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Sunset
'before sunset'.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단 하나다. 9년 전에 본 'before sunrise'의 영상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삶'에 대한 꿈만으로, 방황하던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나는 영화 'before sunrise'를 봤다. 그때, 영화에 대한 내 감흥의 영상이 너무나 뚜렷하여, 나는 오늘 이 영화를 본다.
9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이 저리 짧은 시간에 저리 많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꼭 토론장에 나온 사람처럼 두사람은 아주 지속적으로 대화를 한다. 그것이 조금은 위선적으로도 보이기까지 한다. 서로의 내심을 숨기고 한번 살펴본 후에 내심을 보이는 방법을 쓰는 것 같아서, 시간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은 자조적이 된다.
영화에서 보면, 두사람은 'before sunrise'의 말미인 '6개월'후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국은 만나지 못했지만, 왜 만날 수 없었는가에 대해 강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남자는 더더욱 그러하고, 여자는 가슴 조리며 그러하다. 가보지 않은 길이니, 그때 그들이 만났다고 해서 지금쯤 좋은 부부로 남아있으리란 근거는 있을 수 없다. 두 사람 다, 현재의 일상에 자신의 지난날의 아름다움에 동시에 서 있다.
그러면서도 'before sunset', 이 영화는 말미를 또다시 대중에게 본인 나름대로 이해하라고 한다. 당연히 남자가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서둘러 떠날 것인자, 아니면 이제는 더이상 놓칠 수없는 연인 곁에 머물 것인지, 영상을 앞에 두고 앉자 있는 관객에게 생각하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공항으로 가길 바란다. 아무리 9년전의 하루가 아름다왔다 해도, 그간의 시간을 극복하는데 몇 시간만에 두사람이 가까와지기에는 여러 어설픔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전에 놓쳤던 행운을 잡고 싶다면, 현실의 각자의 모습을 우선 다듬어야 한다. 현실을 무시한 사랑만을 얘기할 수 있는 나이가, 영화 속의 그들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의 뉴욕과 여자의 파리는 시간을 두고 서서이 가까와져야 함이 차후를 위해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공항으로 가길 바란다. 비록 그가 떠나는 모습을 여자는 자신의 아파트의 창가에서 바라보겠지만, 그게 일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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