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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과 꾸준함, 방은진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집행위원장
2020년 6월 18일 목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손예진, 현빈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에서 만난 분위기 있는 ‘세리 엄마’가 누군지 한 번쯤 궁금해 본 적 있다면, 바로 <오로라 공주>(2005) <메소드>(2017)를 연출한 방은진 감독이다. 여우주연상 경력의 실력 있는 배우 출신임에도 너무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세리 엄마’ 만큼은 자기 본 모습과 맞지 않아 못내 힘들었다는, 그의 웃음이 퍽 개구지다.

18일(목) 열리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그가 두 해째 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아 치르는 행사다. 코로나19와 북한의 도발이라는 악재에도 안전하고 의미 있는 영화제를 위해 애써야 했던 과정이 전혀 고단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제는 무거운 자리를 모두 내려두고 작품과 연기로 돌아가 ‘한 길을 걷는 꾸준함’을 지켜가고 싶다는 말에 애틋한 온도가 묻어나는 까닭이다.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평창영화제)가 코로나19라는 악재를 만났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지난해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지난해는 영화제 첫 출발이었던 만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30명 넘는 해외 영화감독을 모셨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평화라는 이름을 걸고 열리는 영화제인 만큼 초청이 수월했다. 넬슨 신 감독님(기자 주: 남북 합작 애니메이션 <왕후 심청>(2005)을 연출했다>)처럼 의미 있는 분들이 찾아 주셨고 영화 수급도 원활했다. 반면 올해는 코로나19로 영화계가 궤멸 상태에 빠졌다. (실내)행사 규모를 축소했고 야외 상영을 늘리는 등 이미 정했던 콘셉트를 변경했다. 각종 리셉션, 파티도 도시락 케이터링으로 대체했다. 올해 영화제 주제 의식을 ‘우리 안의 작은 평화’로 삼고, 주변을 다독이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말한 것처럼 영화계가 ‘궤멸’에 준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영화축제 역할을 하는 영화제를 준비하는 심경이 복잡했으리라고 본다. 관객에게 방문을 권유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전주국제영화제도 딱 100인의 영화계 인사만 모여서 치렀다. 서로 한 자리씩 떨어져 앉아 마스크를 쓰고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괴로운 마음도 들더라. 결국 평창영화제도 (현장 기자회견 대신)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영화제 개최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는 ‘하하호호’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정말 힘들었다. 지금도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관객 대상) 현장 행사를 치르는 첫 번째 영화제이다 보니, 혹시라도 다른 영화인들까지 색안경 끼고 보게 만드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럼에도 영화제를 진행하기로 한 건…
일상의 평화가 깨진 상태에서 너무나 많은 분이 짓눌려 있고, 힘들어하신다. 그 분들도 바람은 좀 쐬어야 하지 않겠나. 프로그래머 입장에서는 극장을 포기하고 영화제를 여는 게 쉽지 않았지만, 결국 평창영화제는 멀티플렉스를 포기하고 야외 상영을 선택했다. 용평리조트에서 열리는 ‘피크닉 시네마’, 평창돌문화체험관 주차장에서 열리는 ‘바위공원 야외상영’, 월정사에서 열리는 ‘월정사 시네콘서트’ 등으로 자연을 느꼈으면 한다.

강원 지역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난 것 같다. 영화인의 기대와 도민의 기대가 꼭 같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올해 영화제에서는 어떻게 의견을 조율했나.
영화제가 소위 ‘지역 돈을 가지고 영화인만 놀고먹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되지 않나. 영화제라는 것이 마니아 아니면 보기 힘든 수준의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자체와 함께하는 특성도 있는 만큼 도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했다. <라라랜드>와 <비긴어게인> 같은 영화를 배치했고, 강원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평화 아카데미’ 참가자를 사전 모집해 이미 정원을 다 채웠다. 도민설명회를 다니면서 (영화제가 열리는) 평창군 대관령면과의 접점을 찾아 더 밀착하려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2017년 강원영상위원회 초대 위원장 자리에 올랐고 2019년부터 평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경력도 꽤 된다. 창작자이기도 하지만 공적인 성격을 띤 기관에서의 역할도 잘 해내는 것 같다.
그동안 내 능력보다 훨씬 큰 왕관을 썼다.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디라는 말도 있지만… 이 왕관은 왜 이리 무거운지.(웃음) 당초 강원영상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건 넓은 땅덩어리인 강원도 어딘가에 영화 촬영 세트장을 만들고 싶다는 작은 꿈 때문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 남양주종합촬영소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 그 정도만 돼도 영화계에 작은 공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다가 평창영화제까지 오게 됐다. 영화 연출하듯이, (일단) 해보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구나! 싶다.(웃음) 영화제 일을 해보니 그동안 부산, 전주처럼 지자체로부터 비용을 받는 영화제들이 자기 정체성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알겠더라.

관객은 <오로라 공주> <집으로 가는 길> <메소드> 등을 연출한 감독으로 더 잘 알고 있다. 당초 연극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태백산맥>(1994) <301 302>(1995) <수취인불명>(2001)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은 여자 배우가 감독 데뷔를 한 거다. 여자 배우가 상업영화 감독이 된 경우는 최은희 이후 내가 두 번째일 것이다. 처음 연출을 했을 때 큰 깨달음이 있었다. 배우는 일단 자기 연기만 잘하면 되지만 연출은 미술, 음악, 촬영, 배우, 심지어는 날씨의 역할까지 잘 조율해서 무엇 하나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잘 완성되도록 조율해야 하더라. 한 편의 영화가 그 모든 이들의 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 세상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당신의 새로운 연출작을 기다리는 대중도 많을 텐데.
계약까지 갔다가 ‘파토’난 작품이 두 개쯤 된다.(웃음) 지금은 계속해서 개발중인 시나리오도 있고, OCN 드라마 연출도 준비하고 있으니 새 작품을 내놓기까지의 시간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 상황이다. 다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영화는 한 편이 정말 잘 되면 한 편 정도나 더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젊은 감독도 많고… 캐서린 비글로우가 내 롤모델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 수준까지 다다르지는 못한 것 같다.(웃음) 아무래도 감독보다는 배우의 수명이 더 긴 것 같다.



최근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세리 엄마’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끄덕끄덕). 처음에는 낯설었다. 내가 손예진의 엄마 역이라고?(웃음) 깊게 생각하면 못 하겠구나 싶어서 단순하게 생각했다. 해보고 나니 연기가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님들이 오랜만에 연기를 할 때 왜 예민해지곤 하셨는지 알겠더라.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참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감독이 된 이후로는 ‘감독 됐다고 무서워서’ 배우로 캐스팅을 못 하겠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한동안은 나 스스로 연기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지막 라운드를 뛴다는 생각으로 연기도 해보려고 한다.

최근 촬영한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지난해 영화가 끝나자마자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촬영 현장으로 갔다. 거기서 소위 ‘힐링’을 경험했다. 그 경험이 나한테는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준익 감독 영화에 누가 되면 어떡하지, (설)경구와 내 아들 역할 변요한에게 누가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컸다. 나도 내가 그렇게 소심해질 줄은 몰랐다.(웃음) 그런데 이준익 감독님이 용기를 줬다. 촬영을 하다가 “방 감독, (연기 느낌) 왔어!” 하는데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난 역시 연기를 해야 되는 건가?(웃음) <사랑의 불시착>에서 우아한 귀부인 역할이 어색해서 힘들었다면(웃음) <자산 어보>에서의 쪽지고 주름살 진 내 얼굴은 참 좋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음… 꽃이 피고 지는 걸 볼 때. 올해는 마당에 꽃이 엄청나게 피었다. 벚꽃, 백일홍, 목련이 피고 지고… 외롭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자연을 보고 하늘의 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행복하냐, 아니냐를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룻밤을 자고 났을 때 어떤 잎사귀가 이만큼 자라난 걸 보면 우주의 섭리가 이렇게 엄청나구나, 실감한다.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사진_ 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년 6월 18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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