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의 미화된 황진이를 잊어라! 그녀를 재해석한다.
수도 없이 연극과 영화 등으로 극화 되었고, 수도 없는 작가들이 황진이의 소설과 전기를 써왔다. 무엇보다 TV시리즈 "황진이"가 인기리에 종영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영화 [황진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모르는 황진이의 삶이다. 조선시대에 대표되는 여성상으로 많이 거론되지만 그녀의 태생은 정확지가 못하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조차도 모른다. 다만 중종시대에 살았고, 단명한 당대 최고의 명기라는 것, 그 밖에 몇 수의 한시나 시조가 전해 내려올 뿐이다. 직접적인 역사자료에 근거한 삶의 증거는 거의 없고, 몇몇 야사(野史)에 의존한 것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일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일화들을 약소하게만 가미시키면서 구색만 맞췄을 뿐, 기존에 알려진 황진이의 삶과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대중적인 황진이와 작가주의적인 황진이를 모두 보여주려다 보니 산만하고 임팩트도 약해서 자칫 밋밋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드라마로서는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영화 [황진이]는 재조명이 아니라 재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 송혜교의 황진이 연기는 합격점?
황진사댁의 별당아씨 진이, 그리고 송도삼절로 손꼽히는 기생 명월! 1인2역이라면 그렇다고 해주고 싶은 이 배역을 영화계에 갓 발을 내딛은 송혜교가 열연했다. 아무래도 황진이 영화이기때문에 그녀로 분한 송혜교에 이목이 집중된다. 초반에 양반신분으로 사는 진이의 자태는 송혜교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하지원 황진이의 포스가 너무 강해서 송혜교 황진이가 약해보일지 모르나, 전혀 다른 황진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스캐스팅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다. (솔직히 유지태와는 안 어울린다) 하지원의 화려하고 매혹적인 매력은 떨어지지만, 송혜교만의 고귀한 기품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처연한 듯 보이면서 당찬 면모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황진이에 적격이었다. 게다가 선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카메라의 이동은 송혜교의 자태를 맘껏 뽐내니 어찌 반하지 않을쏘냐? 신분변화를 겪으면서 미묘한 감정기복을 표현한 연기도 그럴 듯 했고, 두 차례의 농도짙은 애정씬을 잘 소화해 냈으며, 기생 명월이로서의 벽계수 농락씬은 도도한 매력을 맘껏 발산하는데 충분했다. 영화라는 짧은 매체에서 여러 감정연기를 두루 섭렵한 송혜교, 이 정도면 합격점으로 봐줘야 하지 않을까?
● 창조된 캐릭터! 유지태의 놈이는?
놈자들이 판치는데, 또 놈이다. '이놈'도 아니고 '놈이'라, 참 아이러니한 이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진이를 사모하고, 기생 명월의 기둥서방으로서 죽을 때까지 든든한 보디가드로 나온다. 산 위에 올라 멀리서 황진사댁 별당을 굽어보곤 하는 놈이의 모습 속에서 한량없는 듬직함이 느껴졌다. 비록 어리석은 행동으로 별당아씨를 한순간에 매음굴로 찾아들게 하지만,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화적으로 거듭나면서 의적으로서의 늠름한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역적의 몸이지만 영웅의 기상을 가진 놈이다. 서민들의 입장에서 양반에 맞서는 놈이는 양반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웃어 제끼는 명월이와 닮아있다. 놈이의 존재는 영화 [황진이]만의 캐릭터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황진이보다 놈이에 포인트가 맞춰져 스토리가 진행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놈이의 비중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지태의 연기는 워낙 정평이 나있고, 기존에 보여준 것에 비하면 놈이 캐릭터는 평범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싶다. 오히려 류승룡의 유수영감 캐릭터가 더 와 닿았다. 명월이의 마음을 빼앗아 보려는 사또와 그를 든든한 뒷배로 이용하며 조롱하는 명월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꽤 매력적이다.
● 장윤현 감독의 대중성을 잃은 작가주의적 영화!
처음에는 100억 블록버스터라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장윤현 감독이 [접속], [텔미썸딩] 이후 흥행 면에서 제대로 한 방 터뜨리겠구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기대를 엄청 했지만, 기대했던 부분에서는 실망을 했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그 기대를 충족해야만 했다. 겉치레를 모두 걷어붙인 [황진이]가 탄생했다. 이미 극적인 요소에 길들여지고 부풀만큼 부풀어 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향상심에 빗대어 볼 때, 본인의 짧은 식견으로는 이토록 애잔한 내러티브나 플롯으로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섰다. 황진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운 전기드라마를 전면배치하기에도 앞전에 얘기한 것처럼 TV "황진이"의 입김이 아직 시들지 않아 보인다. 결국 작품성은 일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100억이라는 제작비가 무색해 질만큼 대박흥행을 바라기에는 미안한 영화로 보인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한국적인 전통의 맛으로 정평이 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예상치 못한 흥행을 한 것처럼 [황진이]도 무더운 헐리웃 블록버스터 시장 통에서 한국적 블록버스터만의 고유한 멋을 살리기를 기대해본다.
● 탁월한 미술과 의상 그리고 세트와 배경까지...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것은 몰라도 연말시상식에서 미술의상부문은 [황진이]가 꿰차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을 품었다. 수수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미술표현이 돈 안 들이고는 형용할 수 없는 자태였다. 100억이라는 제작비 정말 어디에 다 들어갔나 이해가 될 정도다. 처음 [황진이]의 티저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원색의 화려한 TV "황진이"와는 달리 무채색의 옅은 눈빛의 송혜교의 모습은 또다른 황진이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했다. 영화를 본 후의 느낌 역시 비슷했다. 어찌보면 화면연출이 어둡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흑과 백이 어울려진 무채색의 화면처리는 굉장히 소박하면서 아름다웠다. 오히려 화려하지 않은 것들이 송혜교 황진이와 잘 어울렸고, 기생 명월이 되었을 때에도 최대한 원색의 화려함을 피하고 옅은 느낌의 기품을 뽐낸 것이 여러가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고 보여진다. 기생의 춤과 노래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그 마음은 서민들의 삶과 걸음걸이를 같이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묵빛이 더욱 서민적이라 느껴졌다. 한국전통의 멋을 살린 줄무지장행렬씬, 상여씬, 전통혼례씬 등도 여러모로 멋드러졌고 익히 알려진 북한배경의 촬영 또한 돋보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장관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설원 속 하얀도포를 입은 황진이의 모습은 만물상을 방불케한다. 어찌보면 결말의 감정선이 [스캔들]의 끝맺는 정서와 그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 TV '황진이' vs 영화 '황진이'
원작부터가 다른 두 황진이다. 원작에 불충실하면서 시청률을 위해 미화된 황진이가 TV "황진이"다. 하지만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설정된 모든 것이 극의 작품적 위상까지 높여놓았다. 그만큼 웰메이드 시리즈임에는 분명하다. 반면에 원작에 충실하면서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드라마를 꾸려낸 영화 [황진이]는 전자의 것과 확연한 차이를 둔다. 전자의 황진이는 화려한 춤사위와 구성진 악기연주를 통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면서 교방간의 흥미진진한 경쟁구도까지 갖추고 있다. 허나 후자는 무기(舞妓)나 악기(樂妓)로서의 황진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아니 오히려 그게 진실일지도 모른다. 보여주기 위해 미화된 그런 것들보다 어쩌면 후자 쪽 황진이의 삶이 진정 그녀의 삶은 아니었을까?
● 황진이(하지원)는 황진이(송혜교)에게 쥐약
하지원의 황진이는 송혜교의 황진이에게 쥐약이나 다를 바 없다. 분명 다른 느낌의 황진이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시도가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거부감을 들게 할 것 이기 때문이다. 하지원의 황진이만 먼저 방영되지 않았더라면 영화 [황진이]의 행보는 더욱 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악영향을 주고, 편견으로 사로잡히게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만큼만은 [이터널선샤인]의 ‘라쿠나‘에 보내 기억을 지우거나 아니면 [기억이 들린다]의 기억은행에라도 잠깐 이전기억을 맡겨놓게 해주고 싶을 정도다. 지금까지 미화된 황진이 모습을 상상하는 분들의 '황진이는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은 이 영화에서 독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 선입견에 사로잡혀 진정 이 영화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할 분들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을 여과하고 감안하여 볼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안타까울 따름이다.
●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황진이!
사람사는 세상 못 갈 곳이 어디있으랴? 하지만 분명히 있다. 수많은 제약으로 인해 지금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많다.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고 사람 자체를 두고 재어보는 불합리한 제약이 넘쳐난다. 하물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으랴. 이 영화는 그 제약으로부터의 탈피를 말하고 있다. 수많은 황진이가 표현되었지만 이것만은 변치 않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솔직히 놈이와의 애틋한 애정보다도,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드라마적인 요소가 아닐까싶다. 담장 안에 가두기에는 너무 비범했던 황진이, 그 문턱이라는 경계를 넘었으나, 현실의 늪은 차디차고 질척거리면서 빠져들 뿐이었다. 신분차, 성(性)차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낙원을 꿈꿨던 한 여인네,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 여인이라는 카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또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황진이]를 남성우월주의에 반기를 든 페미니즘적 영화로 매도할 수도 없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본 성찰극이라 해두자. 그것과 함께 언제나 부당한 제약 없이 진정한 자유를 꿈꾸는 서민적인 애환까지 그리고 있다. 놈이가 서민들을 이끌고 떠나려 했던 낙원, 그 섬을 생각해 볼 때 정현종 시인의 '섬'이 떠오른다. 소통하기 힘든 현대인들의 외롭고 억압된 감정선이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실컷 비웃고 싶어 했지만, 결국 세상의 발 아래 짓눌려 신발이 되어야만 했던 여인의 삶이 있다. 비록 천민의 몸이었지만 여왕의 혼을 가진 여인이다. 어쩔 수 없이 바닥을 드러내야 했지만 낙원을 꿈꿨던 그 여인의 묵빛 인생은 늘 도원경(桃源境)을 바라며 사는 우리네들의 삶과 닮아있다. [황진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황진이를 나타냈다고 말하고 싶다.
2007년 5월 25일 금요일 | 글_배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