딜 수 없다. 이 공포감이 나만의 것이라니 정말 견딜 수 없다. 그의 깜박이는 의식이 아주 사그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찬란하고 강렬하게 타오른다. 어떤 치욕도, 어떤 불명예도 죽음보다는 나으리라는 의식이었다.’

박완서의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의 마지막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군요. 늙은 가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겠지요. 그 얘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죽는 순간에, 왜 죽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 소설을 읽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게 영 비겁해서 견딜 수 없던, 실은 별로 못 견뎌하지 않는 저를 견디기 힘들던 때였습니다.

소설 덕을 본 걸까요. 저는 여지껏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고, 자신 없는 투로 말할 수 밖에 없군요. 모르는 일이니까요. 있는데 잊었는지도 모르고, 잊지 않았는데 거짓말하는 건지도 모르고…… 제가 어떻게 저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살아서 영화도 보고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영화 <디 아워스>에 대한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마이클 커닝햄의 원작소설과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제법 의욕을 가지고 텍스트들 사이를 헤집어볼 생각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달아나버렸습니다. 그 소설들을 읽고 싶은 마음은 더 강해졌는데, 그런 코드말고도 챙길 만한 재미있는 맥락들이 많은 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놓고 단 하나의 글을 쓴다면 그런 폼 나는 얘기일 수는 없다는……

그렇다면 뭘까요.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다, 군더더기가 없네, 완벽한 플롯이야, 배우들이 역시 이름값을 하는군, 니콜 키드먼이 언제 나오나 한참 기다렸다니까…… 그렇게 수선을 떨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그렇습니다. 저는 불편했던 겁니다. 영화 때문이 아니라, 누구 말마따나 버지니아 울프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저 때문에…… 제가 살아온 어정쩡한 세월,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겹치고 포개지는 제 머릿속이 무거워서……


누구나 병을 앓으며 살아가고 있겠지요. 어떤 시대를 살든, 에이즈는 아니더라도, 어려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는 없다 하더라도, 남모르는 아픔 하나쯤은 겪고야 마는 게 인생이겠지요.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병이었을까요? 혹은 소설이라는 다른 세상을 사는 병. 어쩌면 소설은 그녀에게 삶과 싸우는 무기, 절절한 투병의 기록은 아니었을까요. 정신병자에게도 원하는 게 있다고, 살고 싶은 장소가 따로 있고 파티에도 초대 받고 싶은 거라고 그녀가 말할 때, 저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세상은 파티와 같습니다.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눠야죠. 누구나 잘 해보고 싶은 겁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고, 아름다운 꽃을 골라 향기를 맡듯이……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사랑하고…… 그런데 그게 왜 잘 안 되나요? 잘 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언제 안 될지 몰라 불안하지 않나요? 까닭 없이, 그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 자신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고 절박해서, 모든 연을 끊고 어딘가로 도망쳐 숨어살고 싶은 적이…… 없나요? 죽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한 남자가 창 밖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 죽음으로 한 여자가 자유를 얻을까요? 일단은 슬픔이라고 해 두렵니다. 글쎄요 자유란 것은…… 그렇게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서요. 그 남자의 어머니가 옵니다. 오십년 전에 가족을 떠났었지요. 어머니는 아들이 쓴 소설에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아들의 상처를 모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렇게 모두가 병들어 아파서, 죽고 떠나고…… 남아서 슬퍼하고…… 영화의 끝이 다가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 삶과 싸워서 마침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


그럴까요? 제가 한 십년 전쯤에 이 영화를 봤다면 아마도, 삶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신을 돌아보고 절망했거나, 그런 삶조차 접을 용기가 없음에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어떠냐구요? 십년 사이에 변했으면 얼마나 변했겠습니까. 제 이름이 강산이면 몰라도…… 여전히 삶을 사랑하기는 버겁고, 삶을 접을 용기 따위와는 손을 끊은 지가 오랩니다. 변하긴 변했네요. 오래 살고 싶어 담배를 끊으려 하는 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으니…… 버지니아 울프에 견줄 수는 없어도 나름대로 생에 대해 첨예했던 저의 감각이 세월에, 그 ‘시간들’에 씻겨 무뎌진 걸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감히 우리라고 칭하는 것을 용서하세요) 버지니아 울프의 비범한 삶과 죽음을 흉내내려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영화는, 그게 흉내가 아니다, 평범한 인생들 또한 저마다 절실하게 아프고 또 그 아픔의 내밀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깨달음을 얻고 나서 한 걸음 더 내디뎌야 하지 않을까요. 버지니아 울프를 넘어서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늙은 로라에게 차를 끓여주며 위로하고 포옹하는 젊은 줄리아처럼. 리처드의 죽음으로 지친 클라리사의 곁에 다가와 무거운 옷을 벗으라고 말하며 키스를 받아주는 애인 샐리처럼…… 그걸 뭐라고 딱부러지게 규정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영화에서 조역인 그 두 여자가 보여주는 자세를, 저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 얘기를, 혹은 글머리에 인용한 소설의 결말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쯤으로 알아들으셔도 그리 나쁠 것은 없겠습니다.

2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9
imgold
한번 봤을땐 잘 이해하지 못한 영화,,-_-ㅋ
두번 보다가 진짜 생각 많이한 영화.
세번보고 내 맘대로 해석해 버린 영화.^^;;   
2005-02-1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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