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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쇼킹! '아일랜드'에 관한 몇가지 보고서
2005년 7월 19일 화요일 | 최동규, 이희승, 최경희 기자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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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는 더 이상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오락성이 강조된 허구의 소재가 아니다.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인간복제에 관련해 무수한 영화들을 접해봤지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처럼 충격적인 작품은 과거에 없었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한 인간복제의 과정이나 설정이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보다 리얼해서가 아니라, 근래 우리의 관심이 여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나 볼만한 일들이 현실 세계에서 속속 재현되고 있는 시점에서 ‘링컹6-에코’의 복제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은 곧 실현될 이 놀라운 과학기술에 철학적 사유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준다. 어디선가 인간복제가 벌써 실현됐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있는 의심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고작 오락영화일 뿐인데 우린 너무 오버해서 영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해보지만. 불안감만큼은 쉽게 떨치기 어렵다.

한 편의 거대 스펙터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 ‘인간복제’에 관련해 영화라는 한정된 매체 안에서 몇 가지를 골라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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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인간 복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여러 가지 요소들로 나뉘어 찬반을 논하고 있으며 종교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아일랜드>는 이러한 찬반 논쟁 그중에서도 종교와 상업적인 측면에서 인간 복제 즉 클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간 복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봐도 줄기세포 복제로 세계적인 영웅으로 불리는 황우석 교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눈을 돌리면 특정 종교에서 주도하는 인간 복제에도 응모자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여러부분에 대해서 깊게 혹은 얕게 여러 부분에서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본 기자는 영화기자이지 과학 기자가 아니라는 것. 인간복제 혹은 생명 공학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아일랜드>를 통한 인간 복제에 관한 짧은 생각들을 정리 해 보았다. 영화 속에서는 거의 완성된 인간 복제를 통해 클론이 대량 생산 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까지의 현실에서의 인간 복제는 줄기세포 복제까지 이루어진 상태다. 일부에서는 같은 의미로 보는 시선도 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인공수정에서 조금 발전해 조금 더 안정적으로 인공 임신이 가능하며 불치병의 치료 가능성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는 정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아일랜드>는 인간 복제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강조 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또한 불치병 치료를 위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한 어떠한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어 실망스럽다. 영화 속 인간 복제는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 주었던 상업적 접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인간 복제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과학자의 피조물이자 실패한 프로젝트이다. 단지 클론도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던져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복선을 위한 장치로만 작용할 뿐 그리 큰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 <블레이드 러너>란 영화를 보면서 인조인간의 슬픈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추억이 있다. 사실 그런 감정을 원하기도 했다. 무엇인가 인간 복제에 대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길 바랐다. 줄기세포 복제는 인류의 희망이다.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최후의 가능성이며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업적인 이윤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게 된다면 <아일랜드>의 주된 내용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미 우리는 획기적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들이 상업 논리에 자신들의 이기주의에 훼손 되고 철저히 유린당하는 모습들을 보아 왔기 때문에 영화 속 내용이 십분 이해가 된다.

다른 어떤 생각을 한다 해도 바뀌지 않는것은 불치병 치료를 위한 연구, 가진자들을 위한 특정한 연구가 아닌 대중들을 위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 디스토피아로 비추어지는 영화 속 세상은 유토피아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인간 복제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접근하고 종교를 아우르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우선 되어야 한다.

사족을 달자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여 혹은 정부관계자들이여 부디 제발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이용하려 하지 말고 외국처럼 체계적인 연구 환경 조성과 가족에 대한 완벽한 경호 그리고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보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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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농업혁명'을 '제 1의 혁명','산업혁명'을 '제 2의 물결','정보혁명'을 '제 3의 물결'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제 4의 물결'은 무엇일까? 많은 과학자들이 제 4의 물결로 '유전자 혁명'을 꼽는다.

사실 인간복제 연구로 확장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유전자 복제'는 우수한 가축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복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이유는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대립되기 때문이다.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치료의 목적'으로 인간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종교계에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인간복제를 반대하고 나선다. 인간 복제에 관한 영화는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실험이 성공되기 전부터 영화 속 인기 소재였다.

영화에 나타난 인간복제는 크게 인조인간이 나오는 <블레이드 러너>, <터미네이터>,<스타워즈 에피소드>와 복제인간에 대한 <6번째날>,<임포스터>,유전자 변형으로 복제연구에 대한 회의를 담은 <가위손>,<프랑케슈타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복제를 다룬 영화중에서 기계인간, 안드로이드를 제외한 몇몇 작품들을 열거해보겠다.

● <여섯번째 날(The 6th day)>

지금은 주지사가 되어있는 왕년의 근육맨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성공한 조종사로 나오는 영화로 불법적인 인간 복제가 벌어지는 미래 세계를 그렸다. 깜짝 생일파티를 기대하고 집에 들어가던 아담 깁슨(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은 이미 가족과 생일 파티를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모든 생물체의 복제는 가능하지만 인간 복제는 불법으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그와 닮은 '클론'의 출연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불법적인 복제 기술을 이용해 권력을 노리는 집단과의 피할수 없는 전쟁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신코딩'이란 기술을 이용해 유전자는 물론이고 기억마저 복제. 어떤 사람을 복제해 인공자궁 속에서 기르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죽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간직한 그 사람을 되살려 낸다. 수백갤런의 물에 떠있는 미숙아들은 인간복제의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빌딩숲 사이로 번쩍이는 전광판 광고가 새롭게 다가왔던 <블레이드 러너>를 볼 당시만 해도 우리가 전광판을 보며 축구응원을 하고 돈만내면 사랑고백을 할수 있을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1982년 리들리 스코트감독이 만든 <블레이드 러너>는 복제인간들의 불행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2019년 제 3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지구는 환경오염과 자원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때, 자본가이며 과학자인 타이렐은 복제인간 레프리컨트를 만들어 우주 식민지 개척에 이용한다. 이들은 전투용, 노동용, 암살용, 위안용으로 구분되어 4년간의 수명을 지닌 노예로 살아간다.

하지만 레프리컨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하여 자기들을 만든 타이렐을 찾아가 수명연장을 요구한다. 창조자 타이렐로부터 거절당하자 그들은 타이렐을 살해한다. 블레이드 러너(해리슨 포드)를 구하고 죽어가는 복제인간의 마지막 대사,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순간들도 비 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사라지고 말겠지.이제는 죽어야 할 시간."(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 <가타카 (Gattaca)>

첨단 유전 기술이 발달한 미래의 인간 세계를 그린 도발적인 SF 영화로 인간의 앞날이 유전인자로 결정되어지는 21세기 사회를 담았다. 이 시기에는 아이를 낳아도 유전공학으로 분석하여 미래의 그 아이의 직업, 성격, 전과 유무까지 결정이 된다 .부모의 자연 임신으로 세상에 태어난 빈센트( 에단 호크)는 심장이 약해서 수영도 오래 못 하고 전과자가 될 확률이 높으며 하층 계급으로 살아가도록 운명진다. 이로 인해 소외당하던 빈센트는 수영을 못 하게 되는 것을 극복하고, 바다에서 죽은 것으로 하여 새롭게 유진(주드 로)으로 신분을 바꾸게된다.

그렇게 사회 엘리트였던 유진의 유전자로 머리카락이나 지문을 이용하여 엘리트로서의 신분을 얻어 우주 항공사가 되기 위한 교육도 받고,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도 얻게 되지만 점차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결국 모든 고난을 헤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빈센트는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로 떠나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이 소원을 이루었음에도 이렇게 씁쓸하고 착잡한 영화가 있을까. 영화의 헤드카피인 "인간의 영혼에 유전자는 없다" 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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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젤라즈니’는 플라톤의 이데아사상을 모티브 삼은 자신의 소설『앰버 연대기』에서 현재 우리가 인지하는 인간의 세계는 '앰버‘라는 실제(fact)세계의 ’그림자‘일뿐 진짜가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의 논리로 현실을 이해한다면, 우린 앰버의 ‘그림자’로서 앰버의 의지에 따라 무한 복제 또는 변형될 수 있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개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로저의 ‘포스트-SF’소설들은, 다양한 방면으로 미국문화에 영향을 미쳐, 미래를 상상함에 있어 현재까지 중요한 참고자료로 인식된다.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도 분명 ‘로저 젤라즈니’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인간욕망으로 인한 과학의 무한 진보는 벌써 ‘인간복제’에 성공했거나 성공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2005년 현재를 앰버라고 가정한다면 미래는 앰버의 그림자 세계다. 즉, 2019년이라고 설정한 미래시간은 불안감을 감소시키기 위한 안전장치일 뿐이다. 결코 영화적인 상상력이 만든 미래의 한 단면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앰버의 그림자 세계처럼 우리의 의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복사할 수 있는 미래 세계를 많은 SF소설가나 영화감독들은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사하게 드러나는 이들의 근시안은 현 사회에 대한 불안감과 환경오염, 그에 비례해서 커져만 가는 인간욕망에 대한 경고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강력한 메시아적 의지를 숨기려하지 않는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감독의 이런 자의식은 블록버스터라는 외피를 이용, 거대한 스케일로 리얼리티를 획득하려 한다.

스펙터클하게 몰아치는 과잉된 이미지들은 관객의 현실감각을 마비시켜 영화에서 주인공이 겪고 있는 온갖 모험과 사투들을 자신인 그런 것 마냥 소화해 버린다. 결국 감독이 그려내고 있는 미래의 모습들은 압도적 스케일로 볼거리와 ‘현실성’(관객설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낚아챈다.

할리우드 주류 감독들이 보이는 예언자적 자의식은 그렇다고 해서 결코 허무맹랑한 주장이거나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운한 소식들 앞에서 우리의 미래가 유토피아라고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를 받아들임에 있어 현실은 포스의 강력한 힘처럼 영화전반에 자신의 어두운 자화상을 투영하고 있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질이 로봇, 인간복제로 옮겨지면서 인류의 존재여부는 불확실해지고 이데올로기는 생존문제로 대체된다.

1977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에피소드4:새로운 희망>가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 쳤을 때, 영화의 밑바닥 배경에는 베트남전쟁 패배한 미국인의 상처 난 자존심이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미국사회가 전쟁패배라는 뼈아픈 현실로 인해 장밋빛 미래도 불투명해지자 백인사회의 불안감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암울한 미래가 현 사회를 상징했다면 루크의 반란군은 백인이 리더로 있는 (베트콩을 모델로 삼은) 게릴라 군대로써 무너진 자존심을 치켜세우는 형상이다.

영화가 구축할 수 있는 희망적 미래를 포장함에 있어, 미국은 백인남성의 스펙터클을 영화의 가장 큰 화두로 내세운다. 음울한 미래일수록 미국이 제시하는 영웅의 이미지와 테크놀로지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적극 개입된 할리우드산 SF영화는 굳건한 미국의 이미지를 주입한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고리로써 ‘문화다양성’(인종, 계급, 성정체성)의 욕구를 영화 안에 적극 개입시켜-미국이 해결할 수 없는-참혹한 미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작자 ‘필립K.딕’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블레이드 러너>는 지금까지 많은 SF영화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다국적 기업이 인간을 대신해 로봇을 생산하고 인간은 그로 인해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자본주의 논리가 획일화된 사회를 예견하는 악재로 떠오른 이상, 영화는 미래가 밝지 못하다는 식의 경고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인 증거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관객을 모으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성이 무시되는 가난의 고통과 전쟁에 관한 불안감은 영화를 통해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 정녕, 우리의 미래가 불운하기보다 해결되지 못한 난제들은 산더미인데 인간욕망은 거대해지고 자본의 이기주의가 개인의 삶을 잠식하기에 설득에 필요한 이미지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진보한 과학과 기술력을 앞세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을 갖고 인간의 의지력을 실험하는 영화 앞에서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현 체제에 관한 안도감과 더불어 위협감이다. 미래사회를 묘사한 SF장르는 이 두 가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안성맞춤'형 영화일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일련의 할리우드 거대영화들은 앞으로도 미국이 현재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권 내에서 이해되고 당분간 소비될 전망이다.

9 )
ejwl1
대충 쇼킹이라..제목을 대충 지은듯..   
2005-07-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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