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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하나 하나가 쌓여 건물이 완성되듯... 건축학개론
ldk209 2012-03-15 오전 10:47:28 29515   [4]

 

벽돌 하나 하나가 쌓여 건물이 완성되듯... ★★★★

 

제주도 집을 설계해달라고 15년 만에 불쑥 회사로 찾아온 서연(한가인)을 본 승민(엄태웅)은 애써 당황함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를 대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작품인 서연의 집을 설계하고 짓게 된 승민, 함께 집을 짓는 동안 둘 사이엔 15년 전 풋풋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만 간다. 건축학개론 첫 수업에서 만난 바로 그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으로.

 

<건축학개론>이란 제목은 첫사랑이 시작되어 그 감정들이 쌓여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비유나 은유만이 아니다. 영화에서 과거의 첫사랑은 건축학개론 첫 강의에서 시작해 종강으로 끝을 맺으며, 현실에서 다시 만난 둘의 추억 여행도 서연의 집을 설계하면서 시작해 완공과 함께 끝이 난다. 첫사랑, 추억 그리고 건축은 동일한 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이다. 특히 건축학개론 강의는 그저 둘이 만나게 된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의 만남을 이어주는 동시에 사랑의 설계도,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둘은 건축학개론의 안내를 받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서서히 쌓아나가는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배경은 94년일 것이다.(<기억의 습작> <칵테일 사랑>의 발표년도) 솔직히 94년이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이걸 추억, 노스탤지어로 소환해야 할 시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삐삐라든가 시디플레이어가 생경하고 낯선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 이유 등으로 여전히 여기저기서 사용하는 있는 기기들 아닌가. 이건 어쩌면 2004년에 1986년의 첫사랑을 추억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한국 로맨스 버전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영화의 구조는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마치 벽돌을 쌓듯 하나씩 하나씩 쌓여 올라간다. 감정이 쌓이고, 추억이 쌓이고,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쌓아간다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야기가 단절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건축과 출신인 이용주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면서 동시에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했을 때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의 결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대게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순간의 이미지, 감정의 떨림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현재는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 적극적으로 추억을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확인하지도 않는다. 현재는 같이 지내는 시간 동안 우연히 겹쳐지는 과거의 추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력한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도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의 중심, 관객의 관심은 과거에 주로 집중될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기본적으로 누가 이제훈과 수지의 러브 스토리 대신 엄태웅과 한가인의 러브 스토리에 더 관심을 가지겠는가.

 

우린 모두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가 있다. 그 때의 떨림과 설렘은 언제나 다시 돌이켜봐도 가슴을 촉촉하게 만드는 애달픔이 깃들어 있다. 첫사랑. 상대의 별 것 아닌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해하고 좌절했던 그 나날들. 장난처럼 던진 얘기에 상처받고 혼자 힘들어 했던 그 시간들이 영화 <건축학개론>에 애틋하게 담겨져 있다. 승민은 친구 납득이(조정석)에게 얘기한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남녀가 별 것 아닌 일로 만나 가까워졌어. 이유가 뭘까?” “둘이서 기찻길 놀이를 하고는 손목 때리기를 했어”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어” 친구의 반응처럼 제3자가 들으면 유치하거나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나 말이지만, 당사자에겐 그 얼마나 심오한 사랑의 떨림인지.

 

사실 난 한국 멜로 영화에 기본적인 불신이 팽배한 사람 중의 하나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우연의 남발과 과도한 감정의 표출이 그러하다. 그럴 거면 일본영화처럼 아예 판타지로 빠지든가. 이런 차원에서도 <건축학개론>은 긍정할만하다. 물론 무리한 설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대표적으로 후반부 승민의 엄마가 오래된 티셔츠를 입은 장면은 너무 오버했다. 그 정도 지났으면 아무리 근검절약하는 사람이라도 그 티셔츠는 걸레로 형태를 변환하지 않았을까) 대체로는 수긍이 가는 그럴듯한 설정에 감정을 분출하기보다는 담백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억지로 쥐어 짜내는 영화의 반응이 즉각적인 대신 빠른 시간 내에 휘발된다면, <건축학개론>은 뒤늦게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이 아린 감정을 동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의 연기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니 최소한 못했다고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그 중에서 수지는 외모부터 행동까지 학창시절 한 번쯤은 떠올려볼만한 전형적인 판타지로서 남성관객의 가슴에 화살을 날렸다면, 아마 이제훈은 이 영화로 뭇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한 단계 솟구쳐 오를 것이 확실하다. 영화가 과거에 중심을 두고 있고, 거기에 승민의 시각과 감정이 핵심이므로 젊은 승민은 누구보다 연기가 중요한 배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남자인 나까지도 안타깝게 만들 정도로 90년대 중반 사랑에 빠진, 아직은 어설프고 풋풋한 대학 일학년의 방황과 아픔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해 내다니,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한 명 더 덧붙이자면 납득이 역의 조정석. 정말 물건이다.

 

※ 90년대 중반이 배경이므로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시디플레이어가 둘의 사랑과 추억에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거기에 당시 패션이라든가 삐삐같은 소품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데 생각보다 활용도가 많지는 않다. 특히 삐삐는 당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 기기인 데 반해 영화에선 별로 활용되지 않는다.

 

※ 다른 건 둘째 치고, 한 동안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듣고 다닐 꺼 같다. 곁들여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과 015B의 <신인류의 사랑>까지.

 

※ 수지가 한가인으로 성장한 것도 의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내성적이고 조용하던 이제훈이 15년 뒤 껄렁껄렁한 엄태웅으로 성장한 건 미스테리할 정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자들만 득시글대는 건축과 생활을 오래 하면 저렇게 변하게 되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 대체로 얼굴이 두꺼워지긴 하지만.

 

※ 이 영화 디테일이 아주 좋다. 대표적으로 현재 시점의 서연이 승민의 선물을 사기 위해 상점에 들렀을 때, 직원이 “신상품이십니다”라며 물건에 높임을 사용하는 장면 같은 것들.

 

※ 영화를 보는 내내 과거의 친구 조정석이 현재 잠깐이라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현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 작년 9월에 제주도 올레길 5코스를 갔다 왔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바닷가와 등대가 보이는 것 아닌가.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분명 내가 지나간 5코스에 있는 장소가 분명했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영화촬영은 아마 10월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어쩐지 만약 영화에 나온 그런 건물이 길가에 있었다면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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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2012, Architecture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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