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꼬>의 미수는 모든 행동이 거침없고, 이기적인 여자다.
쿨한 여자다.(웃음)
그동안 해왔던 역할들과는 너무 다른데.
미수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들이대고, 하고 싶은 행동은 과감하게 실행에 옮긴다. 처음 미수를 연기할 때 과연 나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을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안에 있던 미수가 나오더라. 그냥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밖으로 끌어올린 느낌이랄까.
감정을 억눌렀던 <오직 그대만>의 정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중전과 달리 미수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통쾌했다.(웃음) <오직 그대만> <광해, 왕이 된 남자> 때는 너무 힘들었다. 감정을 억누르면서 연기를 하다 보니 현실에서도 괜히 이유 없이 우울했다. 미수는 일단 내지르는 성격이고, 뭔가를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동안 연기하면서 쌓였던 체증이 내려가는 듯 했다. 미수를 연기하다 보니 ‘굳이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야 되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달라진 내 모습에 주변 지인들도 당황했다. 돌이켜 보면 미수는 연기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좋은 영향을 미친 인물인 것 같다.
시나리오로 먼저 본 미수는 어땠나?
안하무인에 센 캐릭터였다. 회사의 권유로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인물 자체가 독특하고 신선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걱정되는 측면도 있었다. 듬성듬성 빈 곳이 많았거든. 연기로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 부분을 정기훈 감독님과 상의해서 메워갔다. 그러고 보면 감독님은 참 영민한 분이다.
어떤 면에서?
배우가 주도적으로 연기를 하게끔 만드는 분이다. 빈 곳을 채우려다 보니 많은 의견을 냈고, 감독님은 내 의견을 수렴했다. 어쩌면 시나리오상의 빈 곳은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감독님의 묘안이지 않았을까 싶다.
압박감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미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차근차근 빈 곳을 채워나갔다. 그래도 안 되는 부분은 현장에서 해결했다. 미수처럼 ‘까짓것 어떻게든 되겠지’하면서.
같은 여자로서 미수의 거친 행동이 너무 심하다 생각됐던 순간은 없었나.
없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주변에 미수 같은 여자도 있을 거다. 많지는 않겠지만.
미수에게 끌렸던 건 겉으로는 센 척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아픔이 있다는 거였다. 아버지에 대한 부재가 그것이다. 강일(고수)과 바닷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도중 의사가 된 이유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수가 현실적으로 보이더라.
사실 아빠 얘기가 아니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미수가 초등학교 때 병원에서 겪었던 의사 선생님과의 일화였다. 의사의 손에 쥐어진 청진기가 배에 닿았을 때 따뜻함을 느껴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미수의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듯 느껴졌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의사가 됐다는 미수의 이야기는 내 아이디어다. 아무리 미수가 현실성 없는 캐릭터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관객들이 미수에 공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강일에 대한 아픔은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만 미수에 대한 아픔은 바닷가 장면 밖에 없다. 아쉬움은 없나?
미수의 아픔은 강일보다 크지 않다. 미수는 아픔 때문에 센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기적인 아이다. 그러다 강일을 만나 깨우치고 사람 되는 거다. 미수의 관점으로 봤을 때 강일과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성장통과도 같다.
그간에 캐릭터와 미수를 비교했을 때 연기함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새로운 캐릭터를 맡을 때마다 나름대로 설정을 한다. 가정환경이나 성격, 행동 등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은 캐릭터의 모든 것을 상상으로 만들어낸다. 이번에는 일부러 인물에 대한 사전 작업을 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고 캐릭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트라우마가 꼭 있어야만 성격이 모나는 건 아니지 않나. 원래 모난 사람 많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좀 더 넓은 도화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좋았다. 절대 핑계는 아니다.(웃음)
영화를 보니 그동안 못 봤던 내 표정들이 보이더라. 신선했다. 익숙하지 않지만 새로운 얼굴을 찾은 느낌이랄까.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가 내 안에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돼서 기뻤다.
애초 미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일에게 접근한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미수는 어느 순간 강일을 사랑하게 된 거라 생각하나?
많은 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계기가 있어야 사랑을 하는 건 아니니까. 원래 시나리오 상에는 미수와 강일의 인연이 꽤 깊다. 강일의 아내가 수술했을 때 그 자리에 미수가 있었고, 횡단보도에서 갑자기 쓰러진 미수를 병원으로 데려다 준 사람이 강일이었다는 등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시작점을 굳이 따지자면 미수가 친구한테 “까짓것 진심으로 사랑하면 넘어오지 않겠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부터였을 거다. 그 말은 ‘이제부터 강일을 사랑할꺼다’라는 선언과도 같다. 미수가 의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무엇인가?
소방대원들이 물싸움을 하는 동안 미수가 강일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장면이 있다. 그 때 강일이 미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미수는 처음으로 강일의 눈을 피한다.
그런 장면이 있었나?
강일에 대한 미수의 사랑이 처음으로 표현되는 장면인데, 대부분 모른다.(웃음)
그러고 보면 미수는 은근 여린 여자다.
음… 여리다기보다는 귀엽다.
알고 있나? 인터뷰 내내 미수처럼 얘기하고 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미수가 내 안에 온 것 같다. 이제는 떠나보내야 하는데 아직 보내기 싫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작품을 해오면서 캐릭터를 놓아준다는 느낌을 몰랐는데, 이번에는 알 것 같다. 마음이 허하고 아쉽기만 하다. 사실, <반창꼬>를 시작하면서 미수에 큰 애착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에서 아무 생각 없이 강일을 만난 미수가 어느 순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 또한 어느 순간 미수에게 빠져 버렸다.
이 질문은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 보다 매니저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뒤에 있는 매니저를 향해) 실제 한효주는 누구에게 반창고를 붙여주는 사람인가?
(매니저)붙여줘야 될 것 같은 사람인데, 오히려 남들에게 반창고를 붙여준다. 자기 힘듦은 감내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 챙겨주는 편이다.
본인은 어떤 것 같나?
맞는 것 같다. 다 내 성격 탓이다.
자신의 아픔이나 힘듦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 성격인가?
그냥 보여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을 배려하라고 교육을 받아서인지 나보다 남이 먼저였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시작했더니 이제는 힘에 부친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나를 먼저 챙기려 하는데, 성격이 그러다 보니 잘 고쳐지지 않는다.
다른 인터뷰를 보니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반창꼬> 촬영이 겹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힘들더라. 겹치기는 처음이었는데,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한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기가 너무 어렵다. 중전을 연기하다가 미수를 연기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미수를 하다가 중전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힘들었다. 감정을 표출하다가 갑자기 억누르려 하니 뜻대로 안됐다. 목소리 톤도 문제였다. 중전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늘 이동하는 차안에서 중전의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반창꼬> 홍보와 차기작 <감시> 촬영이 겹쳤다.
이것도 못할 일이다. <감시>에서 여형사 역을 맡았는데 굉장히 차가운 인물이다. <반창꼬> 홍보 때문에 미수로 잠시 돌아갔다가 여형사로 돌아가려니 쉽지 않다.
그렇지는 않다. 그냥 미수보다는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다.
연말에는 <감시>에 올인 하겠다.
연말이고 뭐고 열심히 해야지. 30% 밖에 찍지 못해서 열심히 촬영 분량을 채워야 한다.
올해 두 편의 영화가 개봉했고, 연이어 한 편의 영화를 촬영 중이다. 2012년은 정말 바쁜 한해였다. 2013년은 어떤가?
<감시> 이후엔 별다른 계획이 없다. 2012년은 어떻게 하다 보니 바쁘게 활동한 것 같다. 지금 심정으로는 <감시>를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난해와 올해 필모그래피를 보게 되면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건 배우로서 성장하기 위한 담금질이라 볼 수 있다. 30대 때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그 나이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이 실제 나이보다 많았다. 연기하기 버거웠던 점이 있었다. 만약 30대가 넘어서 예전에 맡았던 역할을 다시 한 다면 잘 할 자신이 있다. 그 때가 되면 내 얼굴도 연기도 더 자연스러워질 테니까.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