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적 서스펜스를 기반으로 한 <추격자>는 장르적인 감상에 입각한 작품이지만 그 언저리에 남는 여운은 여타 비슷한 동음의 위치에 놓인 작품들과 이의적인 감수성으로 기억될 것 같다. <추격자>가 기반으로 한 장르적 연출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의 이면을 조명한 세태에 대한 시선을 메타포로 끌어들인다.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줄을 선 도심을 바라보며 시작하는 <추격자>는 뒷골목의 시커먼 생태를 기반으로 삶을 꾸리는 누군가의 피폐한 습성을 먼저 드러낸다. 그 뒷골목은 <추격자>의 행위를 채우는 도그마의 통로이기도 하다.
추격의 골자를 이루는 두 인물에서 포커스를 차지하는 건 <추격자>라는 제목처럼 뒤를 밟는 자, 엄중호(김윤석)다. 전직형사출신이지만 보도방을 운영하며 불법안마영업을 하는 그는 분명 타락한 하류인생의 전형이다. 동시에 그에게 뒤를 밟히게 되는 지영민(하정우)은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절대적인 악의 원형이다. <추격자>의 추격은 선과 악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성격이 다른 악의 격돌로 이뤄진다. 다만 그것이 후천적인 체득이냐, 선천적인 발현이냐의 차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캐릭터를 마주할 관객의 체감지수가 차별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극의 진행과 함께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의 차이도 제각각 다르다.
엄중호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사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비열함을 남에게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다혈질 인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영민은 자신의 악한 본성을 포커페이스로 숨기며 타인의 방심에 기생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핸디캡에 의해 거세된 욕정을 비뚤어진 방식으로 채우는 인간이기도 하다. 두 인물은 형태가 다른 악인이다. 두 악이 격돌하는 건 일단 지영민이 엄중호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에게 물질적 상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진한 영업적(?) 오해로 출발했던 엄중호의 추격은 근본적인 태생이 다른 지영민의 악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이 자신의 삶에 뿌리를 내린 필요악을 박멸시킬 정도로 악랄한 재능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근본적 지점이 다른 악의 위치는 추격의 위치에 선 두 인물의 전후 관계형성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이자 <추격자>의 본질을 완성하는 의욕의 첫걸음이다. 선과 악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건 그것을 자처하는 이들의 본성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 <추격자>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현실을 추격이라는 선상에 배치하며 논리를 세운다. 악이 만연한 도시에서 필요악과 절대악의 관계는 추격하는 자와 추격당하는 자의 위치를 정하는 차악과 차선의 기준이 된다. 결국 <추격자>는 장르를 창작자가 지닌 사회적 시선을 전시하는 창으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결국 <추격자>에서 중요한 건 ‘추격’보다는 ‘자(者)’, 즉 행위보다는 인물이다. 그리고 좀 더 명확하게 그에 해당하는 인물은 엄중호다. 그는 그림자에 몸을 숨겼을 뿐 그림자를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엄중호의 추격은 지영민의 그림자를 밟아가는 과정이자 자신이 몸을 맡겼던 그림자에서 이탈하는 과정이 된다. 물론 <추격자>는 그의 심리적 추이를 살펴보건대 지난한 추격과정을 개과천선의 내러티브로 적용하는 영화는 아니다. 엄중호의 변화는 악의 교화가 아니라 찌든 세파 속에서 잠식당한 인간성의 회복에 가깝다. 자기 성찰의 고백을 통하지 않아도 비열하며 냉정했던 엄중호의 표정이 절실하고 묵묵한 결의로 거듭날 때 자신의 허물을 벗은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 변화는 놀랍지 않지만 묵묵한 응시를 거둘 수 없게 만든다.
좁고 다양한 형태의 골목에 동선을 채우는 초반의 추격전은 긴밀한 공간을 활용해 강약의 리듬감을 형성하고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의 순환을 조율한다. 특히 그 이전에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지영민의 가학적 폭력성은 객석에 심리적인 상흔을 남기고 이는 극 말미까지 위태롭게 과녁처럼 내걸려 있다가 돌아오는 가학적 충격과 맞부딪혀 파편같은 혈흔을 튀며 무기력하게 부서진다. 긴밀했던 한차례의 추격전 뒤에 돌아오는 지난한 공방전은 결국 파괴적인 악의 본능을 막아서지 못하고 분주히 뛰던 남자의 절규를 낳는다. 엄중호의 뜨거운 추격이 지영민을 법의 울타리에 귀속시켰음에도 부패한 권력에 치이고 무능한 실태에 갇힌 제도는 다시 그를 사회로 방출한다. 무능과 부패의 연결고리에서 제도는 악을 방생하고 이는 결국 가까스로 회생한 생의 의지를 비웃게 만든다. 이런 세태의 아이러니는 지영민과 또 다른 지점에서 엄중호를 차악으로 몰아간다. 사악한 악의 종마가 날뛸 수 있는 건 환경의 요인 덕분이기도 하다. <추격자>는 악의 근원과 함께 완전한 사육이 이뤄지는 현실을 비꼬는 작업인 셈이다.
사실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과 접점을 지닌 영화다. 미치도록 잡고 싶은 범인을 쫓는 형사들은 여전히 최첨단 과학수사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고 발로 뛰는 아날로그식 수사를 답보한다. 또한 범인이라는 확신을 눈앞에 두고도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회유와 알력의 원시적 수법을 동원한다. 또한 결말부-결말이 아닌-의 심리적 허탈감은 두 영화가 지향하는 구조적 관점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닮아있다. 하지만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범인을 향해 ‘밥은 먹고 다니냐’고 말하는 박두만과 달리 체제로부터 이탈'당한' 엄중호는 지영민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그건 자신의 영역 침범에 대한 응징으로 눈이 멀었던 엄중호가 자신으로부터 이탈되는 인간성을 먹고 자란 악의 실체와 맞부딪히게 됐음을 인식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 남자의 거친 추격은 통쾌한 장르적 쾌감보단 허탈한 현실적 비애를 지독하게 각인시킨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간 추격자의 모습은 여전히 사회의 구조적 딜레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그건 똥물을 뒤집어써도 각성하지 못할 체제의 부조리와 차악이 횡행하는 사회적 생태계가 일회적인 악의 처단만으로 갱생시킬 수 없다는 먹먹한 절망감이 깃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본능으로 캐릭터를 소화한 것처럼 보이는 김윤석과 하정우의 연기는 가공할만한 인상을 남긴다.
2008년 1월 30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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