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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일 <어떤살인> 신현빈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해당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살인>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우선 감독님이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시나리오를 받았다. 사실 시나리오를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내가 직접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렵더라.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잘 만들어지면 나도 극장에서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직접 영화에 출연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 않나. 감독님은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지만 쉽게 결정을 못하겠더라. 감독님을 뵙고 집에 와서 답변을 빨리 드려야 되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됐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다시 봤다. 시나리오에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채지은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이후의 10년 공백이 있었는데 그동안 채지은이 어떻게 살아왔을지가 계속 상상이 되더라. 영화에서는 채지은이 성폭행을 당하기 전의 일상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일하는 공장에서 아무 잘못 없이 욕을 먹고, 구타 당하는 친구를 도와주러 갔다가 본인이 맞는 게 일상인 걸 알 수 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자꾸 채지은의 모습이 생각나니까 <어떤살인>은 해야 하는 작품인가 싶더라. 한마디로 채지은이 자꾸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결정을 할 때까지도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영화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고민이었나.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채지은이 너무 불쌍하고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채지은에게는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건가 싶었다. 교통사고 때문에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언어 장애가 생긴다. 선수 생활도 더 이상 할 수 없고, 자격증을 따도 소용이 없다. 공장을 다니는데 그 와중에 하나 뿐인 친구와 싸우고 집에 혼자 가다가 나쁜 아이들을 만나는 거다. 경찰서에 가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는 내가 과연 채지은의 이런 감정을 모두 표현하고 감당하는 것이 괜찮은 건가 싶었다. 그리고 채지은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몸에 배어 있어야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사격으로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한 친구이지 않나. 육체적으로도 강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았고, 정신적으로도 사격 선수의 집중력이라든가 담대함이 있을 것 같았다.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 역시 기본적으로 표현이 되어야 되는 부분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모두 어떻게 연기하나,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감독님이 많이 믿어주셨고 사전 준비 작업 시간도 긴 편이어서 다행히 준비를 잘 할 수 있었다.

언어장애가 있는 부분을 굉장히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준비했나.
시나리오의 대사도 채지은이 말을 더듬는 식으로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글자 그대로 읽을 수는 없지 않나. 사고를 통해서 언어 장애가 생기신 분들에 관한 다큐가 많은데 감독님이 아마 그걸 보고 그렇게 대사를 쓰셨을 것 같더라. 그래서 나도 채지은의 증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신경 언어 장애에 관해 정말 잘 쓰여진 책이 있더라!

좋은 교과서를 만난 셈이다(웃음).
맞다. 전공자들이 보는 개론서 같은 책이었는데 엄청 쉽게 잘 쓰여 있어서 열심히만 읽는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책을 정말 열심히 봤다(웃음). 여러가지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채지은의 증상은 ‘강직형 마비 말장애’인 것 같았다. 근육이 굳어져서 말이 안 나오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생각은 정상적으로 하고 말은 하고자 하는데 음성이 쉽게 나오지 않는 거다. 영화 속 강자겸의 동생 같은 경우는 아마 실언증이나 함구증일 거다(웃음). 그런 현상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고, 채지은은 정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말이 목과 혀가 굳어서 발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거다. 책에 이 모든 것들이 디테일하게 나와 있더라(웃음). 사고가 나서 장애가 생긴 경우는 이러이러한 증상이고, 또 다른 경우는 이러이러한 증상이라는 걸 설명한 문진표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그 속에 채지은의 상황을 대입해 증상을 찾아나갔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다. 학술적인 용어들이 절로 나온다.
맞다(웃음). 채지은의 증상을 파악한 다음에는 감독님과 연기의 톤을 어떻게 잡을지 이야기했다. 채지은이 너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 대사가 전혀 안들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나.
채지은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 밖으로 터져나오지 못하는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다.
감독님이 참고하라고 추천한 영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인의 향기> 다. 채지은처럼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인데 감독님 말씀이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는 맹인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신체의 다른 부분을 활용해 세상을 보는 연기를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관객들은 알 파치노의 맹인 연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거라면서. 채지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얼마나 말이 하고 싶겠나. 그런데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거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친구도, 다른 사람들도, 채지은이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계속 끊어 먹는다(웃음). 그래서 지은이를 연기할 때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말이 잘 안나오는, 말이 조금 불편한 사람을 연기했다. 그런데 언어장애가 있는 연기는 대사가 편집점을 찾기 힘들어서 연기할 때 조금 고생했다.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정말 대사 때문에 편집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 연기할 때 지은이가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특정 단어 같은 것을 조금 정했다. 패턴이 아예 생겨버린 셈이다. 같은 대사를 한다치면 계속 비슷한 시점에서 말을 더듬는 거다. 실제로도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매번 비슷하지 않나.

사전 준비기간이 길었다 했는데 얼마나 됐나.
거의 한 두달 정도 준비했다. 사격 연습도 하면서(웃음).

사격은 지은을 연기하는 데 있어 연기적으로 기술이 필요한 또 다른 부분이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부분이다.
태릉에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공기 소총, 즉 에어 피스톨이 정말 무겁더라. 한 1.2kg정도 된다. 그러니 한 팔로 드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벌벌 댔다. 조준이 문제가 아니라 드는 것 자체가 힘든 거지(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아령 들듯이 연습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실탄으로 제대로 된 사격 연습을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 총을 쏠 때 채지은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는데 그게 실제 선수들이 하는 행동이다. 밸런스를 잡기 위한 동작인데 그래서 사격 연습을 할 때는 반드시 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어야 된다고 하더라. 어떤 선수는 주머니에 손 전체를 넣기도 하고 어떤 선수는 손가락만 걸기도 하는데 손 전체를 주머니에 넣는 건 별로 예쁘지가 않았다(웃음). 그래서 기왕이면 조금 예쁜 자세가 낫다 싶어 손을 조금만 집어넣게 됐다. 실제로도 예쁘게 자세를 취하는 친구들이 몇몇 있더라(웃음).

개인적으로는 그 동작이 채지은의 과거를 환기시키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했다(웃음).
실제 선수들도 그렇게 한다(웃음). 사격을 할 때 몸을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축에 한 쪽 어깨를 거는 거다. 그래야 안정감이 생긴다. 문제는 현장에서는 총이 소품이니까 무게가 훨씬 가벼웠다는 거다. 그리고 총을 드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아쇠가 오히려 무겁더라(웃음). 실탄 총은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발사가 되는데 소품 총은 방아쇠 때문에 당기는 동작이 힘들어서 특수효과 팀이 급하게 방아쇠를 쉽게 당길 수 있도록 조절해 주기도 했다.

실탄 총은 살짝만 당겨도 발사된다니 굉장히 위험하게 들린다.
위험하다. 연습할 때도 고등학생 친구가 과녁판을 보러 사격장에 나가면 코치님이 말을 하고 나갔어야지, 잘못하면 쏠 뻔 했잖아, 하고 주의를 줬다. 그런데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서 놀랐다(웃음). 무서워서 코치님에게 만약 잘못해서 총에 맞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죽을 수도 있지만 조심하면 된다면서 너무 태연하게 대답하시더라(웃음).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코치님이 실제로 나를 코칭해 준 분이다.
채지은을 연기하면서 이것만큼은 반드시 잘 표현하고 싶다는 부분이 있었나.
우선 채지은에게서 운동 선수 같은 느낌이 자연스럽게 나기를 원했다. 그건 기운일 수도 있고 몸의 움직임이나 외양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어장애가 있는 부분 역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었다. 관객들이 채지은이 억지로 말을 더듬고 있다고 느끼면 채지은이 겪는 일에 공감하기 힘들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준비를 하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감정적으로는 누가 채지은의 상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채지은을 보고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감정 이외의 부분에서도 설득력을 더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폭행 장면 촬영은 힘들지 않았나.
그 장면도 걱정을 많이 했다. 나도 운이 좋아서 채지은에게 일어난 나쁜 일을 겪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가해자를 연기하는 남자 연기자분들도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모두 정말 착하고 멀쩡한 사람들이다(웃음). 누가 그런 일을 실제로 저질러 봤겠나(웃음). 그래서 실제로도 세 분이 함께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차피 채지은도 극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는 일이니까 나도 현장에서 기본적인 동선만 정해 놓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연기해 보니 정신이 없긴 하더라(웃음).

그런 장면은 촬영할 때 많이 지칠 거 같다.
맞는 신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오히려 촬영보다는 촬영하기 전이 생각도 많고 힘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있는데 시나리오에 ‘피비린내 나는’ 이라고 쓰여 있더라. 그런데 대본을 보던 중 어느 순간 정말 역겨운 느낌이 들더라. 미식거리는 게 며칠을 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촬영은 시작도 안 했는데 계속 그런 상황이 지속되니까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더라. 촬영하면서도 상태가 그런 식이면 문제가 생기지 않나. 그래서 혹시라도 촬영 기간 중에 제대로 잠을 못 자는 일이 생길까봐 초도 구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초라니?
잠을 잘 자려고 향초를 준비한 거다(웃음). 그런 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잘 잤다(웃음). 채지은은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표현이 많은 친구는 아니지만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는 친구다. 어떻게 보면 매일이 감정 신인 셈이었다. 그러다보니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촬영한 것을 조금 정리하고 다음날 연기해야 되는 것들을 챙기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갔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촬영을 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도 못자고 정신적으로 힘든 촬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매우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촬영했다 (웃음).

준비하는 기간에 오히려 더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촬영 전에는 감정이 100이면 100, 그대로 남아 있지 않나. 그런데 촬영 같은 경우는 어쨌든 한 번 시작하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미 지나간 장면은 다시 찍지 못하니 남아 있는 양이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미련이 남기도 하지만 앞으로 연기해야 할 부분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조금 편해지는 부분이 있다. 한마디로 시험 범위가 너무 많은 셈이다. 촬영 전엔 이 모든 걸 다 봐야 하는데 뭐라도 하나 끝내면 이건 안 봐도 돼, 이것도 안 봐도 돼, 이렇게 되는 거다(웃음).

촬영이 끝나고 캐릭터에서 나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나.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촬영 때문에 한참 바쁘다가 쉬게 되는 기간이니까 영화도 보고, 놀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런데 친구들을 오래만에 만났더니 나더러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고 그러더라. 난 그날 12시간 동안 ‘초 숙면’을 취해서 컨디션이 엄청나게 좋은데 친구들이 잠을 못잤냐고 계속해서 물으니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싶더라(웃음). 채지은의 기운이 묘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운 자체가 조금 가라 앉아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촬영하기 전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물론 촬영 때보다는 촬영 후 며칠이 조금 더 힘들기는 했지만.

<어떤살인>은 언제 크랭크업 한 건가.
작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정도에 촬영을 마쳤다. 개봉까지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교통사고 전후의 채지은의 모습은 각각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나.
교통사고 전의 모습 같은 경우는 고등학생으로 보여야 된다는 일념이 있었다(웃음). 그런데 교복이 아닌 트레이닝복을 입어 버린 거지(웃음). 교복 입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교복을 입는 걸 기대했는데 말이다(웃음). 어쨌든 그 장면은 영화에서 채지은이 온전한 대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한데 고등학생들의 말투가 뭔지 고민되더라. 나에게는 너무 오래된 일이지 않나(웃음). 그리고 채지은이 원래는 또래 친구들처럼 하고 싶은 것도 굉장히 많은, 밝고 명량한 친구였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지은이가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그때 뿐이다. 교통 사고 이후에는 사실 애매한 미소를 짓는 정도만 있지 웃는 모습이 거의 없다. 그래서 채지은의 모든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그 장면에 몰아서 연기했다(웃음). 웃는 모습이나 목소리 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채지은은 친구 원경을 걱정하는 어른 같은 면이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부모님에게 장학금 받아 대학가겠다고 말하지 않나. 나는 고등학생 때 단순히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웃음).

사고 후에는 어떤 부분에 집중해 연기했나?
감정적으로 변화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채지은은 매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게 되는 거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사람이 죽어 있지 않나.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는데 그때 채지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저지른 일을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때도 또다른 변화를 겪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박형사를 죽이면서 채지은의 예전 모습이 거의 사라지는 거다. 시체 때문에 냉장고가 툭하고 열려도 전혀 놀라지 않지 않나. 경찰서에 가서 상현과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채지은이 감정적으로 크게 바뀐다고 봤다. 그 전까지는 분명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잘 살고 싶었을 텐데 그때부터는 아예 노선을 바꾼 거다. 원경이가 맞은 것도 채지은에게 영향을 줬을 거다. 영화의 카피는 ‘세상을 향한 슬픈 복수극’이지만 개인적으로 영화가 복수라기보다는 너무 잘 살고 싶었던 친구가 세상에게 버림받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채지은은 어떻게든 계속해서 잘 살아보려 세상에 매달린 거다. 하지만 결국에는 세상이 자기를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세상을 버리겠다고 체념한 거라 생각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었던 거다. 영화 초반에는 꼭 죽는다 산다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일반 사람들처럼 ‘잘’ 살고 싶었던 친구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따 놓은 자격증이 많다지 않나(웃음). 정말 열심히 사는 친구였던 거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친구가 모든 걸 다 버릴 수 밖에 없게 만든 거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는 채지은을 냉소적이고 덤덤하게 표현했다. 감정이 격하다면 격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으로는 많이 냉정해지고 무심해진 거다. 그런데 감정이 없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 자겸 때문에 흔들리게 되는 거라고 봤다.

말한 대로 채지은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친구였던 것 같다. 어쩌면 채지은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아닌 박형사를 죽이는 순간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수 있다. 본인이 당한 일은 스스로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형사를 죽인 건 스스로가 저지른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이미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박형사를 죽인 건 잘못된 판단에 의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물론 박형사를 죽인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냉장고에서 시체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짧지만 강렬했다. 원래부터 시나리오에 있던 장면인가.
박형사의 사망 소식을 뉴스로 듣다가 냉장고에서 시체가 떨어지는 걸 본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고 덤덤한 거다.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편집됐지만 원래는 내가 책상에 돌아와 앉으면서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 장면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하더라(웃음). 그 부분은 영화의 길이 때문에 편집된 것 같다. 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니 내 스스로도 조금 덤덤해지는 부분이 있더라. 사람이 모두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뭐(웃음).

안용훈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안용훈 감독은 많은 것을 지시하는 편인가, 배우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편인가.
자유를 주는 편이다. 연기를 직접 하던 분이어서 연기를 보면 호흡이나 눈을 보고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아신다. <어떤살인>에도 잠깐 출연했다(웃음). 그래서 현장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상황에 맞게 조금씩 디렉팅을 주셨다.
데뷔도 늦은 편인데다 데뷔한 후에도 활동이 활발한 편은 아니다. 게다가 학부 전공은 연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작품 하나 하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처럼 여겨질 것 같다.
요즘은 고등학생 아니면 아역부터 올라오는 친구들도 많고 스무 살 정도부터 시작하는 게 보편적인 상황이다. 말한 대로 나는 늦게 시작했다면 늦게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편인데 어떤 때는 일을 조금 일찍 시작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평범한 20대 초반을 경험한 것이 나에게 큰 자산이 됐다고 느낀다.

배우로서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한 명의 인간으로서를 말하는 건가.
둘 다. 결국 배우는 사람을 표현하는 일이지 않나. 18~20살부터 일을 시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경우 평범한 대학생활이나 연애, 친구들과의 관계가 없더라. 가장 간단한 예로 애인과 삼청동을 손 잡고 걸어볼 수도 없었을 거고, 미팅이나 소개팅도 안 했을 거다. 설령 소개팅을 했다고 해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다. 학교 축제에 가거나 MT를 간 적도 없지 않겠나.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답사를 갔지만. 어쨌든 그런 경험들이 연기를 할 때도 도움이 되더라. 일상적인 부분을 많이 경험한 셈이니까. 그리고 어느정도 자아가 형성되고 나서 일을 시작한 것이 훨씬 더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끼나.
배우라는 직업이 갖는 매력이자 난점이 연기를 하는 촬영장에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는데 그 외의 모든 순간에서는 자신을 정말 강하게 붙들고 있어야 된다는 거다. 배우는 자아가 조금이라도 약해져 있으면 다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굉장히 단단해져야 된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일을 일찍 시작한 친구들을 보면 잘 되고 있어도 여러가지로 굉장히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자아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무조건 달려만 와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어쨌든 학교를 다니다 전공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 직접 선택한 길이 아닌가. 요즘은 어릴 때 일을 시작한 친구들 중에 본인이 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에 휩쓸려 일을 시작하게 된 경우도 많다. 특히 내 또래는 길거리에서 캐스팅 되는 일이 굉장히 많았으니까. 그런 걸 보면 일을 일찍 시작하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늦게 시작해서 힘든 점은 없었나.
작품 같은 경우는 사실 전공자가 아니니까 처음 현장에 갔을 때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전공자도 마찬가지라고 하더라. 학교에서도 연기를 배우지 영화나 TV 촬영법에 대해서는 잘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현장 용어를 아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서 기자도 기사를 누가 가르쳐 줘서 쓰는 건 아니지 않나.

맞다. 일단 부딪히고 보는 거다(웃음).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눈치와 센스로 모든 걸 해결하지 않나(웃음). 예를 들어 인터뷰 기사를 써도 반드시 물어봐야 되는 질문이 뭔지, 누가 가르쳐 주는 건 아닐 거다. 기사 포맷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쓸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메뉴얼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방가? 방가!>로 처음 데뷔했는데 현장에서 무슨 미어캣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건가, 저건가, 눈치껏 연기했다(웃음). 드라마를 처음 할 때도 마찬가지고 연극도 그랬다. 연극을 하면 단련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선배님들도 추천해 주셔서 연극을 한 적이 있다. 같이 작품했던 선배님들 중에 안내상 선배님이나 박철민 선배님은 연극을 워낙 오래하신 분들이고 지금도 가끔 연극을 하신다. 그래서 기회가 돼서 연극을 하면 분명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시더라. 그래서 하게 된 연극이 영화 <약속>의 원작 연극 ‘약속’이었다. 그런데 2인극이었다.

첫 번째 공연이 2인극이라니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웃음).
정말 멋도 모르고 한 거다(웃음). 1시간 40분 짜리 공연이었다. 지금은 시나리오를 보면 내가 그 역할을 맡으면 어떨지가 대충 보이는데 그때는 단순히 하면 재밌겠다는 가벼운 생각 뿐이었다. 연극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웃음). 만일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연극은 모든 걸 말로 설명해줘야 되는 데다가 1시간 40분짜리 동선을 모두 외워야 했다. 대사도 대사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무대에서 움직여 본 적이 없으니까 너무 어려웠다. 거기다 마이크가 없으니 대사를 발성만으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극장에서는 소리가 먹혀 버리더라. 그런데 더 크게 말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지 않나. 멜로의 감정은 잡아야 되고 대사는 전달해야 되니 연습할 때는 거의 매일 울었다(웃음). 같이 연극한 오빠들이 남아 도와주기도 했다. 집에 와서도 의자 같은 걸 세워 놓고 동선을 계속 연습했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니까 정말 도움이 되더라. 공연 하면서도 재미 있었고. 같은 연기를 그렇게 같은 순서대로 여러 번 할 수 있는 경험은 연극이 아니면 없지 않나.

정말 그렇다. 연기가 정말 많이 늘었을 것 같다.
영화 같은 경우는 아무리 사전 준비 기간이 길고 리딩을 많이 한다고 해도 연기를 매번 실제 상황과 같은 에너지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연은 매일 온전한 에너지로 연기해야 했는데 그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두 달 반 동안 공연을 했는데 처음 시작하고 대략 한 달 반 동안은 3장 짜리 공연인데 2장까지 하고나면 기운이 달려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더라. 문제는 3장에서 가장 많은 일이 벌어진다는 거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니까 되긴 되더라(웃음). 막공 때 작가님이 보러 오셨는데 좋게 이야기 해줘서 너무 뿌듯했다.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기쁘지만 극을 쓴 당사자로부터 칭찬 받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엄청 우왕, 이러면서 뿌듯했다(웃음). 그 작가님 작품이 원래 대사가 아름답지만 길고 어렵다고 그러더라. 못 볼 정도만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썼다며 잘봤다고 하셔서 너무 기뻤다. 그런 경험도 있었고 드라마를 할 때도 힘들었던 여러가지 순간들이 있었는데 항상 뭔가는 남는 것 같다. 뭐라도 배우는 게 있는 거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감정이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신경썼다. 아까 하던 이야기와 이어지는 부분인데 연극하면서 매일 매일 연기를 하다 보니 인물의 감정이 굉장히 오래가더라. 예를 들어 연극을 할 때 상대 배우가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내가 말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정이 너무 격해졌는지 상대 배우가 울면 안되는데 울어 버렸다. 원래 남자는 슬픈 마음을 참고 덤덤해야 하고 여자가 울며 불며 매달려야 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인물의 감정에 너무 빠져 있다보니 연극하는 도중에 상대에게 너무 화가 나더라(웃음). 니가 나를 두고 가겠다면서 지금 울어? 이런 마음이었던 거지(웃음). 그래서 성이 나서 몰아붙여 버렸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너무 밉더라.

자기가 떠난다고 하면서 울기까지 하니 미울 수 있다(웃음).
관객들이 보기에는 감정적으로 격하게 발산하는 공연이 되긴 했는데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에 가서도 사람들에게 가볼게요, 수고하셨어요, 건조하게 말하고 집에 왔다(웃음). 사실 공연은 공연이니까 어머, 왜 울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이성적인 생각을 해야 하는데 캐릭터의 입장에서 지금 나랑 장난하나, 싶었던 거다(웃음). 그런데 그런 경험들이 있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게 된 거다. 그래서 <어떤살인>을 할 때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 부분이 있다.

<어떤살인>에서는 무얼 배웠나.
이번 영화에는 혼자 찍는 신이 많았다. 그런데 혼자 연기한다는 건 기댈 곳이 없어 굉장히 어려운 거더라. 그래서 혼자 하는 장면에 대한 어려움과 매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고 다른 배우와 같이 하는 장면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상대 배우에 대한 고마움 말이다.

연기하면서 배워나간 것들을 이야기할 때 얼굴이 너무 밝아보여서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혹시 후회한 순간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는 있었지만 왜 내가 이 일을 선택 했는지 후회한 적은 없다. 미술 이론을 전공했는데 전공대로 진로가 정해졌다면 선생님이 되거나 전시 기획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일말의 미련이 없더라. 지난 주에도 삼청동에서 전시를 하나 봤는데 내가 큐레이터였다면 이런 건 이렇게 전시했을 텐데, 이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웃음). 전시는 보는 걸로 좋은 거였다. 아직도 그 쪽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도 전공자가 아닌 사람보다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알아들으니까 친구들이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전시에서 무슨 작가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더라, 라든가 어떤 전시가 좋다, 요즘은 누구 작품이 비싸다, 이런 이야기(웃음). 마치 업계 동향을 살펴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딱 재밌는 것 같다. 미술은 일종의 취미 같은 거지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군가.
안규철 작가라고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우리 학교 교수님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안규철 작가의 전시를 보러 삼청동에 왔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는 안규철 짱 팬으로 통한다.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고 졸업하고는 뵌 지 오래 됐지만 실제로도 매우 좋아하는 선생님이다.

미술은 미련이 없다 했는데 연기는 어떤가. 만족감을 주나.
연기는 어렵지만 재밌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어떤 일을 이렇게 계속해서 재밌어 하고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역할도 생기겠지만 말이다. 교복은 이제 거의 마지노선에 들어섰다(웃음).

교복에 집착하는 듯하다(웃음).
잠깐 나오는 교복 장면도 1~2년 사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해야 되는 상황이 오고 있다(웃음). 대신 앞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역할이 또 남아 있다.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역할들이 끊임없이 남아 있다는 게 굉장히 기대가 되고 힘이 된다. 때때로 선배님들이나 선생님들이 연기가 아직도 어렵고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웃음). 연기란 정말 끝도 없는 작업이라 생각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계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
어떤 생각으로 미술을 공부하다 연기로 전향하게 된 건가.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는 대작가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실기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며 미술사를 공부했다(웃음). 어쨌든 학교를 다닐 때 실기가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굉장히 빨리 깨달았다. 미술 이론과를 나와서 연기를 하는 걸 신기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연기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전부터 있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는 용기가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거다.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왔기 때문에 집에서도 마찬가지고 나도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면 1년 동안은 모든 학생이 실기를 똑같이 한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바로 느낀 게 난 작가가 안 될 거라는 거였다. 실기과에는 물론 나보다 못하는 친구도 있다(웃음). 예를 들어 정말 열심히 하고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데 작업한 걸 보면 그렇게 멋지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웃음). 반면, 정말 너무 잘 그리고 재능이 넘치는 친구들도 있다. 심지어 재능도 가졌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나는 재능이 많은 친구만큼의 재능도 없고, 좋아해서 미친듯이 하는 친구들만큼의 애정도 없더라.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최대한 그럴싸한 그림을 빨리 끝내 다른 걸 시작할까, 라는 생각 뿐이더라. 한마리도 때우려고 한 거다. 어쩌면 학교 커리큘럼 자체가 전공을 푸시하다 보니까 오히려 내 길이 아닌 걸 빨리 깨달은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실기가 아닌 이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학과 교수님이 강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저렇게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를 돕는 일도 했는데 이건 아니라는 걸 자꾸 느끼게 되더라.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 전부를 걸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던 거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져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휴학하면 절대 졸업을 못할 거라면서 졸업은 하라고 하시더라. 실제로 그렇게 휴학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나도 동의했다. 그래서 2009년 2월에 졸업했는데 조금 놀다가 여름에 프로필 사진을 찍은 걸로 <방가? 방가!> 오디션을 보게 된 거다.

연기는 소질이 있다고 느끼나.
잘하는지 못하는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조금 웃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침잠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그런데 일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단 한 번도 늦게 일어나 본 적이 없다. 촬영은 물론, 촬영 시작 훨씬 전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되는 거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하거나 연기에 관련된 다른 일을 할 때도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이게 내가 정말 좋아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며칠 전, 영화 홍보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9시 반 쯤에 친구에게 문자를 했더니 친구가 대답을 해주다가 깜짝 놀라더라.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며(웃음).

9시 반이 이른건가(웃음).
작품을 쉬고 있을 때는 그 시간에 자고 있을 확률이 높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인데 일을 할 때면 4~5시에도 착착 일어난다. 현장에 있는 걸 좋아하고 어려워도 연기하는 게 좋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대본 공부하면서 준비하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너무 좋다. 영화, 책, 음악, 공연을 모두 너무 좋아하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억지로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이 길을 잘 선택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재미있고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어쨌든 그게 직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연기가 직업의 측면에서 나와 잘 맞다는 생각이 든다.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를 일에 참고하기 위해 보거나 요즘 어떤 영화가 있는지를 대충 알기 위해 지겨운 데도 억지로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영화 보는 걸 너무 좋아해서 심할 때는 정말 미친듯이 본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런데 수많은 연기자나 감독들을 인터뷰해보면 일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보다 사실 그렇게 좋아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더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더라. 예를 들면, 작가는 시나리오를 혼자 쓸 수 있지만 연기자는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고 감독도 영화에 투자가 되지 않으면 연출을 하기가 쉽지 않다.
맞다. 내 마음처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봐도 재미가 없는 작품을 해서 남에게 보라고 할 수도 없다. 나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가고 재미가 없는데 남에게 보라고 하는 건 폭력이고 억지다. 남이 뭐라고 해도 적어도 나는 좋아서 자신있게 이런 게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부터가 재미없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한다는 건 과자 공장에서 ‘우리 과자, 우리 집에서는 안 먹어요’ 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웃음).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문구도 있지 않나.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작품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조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힘들다. 그렇다고 엄청 고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웃음). 하고 싶은 작품을 만나도 기회가 되지 않거나 연이 닿지 않아서 엎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이겨내나.
나도 그럴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었다. 간단하게는 당연히 운동도 하고, 몸도 풀고, 발성이나 기본적인 것들을 준비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사실 일상적인 부분이다. 다른 뭔가가 없을까 고민했는데 보통은 그래서 악기나 요리, 꽃꽂이 등 뭔가를 많이 배우는 것 같더라. 그런데 나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를 한 번에 많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 번 그렇게 꽂히면 한 달에 30편 씩 보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일이 없고 힘이 들면 오히려 뭔가를 많이 보거나 하게 되는 것 같다. 영화를 정말 전투적으로 본다든지 여행을 간다. 그런 식으로 다른 무언가를 많이 해 감각적으로 많은 것을 느끼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너무 힘들어지니까.

많은 작품에 출연할수록 관계자들에게 노출이 많이 돼 캐스팅 되는 데 유리한 부분이 있다. 작품 선택에 있어 조금 타협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나.
노출 빈도 때문에 작품을 하게 되는 경우도 사실 있다. 나도 모든 작품을 안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웃음). 어떻게든 매 작품의 장점을 찾으려 한다. 그래도 이런 부분은 조금 재밌네, 하면서(웃음). 그런데 사실 그런 부분이 조금 원할하게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회사와도 이야기 했던 부분이 나는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거였다. 그런데 여배우를 위한 시나리오 자체가 남자 배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현장 자체를 너무 좋아하고 연기를 하는 게 힘들어도 가장 즐겁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팅을 많이 하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서 무산되는 경우도 있고 협상 중이던 작품이 연기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선은 기다려 봐야지.

대중들이 신현빈을 어떤 배우로 기억했으면 좋겠나.
배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배우라는 말은 분명 직업을 뜻하는 단어지만 ‘걔도 배우냐?’ 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직업이지 않나. 그래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배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배우에 가 닿을 수 있도록!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 글_최정인 기자(jeongin@movist.com 무비스트)
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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