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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면 얻지 못하고, 두드리면 열리지 않으리라
김기덕 감독론 | 2004년 3월 17일 수요일 | 문일평 이메일

*필자인 문일평씨는 현재 다양한 지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영화평론가입니다. LJ필름과 필름2.0이 공동으로 주최한 ‘김기덕 감독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1. 김기덕은 다시 태어났나

김기덕은 더 이상 논쟁의 표적이 아니다. 세상에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어김없이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던 그는 이제 평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조금 멀어졌다. <사마리아>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요즘 모두의 관심은 놀라운 기록을 작성한 두 영화에 쏠려 있다. 관객동원 규모에 비해 기형적으로 커다란 논쟁의 장을 만들어 온 김기덕 영화가 결국은 1000만이라는 저 거대한 숫자의 무게에 눌려버렸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김기덕 영화에 관한 논쟁의 구도가 매번 지나치게 유사한 양상으로 형성돼 왔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가 ‘이상한 영화’이며 태생적으로 센세이셔널리즘을 품고 있어서 항상 평자들과 영화 관련 매체의 먹이가 되어 왔지만, 그 낯선 세계는 끊임없이 똑같이 반복되며 거기에는 이제 별다른 비밀이나 수수께끼가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모두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 논쟁으로부터 손을 뗀 듯 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말하고 듣는 것은 같은 영화를 반복해 보는 일 만큼이나 따분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반갑게도 김기덕의 영화는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은 듯 하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두 편의 영화는 이전 영화들과는 확연히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안선>은 주인공인 강상병이 명동 한복판에서 총검술을 선보이며 분노와 광기를 터뜨리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반해, 그 다음 작품인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는 주인공이 깊은 산 속 호수 위에 떠 있는 암자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어 앉고, 최근작인 <사마리아>의 포스터는 성(性)적이면서도 성(聖)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나쁜남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데없이 복음성가가 울려 퍼진 적은 있지만 이렇게 김기덕이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제스처를 취한 적은 없었다. 김기덕은 이제 구원의 전도사로 전직을 결심한 것인가. 김기덕에 관한 논쟁의 열기가 식어버렸지만, 우리는 그에 관해 이미 결론지은 내용을 앞서 말한 맥락에서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2. 지난 줄거리

김기덕은 줄곧 밑바닥 인생의 소외감, 그리고 그것이 낳은 공격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독이었다. 데뷔작 <악어>에서부터 흥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나쁜남자>에 이르기까지 김기덕의 세계는 주변인으로서의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강 둔치를 배회하는 부랑자, 몸을 파는 창녀, 길거리 화가, 미군 부대 주변을 떠도는 혼혈아 등 주류 사회의 경계 밖으로 완전히 밀려난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뿌리 깊은 공격성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날카로운 칼날은 자신을 주변으로 밀어낸 데 대한 분노가 주조한 것이며, 생존마저 위협하는 좌절의 늪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연장이었다. 영화 속에서 김기덕은 그러한 공격성에 이르는 과정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동물적으로 그것을 직접 표출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파괴적인 분노는 끔찍한 장면들로 이어졌고, 이는 김기덕의 세계를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한편, 관객들로 하여금 그를 파격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로 오해하게 했다. 주로 영화 속의 인물들을 통해 이러한 공격성이 표출되지만, 종종 김기덕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관객들을 향해, 또 특정한 대상을 향해 들이대곤 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는 꽁꽁 언 생선을 남성의 복부에 꽂아 넣고, <섬>에서는 여성의 성기에 낚시 바늘을 집어넣으며, <수취인불명>에서는 자신을 낳아 준 모친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나쁜 남자>에서는 신문지를 날카롭게 말아 상대방의 복부에 찔러 넣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는 화면 밖에서 감독이 직접 입김을 불어 넣은 결과가 아닐까.

그런데 영화의 결론을 내려야하는 상황에서 김기덕은 매번 오락가락 해 왔다. 분노 섞인 가학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저들을 향한 보복에 성공한 후에 김기덕은 항상 어찌할 바를 몰랐고, 종국에는 화해와 자기파괴를 교대로 행하며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다. <악어>에서는 생존본능이 화해와 희생을 이겼고, <파란대문>에서 감독은 한여름 밤에 눈을 뿌려가며 어색한 화해를 강요하며, <섬>에서는 초월적인 상징으로 얼버무리고, <수취인불명>에서는 주인공의 몸을 난데없이 땅 속에 거꾸로 처박는다. 그리고 급기야 <나쁜 남자>에서는 창녀가 된 여대생이 모든 것을 끌어안기로 결심하고, 이때 화면 밖에서 복음성가가 울려 퍼진다.

영화의 앞부분은 똑같은 주제로 변주되는데, 결말만은 매번 이런 식으로 번복되었다. 공격성은 동물적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지만, 그 이후가 항상 문제다. 눈앞의 대상에 투사된 적을 향한 가학적인 ‘보복’은 성공하지만, 이제 주인공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지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폭력은 그 어느 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것은 안정된 결론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데다 오히려 인물들을 더욱 더 깊은 늪 속으로 이끌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김기덕은 자신의 말을 거듭 번복해가며 여러 가지 결론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억지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이쯤 되자 그를 옹호하던 평자들도 하나씩 김기덕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복’과 ‘번복’의 매너리즘에 빠진 김기덕은 위기에 빠진 셈이다.


3. 종교적인 키치

난처해진 김기덕은 결국 신에게 ‘구원’을 청한다. 공격적인 폭력으로 표출한 분노 뒤에는 항상 허무가 뒤따르고, 복수는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달은 김기덕은 구원의 전도사가 되기로 한다. 사실 앞서 진술했듯이 예전에도 김기덕은 구원에 대한 갈망을 노출한 바 있고, <나쁜남자>에서는 조금 어이없게도 복음성가마저 삽입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러티브 상 어떻게든 그럴듯한 결말을 만들어내기 위한 억지 화해의 도구에 불과했고, <나쁜 남자> 이전에는 그것이 ‘구원’이라는 거창한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벼랑 끝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자의 동물적인 외침이었다.

하지만 이 야생의 악어는 이제 흉측한 껍질을 벗어 던진 후 승복으로, 또 사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구원’을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눈앞의 절망과 좌절을 더욱 거대하고 절대적인 세계에 기대어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실제로 이는 모든 종교의 주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궁극적인 ‘본질’로 여겨지는 무엇인가를 들이대어 세속적인 힘과 질서를 압도하고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기덕이 구현한 불교의 세계에는 불교가 없다는 것이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암자에는 종교적인 판타지만 있을 뿐 거기에서 좀처럼 불교적 사유의 진정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동자승은 개구리와 뱀과 물고기에 돌을 묶어 그 미물들을 괴롭히는데, 곧이어 그는 노승에 의해 자신도 똑같이 돌에 묶이고 나서야 비로소 아무리 미물이라도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영화가 전하는 깨달음이란 대략 이런 성격의 것이다. 김기덕은 선승의 포즈를 취하며 ‘화두’를 던지지만 정작 그 내용은 어린 아이를 위한 동화에나 어울릴 만큼 빈약하다. ‘겨울’ 대목에서 김기덕은 직접 출연하여 돌을 몸에 묶고 산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합장을 하는데, 그러한 고행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무게도 없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세계의 겉모습을 흉내 낸 키치에 불과하다. 이는 김기덕이 너무 섣부르고 무리하게 불교를 영화 속에 끌어 온 결과다. 김기덕은 성실하고 꼼꼼하게 불교의 세계에 접근하지 않고 단지 그 외양만을 막연하게 감지하고 관객들에게도 똑같은 판타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술적인 성취에 대한 김기덕의 과도한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거대한 세계에 대한 거대한 진술이 위대한 예술성으로 이어지리라는 잘못된 계산 때문인 것이다.

결과는 욕심대로 되지 않았다. 사계절이라는 자연적인 순환의 구조를 인간의 삶과 유비적으로 연결짓고, 여기에 불교적인 포즈를 도입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규명에 도전하지만, 안타깝게도 김기덕은 손에 쥐고 있던 구원의 불씨마저 놓쳐버린다. 예전에는 ‘야생’의 악어가 벼랑 끝에서 외치는 ‘구원’에 향한 목소리에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지만, 이제 그는 자연과 구원을 지나치게 언어화하고 제도 속에 위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작 그가 내뱉는 ‘언어’에는 자연도 구원도 없다.

4. 자연과 구원의 딜레마

<사마리아>에서 김기덕은 한걸음 더 나간다. 그는 이 영화에 ‘바수밀다’라는 창녀의 이미지를 도입한다. 어떤 남성이라도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면 모조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빌려, 김기덕은 자연과 구원을 하나로 포개어 놓으려 한다. 즉 김기덕은 ‘섹스가 밥먹는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라 전제하고 섹스라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무효화한다. 그리고 이어서 섹스를 선교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즉 섹스라는 ‘자연’스러운 행위는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도구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사마리아인에 관한 은유를 덧씌우고, 또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과 자기희생을 통한 우정을 결부시킨다. 결국 영화는 섹스와 사랑과 구원과 복수와 희생과 사랑과 우정이 복잡하고 난삽하게 뒤얽힌 모양새가 되었다. 이 영화는 원조교제라는 구체적이고 민감한 소재를 도입했지만, 결국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같은 이유로 종교적인 키치로 전락하고 만다. 이 영화가 원조 교제에 숨은 추악한 욕망과 그에 관한 분노를 형상화하는 영화였다면 기본점수는 줄 수 있겠지만, ‘성녀’(聖女)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포스터, 그리고 그와 유사한 냄새를 풍기는 영화의 제목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종교적인 포즈가 지나치게 가볍고 막연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영화를 뒤덮고 있는 거품과도 같은 구원의 이미지를 걷어내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 영화는 결정적으로 자기 모순적이어서 설득력을 잃고 만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바수밀다의 이야기를 전하며 원조교제와 섹스에 대해 위태로운 상대주의를 취하더니, 후반부에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분노하는 아버지와 감정이입하게 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어느 장단을 따라야 할지 난처해진다.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막연하게 인용하고 기준 없이 서로 결합한 결과 이러한 또 하나의 '성스러운' 키치가 태어난 것이다.


5. 두드리면 열리지 않는다

어쨌든 김기덕은 이제 선교사가 되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힌 듯 하다. 이러한 전직(轉職)으로 그의 영화는 한층 고상해졌고, 그는 베를린에서 은곰상도 수상하게 되었다. 그의 포즈는 더욱 그럴 듯 해졌지만, 한편으로 그의 세계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나로서는 그를 옹호할 만한 근거를 더 이상 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해안선>이 개봉될 즈음부터 그의 영화를 옹호하던 이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좀 더 지켜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엉뚱한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예전에 그의 영화를 채우고 있던 동물적인 밀도는 온데간데없고 구도자의 깊은 사유를 담은 예술 영화인 양 포장하는 제스처만 남았다. 김기덕의 영화는 ‘순진한’ 영화였지만, 이제 영악하게 고준담론을 읊으며 자신을 포장하는 키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둘러싼 근사한 언어의 덫에 거꾸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럴듯한 포즈의 수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김기덕의 세계가 점점 앙상해지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김기덕은 이제 남대문 시장에서 헐값에 구입한 승복과 사제복을 벗어 던지는 게 좋지 않을까. 선교활동은 잠시 접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가 일부러 두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문은 조금이나마 열릴 조짐을 보였었다. 구하지 말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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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old
음.. 이 기사는 빈집 이전의 기사로군요. 해안선에서 끝난걸 보니.   
2005-02-07 17:59
cko27
대체적으로 김기덕 감독님 영화는 좋아하는데 사마리아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_-;;상까지 받은거였지만..ㅜㅜ   
2005-02-06 18:47
ann33
독창적이긴 하지만 너무 컬트적이라서 쫌 이해하기 어렵다.   
2005-02-03 14:05
maninam
나는 모든 인간에겐 다중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일관적이지 않다고 비판한 영화내용에 대해 나는 오히려 더 공감하는 편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이해하려 노력하기전에 감정에 벌써와서 '탁'하고 치는 뭔가가 있다. 글중에 나오는 '우리'라는 주어를 '나'라고 고쳤으면 좋겠다. 좋은 감독을 제대로 느끼고 담아낼 수 없는 평론가가 없는것 같다.   
2004-08-2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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