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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왜 가부장제와 이별해야 하냐면… <이장> 정승오 감독
2020년 3월 23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이 집안 남자들은 대대손손 망나니예요?”

“고추가 벼슬이에요?”

고향의 아버지 묘를 이장해야 하는 상황. 큰아버지 댁에 모인 네 자매 중 넷째 ‘혜연’(윤금선아)이 되바라지게 소리친다. 이장을 하는 데 ‘장남’이 없어서는 안 되는 거라며 부득불 고집을 부리는 큰아버지가 찾는 건, 다름 아닌 집안의 유일한 아들 ‘승락’(곽민규)이다.

세상에 난 순서라면야 네 명의 누나 뒤인 막내지만, 남자라는 그 자체가 명분이 되어 집안 대소사 결정권을 자연히 이양받는 기묘한 입지의 소유자가 된 ‘승락’. 그는 과연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몇 년째 연락 두절된 동생을 찾아 나선 누나들은 여러모로 답답한 장면을 마주할 뿐이다.

지난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런 내용의 <이장>을 선보인 정승오 감독은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이어 남성 관객의 불만스러운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관객의 감정적 온도가 묻어나는 따끈한 질문 몇 가지를 복기하던 정승오 감독이 말한다.

“<이장>은 가부장제와 이별하는 이들의 여정을 담는 영화예요. 서사의 주도권을 쥔 건 네 자매죠. 하지만 가부장제와 가장 먼저 이별해야 하는 사람은 남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 그의 생각을 마저 들어본다.


 <이장>
<이장>

지난달 20일(목) 언론시사회에서 <이장>은 어린 시절 경험한 제사 풍경을 떠올리며 만든 영화라고 말했다.
어릴 때 제사를 지내면 준비는 여자들이 다 했다. 음식 차리고 상 깔고 병풍 설치하고… 그렇게 제사상이 차려지면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남자들은 마치 자기가 다 준비한 것마냥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절을 했다. 나도 따라 절을 했는데 할머니나 고모, 결혼 안 한 사촌 누나는 뒤에만 서 계셨다. 노동은 다 해놓고 말이다. 어린 마음에 왜 그런 거냐고 물었는데 자연스럽게 “여자니까 못 하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그저 느낌에 머물지 않고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됐다는 게 신기하다. 성장하면서 좀 더 강력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것 아닐까 짐작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가부장적인 성 역할 교육을 받으면서 커왔다.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그런 분위기를 굉장히 싫어하셨다. 우리 윗세대인 소위 ‘베이비부머와 ‘386’은 맞벌이 부부가 많지 않나. 어머니도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하셨는데 늘 “똑같이 돈 벌면서 왜 나만 밥 차리고 설거지를 하냐”고 주창하셨다. 당신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남자 둘(남편, 아들) 뒤치다꺼리만 해야 하냐고. 결국 내가 수능을 끝내는 날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셨다. 시험을 치르고 돌아와 보니 집이 정말 비어 있더라.

어머니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자식인 당신 입장도 공감이 된다. 서운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자식은 당연하다는 듯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모성을 요구하지 않나. 그때는 이해하려고 해도 너무 서운했다. 전역한 뒤 어머니 집에서 2년 정도 같이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안방 문을 잠그시는 걸 보고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문제로 서로 많이 부딪혔다. 아마 어머니로서는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집을 나왔는데 그의 분신 격인 내가 쫓아와서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게 싫으셨던 것 아닐까. 내가 이를 닦을 때 아버지처럼 ‘컥컥’대는데 그걸 특히 싫어하셨다.(웃음)

아마도, 그런저런 시간을 거치며 서서히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건가.(웃음)
시간이 지나 보니 알겠더라. 어머니는 그저 자기 삶이 존중받기를 원하신 거다. 나중에는 그 선택이 좀 멋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만의 사적인 공간이 생긴 뒤로는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조금씩 달라졌다. 35년 동안 ‘한국 남자’로 살아온 관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어머니 집에 갈 땐 미리 전화를 드리고, 거기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더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먼저 말씀을 드린다. 가사도 분담을 한다. 여전히 아내에게 집안일의 무게추가 더 실려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지만… 아마 이런 경험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자라서, 남자라서 할 수 있고 없고가 결정되는 것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걸까. 가족 내 여성에게 돌아가는 차별을 둘러싼 정체는 뭘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극 중 모자 관계를 보여주는 건 네 자매 중 첫째 ‘혜영’(장리우)과 그의 어린 아들 ‘동민’(강민준)이다. 싱글맘인 ‘혜영’은 주의력 결핍이 있는 아들 ‘동민’에게 비타민을 빙자한 신경안정제를 먹인다.
셋째 ‘금희’(공민정)는 그런 언니에게 아이와의 문제를 약으로 그렇게 간단히 해결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이건 “엄마로서 그래도 되는 거냐”는 직설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언니의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도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신경안정제를 먹이는 게 엄마에게 정말 간단하기만 한 해결법이겠는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가 너무 힘드니, 악순환되는 것이다.

최근 육아 프로그램을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에너지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나오더라. 부모의 활동력이 높지 않은 반면 상대적으로 자식이 활발하면 육아가 지나치게 고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경우에는 엄마와 아들 둘이서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너무 버겁다. <이장>에서는 그런 ‘혜영’과 ‘동민’ 두 사람을 보듬어줄 수 있는 가족의 존재를 주변에 펼쳐놓았다. 가족 모두가 ‘콜라보’하는 시스템이다.

아이를 키울 때는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말인가. 그 ‘콜라보’ 시스템에 삼촌 ‘승락’만 빠져있는 건 의도된 설정이라고 본다. ‘승락’은 <이장>이라는 이야기의 핵심을 쥔 ‘장남’이자, 네 명의 누나를 둔 막냇동생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구체적인 시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7~8년 정도 누나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는 상황이다. 아마 네 자매가 ‘승락’에게 연락을 끊지는 않았을 것 같고, 그가 누나들을 밀어냈을 거라는 생각으로 상황을 구성했다.


극 중 대사량도 가장 적으니 ‘승락’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더라. 어찌나 답답하던지…(웃음)
아마 열 마디도 채 안 될 것이다.(웃음) ‘승락’은 막내로 태어났음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장남의 역할을 교육받은 인물이다. 책임감과 의무를 강요받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되 감정 표현은 절제하는 법을 익혔다. 그런데 정작 누나들은 자신 때문에 부모님께 차별받았다는 티를 낸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든, 찔끔 티 내며 비아냥대든, 숨기려 하지만 삐져나오든… 아마 누나들에게서 전해진 감정을 마음에 쌓아오면서 그 모든 상황에 관한 거부감을 키웠을 것이다. 자기가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웃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 가족 안에서 자기가 억지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가족 문제에서 그럴 수는 있다고 보더라도, 임신한 전 여자친구인 ‘윤화’(송희준)에게까지 지나치게 무책임한 건 어째서인가.
큰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성향이 생긴다. ‘승락’은 아마 중압감이 큰 상황을 피하고 보려는 성향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인물이다.

‘혜연’이라는 캐릭터는 반면 매우 저돌적이다. 큰아버지에게 “이 집안 남자들은 대대손손 망나니”라고 소리치거나 “고추가 벼슬이냐”고 비아냥댄다. 가부장의 권위에 굴하지 않겠다는 일념이 도드라진다.(웃음)
아마 ‘승락’도 ‘혜연’처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부장이 가진 이상한 권위 의식을 의심하고 목소리도 내고 싶었는데 ‘한국 남자’로 교육받은 관성 때문에 그게 어렵다. 어른인 남자 앞에서는 괜히 순응하게 되고, 돌아서면 자신의 비겁함에 열패감과 자괴감이 든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은 물론 군대라는 시스템을 거치면서 ‘한국 남자’는 더욱 그렇게 된다. 반면 ‘혜연’은 피하지 않는 성격이다. 무서워도 눈을 부릅뜬다.


공교롭게도 극 중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전부 시대착오적이거나 ‘모지리’같은 느낌이 드는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GV를 할 때 초반 5~6개 질문이 다 남자 관객에게서 나왔다. 여자 캐릭터보다 남자 캐릭터가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거냐, 감독님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느냐(웃음) 등 여러 말이 있었다. 큰아버지, 첫째 ‘혜영’의 아들 ‘동민’, 둘째 ‘금옥’(이선희)의 남편, 셋째 ‘금희’의 예비 남편, 막내 ‘승락’까지 남자들은 모두 어떤 문제를 안고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서사를 끌어나가는 네 자매 역시 어마어마하게 고집스럽지 않나. 이야기의 주체가 네 자매일 뿐 성별에 따른 긍정, 부정이 따로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하려던 건 결국…
<이장>은 가부장제와 이별하는 여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남자들이 먼저 가부장제와 이별을 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영화를 만든 계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 내 차별은 오래전부터 여성에게 편중돼 있다. 죽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가 정말 공존할 수 있을까? 기계적인 균형조차 맞추지 못하는 시스템이 우리의 조화를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코로나19 때문에 의지와 상관없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덕분에 개인 정비도 할 수 있고 재택근무 중인 아내와 붙어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같이 이야기하고 밥 먹을 수 있어 좋다.


사진_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2020년 3월 23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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