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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교수의 영화와 정신분석 - '수취인 불명'과 '1850년 단두대 비극' 또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수취인 불명, 1850 길로틴 트래지디 | 2001년 6월 4일 월요일 | 서울대 교수(비교문학) 고원 이메일

[수취인 불명]이라는 제목은 좀 이상하다. 영화의 내용에 따르자면, 주인공의 엄마는 미국으로 돌아간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일이다. 주소가 더 이상 맞지 않는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편지는 매번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수취인 행방불명"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행방불명"이라는 말은 한국전쟁을 상기시킨다. 미군 주둔은 한국전쟁의 결과이다. 영화를 보면 대문 앞에 매장된 군인들의 시체가 우연히 발견된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채 한국전쟁 당시 매장되었다면 그들의 존재는 아직도 행방불명의 상태일 것이다.

"수취인 행방불명"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영화의 끝에 가면 마침내 미국으로부터 편지가 오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와 아들이 둘 다 이미 죽었기에 그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 길은 없다. 편지가 미국의 그 남자로부터 온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수취인 불명' 집도 없이 폐차 처분된 버스 속에서 살다 죽은 두 모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읽혀진다. 대부분의 관객이 "수취인 불명"을 자기 나라로 돌아간 미군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말겠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수취인 불명"은 죽어버린 두 모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수취인이 불명이고 한국에서도 수취인이 불명인 편지가 있다면 그 편지의 발신인은 이 영화의 감독 김기덕뿐이다. 엄마가 편지에 동봉하고자 아들의 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들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싫어한다.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데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아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 엄마를 아들은 마구 때린다.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폭력이 문제이다. [섬]에서도 끔직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관객들이 그런 장면을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일삼아 그런 장면들만 일부러 골라 찍어댄다.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영화 안의 상황 그 자체보다도 영화 안과 밖의 상황이 함께 중요성을 획득한다. 김기덕은 [수취인 불명]이라는 제목의 영화로써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관객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편지로써 조용히 혼자서 선전포고의 패를 내놓고 있다. 관객들은 아직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감독이 어찌 물러설 수 있겠는가. 이제 김기덕 영화의 새로운 장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맥에서 [수취인 불명]에 나오는 제3의 인물에 주목해보자. 그는 바로 개를 잡는 인물이다. 보신탕을 즐겨먹는 한국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아주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나 미군부대 주변의 별 볼일 없는 그 작은 동네에서도 그는 가장 무시당하는 남자이다. 이름도 무시당한 채 아예 '개눈'으로 통한다. 활터의 시퀀스에서 그런 그의 처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개집 주인으로서 주인공의 주인이고 남자로서 엄마의 애인이다. 그는 주인공인 창국을 개 패듯이 팰 수 있는 주인이다. 관객의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려놓은 짐칸이다. 그것은 개를 가두어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개를 사러 갈 때면 주인공은 바로 그 비어있는 짐칸 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간다. 그리고 개를 사서 짐칸에 넣고 돌아올 때면 그는 혼자 오토바이 뒤를 좇아 뛰어 갈 수밖에 없다.

김기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독의 손아귀에 잡힌 관객들은 '좁은 짐칸'에 갇혀 답답함을 느낀다. 개장수의 개와는 달리 관객은 영화관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온다. 감독의 거칠지만 능숙한 솜씨와 비교하자면 관객의 수준은 한참 뒤에 처진다. 그런 관객의 수준은 개를 잡지 못하고 쩔쩔매는 창국이쯤 될 것이다. 감독의 눈은 카메라의 눈보다 더 차갑다. 영화에서 개눈이 왜 개눈인가? 카메라의 렌즈를 빌리고 사는 감독이 바로 그 개눈이다. 개눈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영화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진기를 들고 나온다. 개눈이 여자한테 꼼짝 못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개눈은 시선만 가지고도 사나운 개를 압도한다. 감독은 카메라의 눈을 빌려 관객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사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개눈은 어쨌든 개눈 때문에 개눈이다.

개눈이 권총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는 내리막길을 간다. 권총의 힘을 빌리면 개를 빨리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개를 빨리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몽둥이질이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창국이가 개한테 몽둥이질을 불사한다. 창국이를 통해 관객은 못된 '개눈'한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학증이 가학증으로 바뀐 셈이다. '좁은 짐칸'인 영화관에 제 발로 들어갈 때부터 사실은 얻어맞을 준비가 된 상태이다. 얻어터지면서도 제 발로 다시 기어 들어가는 창국이가 관객이다. 그리고 권총 대신 몽둥이를 물려받는 것이다. 개를 두들겨 패다가 개눈을 두들겨 패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개눈은 비참하게 죽는다. 개눈이 죽으면 속이야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창국이 개눈의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몰고 가다가 논두렁에 곤두박질하며 처박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개눈/감독이 죽으면 영화는 끝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가리가 논에 처박힌 상황은 개 잡던 개눈이 그 현장/단두대에서 죽었을 때 이미 예견된다. 단두대는 대가리만 잘라버린다.

1789년부터 혁명을 겪은 1850년의 프랑스는 사람잡던 단두대가 아직도 시퍼렇게 날이 서있던 시대이었다. (영화 끝날 때 들리는 화자의 설명에 따르자면 섬에 설치된 단두대는 이미 녹이 슬어 도끼로 살인자의 목을 마저 잘라야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애가 없는 부부이다. [수취인 불명]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모자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제3자는 개눈이었다. 이 영화에서 제3자는 범죄자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살인죄로 붙잡혀 단두대의 사형을 선고받는다. 같이 붙잡혔던 범인은 사고로 죽는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섬에는 단두대가 없어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단두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제3자는 주인공 여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교화를 받는다. 단두대가 마침내 도착하고 그는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범죄자에게 너무 많은 호의를 베풀었던 주인공 남자인 대위는 소환 당하여 총살당한다. 범죄자의 인간성을 신뢰한 자기 부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말하자면 그는 월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사건의 전개가 특이하여 재미있는 영화이다. 주인공 여자는 '마담 라'로 불린다. 남편이 대위이이기에 그 부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프랑스 정관사 '라'를 사람들이 명사 대신 줄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수감자인 제3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부인을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부인을 보호한다. 그는 죄수를 보호하는 일보다 부인을 보호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세 사람의 관계에서 결국 살아남는 사람은 여자 혼자뿐이다. 그녀는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영화의 화자 역할을 맡는다. <수취인 불명>에서도 남자 둘은 먼저 죽고 여자가 혼자 마지막 뒷정리를 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위의 행동은 그 자체의 성격보다도 영화의 화자와 연관된 행동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삼각관계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다 죽는 일은 드물다. 대위를 견제하는 섬의 총독은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산다. 노인은 아들보다도 현명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부자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처음의 살인 사건에서도 두 젊은 남자가 좀 나이든 남자를 살해한다. 그는 돈이 많고 몸집이 큰 남자로 묘사되고 있다. 좋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상과 나쁜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상이라는 양가감정이 대위의 심리에 잠재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죄수는 단두대가 도착하기 전에 섬에서 도망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다. 대위 또한 총살당할 줄 알면서 살기 위한 다른 길을 찾지 않는다. 두 남자는 비슷한 유형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갓난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섬으로 들어온 남자가 단두대의 집행관으로 결정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가족에게는 좋은 아빠/남편이지만, 주인공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쁜 남자이다. 그는 폐쇄적이며 부정적인 권위와 타협한다. 주인공 남자들은 '녹 쓴 단두대'로 상징되는 옛 권위에는 크게 반발하면서도 그 반대의 새로운 권위는 받아들이고 있다. '마담 라'가 바로 그 권위의 상징이다. 영화의 화자로서의 마담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영화의 화자가 바로 영화의 권위인 것일까?

2 )
ejin4rang
수취인불명이다   
2008-10-17 08:40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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