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울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세상 속에선 말이다. 오직 아기에 대한 생각 속에서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 속에선 많은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혹독할 뿐이었다. 영화의 시선은 그녀가 보는 세상을 함께 보며 움직였다. 그 속에서의 장면들은 여과 없이 표현됐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냉정했고, 무관심했고, 그리고 차라리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 가득했다. 폭력과 외면이 만연된 사회, 그런 곳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영화는 냉혹하리만큼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소외된 인간들의 군상의 어느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속에 인간, 연약하고 위험하기조차 하다. 그렇게 그들은 위험하게 살고 있었다. 상처받고 자라난 어린 소녀의 산모가 된 모습은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장면이었고,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미 끝의 모습이 보여주는 듯한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그만 빛을 받고 서서히 일어서는 어린 산모는 과거에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했다. 영화 [귀향 (2009)]이 생각났다. 불행한 미혼모로부터 시작된 서사의 마지막이었던 비극적인 장면은 신에 대한 저항일 수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저주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아기의 불행이고 만 그 장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재생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과 소외로 빚어진 비극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일 수도 없고, 결국 버림받은 자들을 배려해 줄 수 없는 사회적 구조는 비극의 확대재생산만을 촉진시킬 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런 류의 비극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 영화는 [똥파리(2009)]의 또 다른 형제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폭력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한 어느 3류 깡패의 이야기는 비운의 가족으로부터 잉태됨을 사회적으로 이미 공유된 사실이 되고 말았다. 2009년도의 비극을 담은 많은 작품들은 올해도 그 형제자매들을 계속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도다리란 공간의 차별성을 사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바라보게 된 영도다리란 공간의 고통과 폭력성, 그리고 사회적 소외로 점철됐고 비상구 없는 그런 공간이었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결국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그런 버팀목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의 삶은 척박했고, 각박했고, 무서웠다. 그 속에서의 어린 산모는 그런 부정적 요소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만삭이 된 어느 어린 소녀의 모습은 사회로부터의 외면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입양으로 처리되고 있는 아기의 모습 속에서 형편없겠지만 함께 더불어 살면서 얻게 되는 가족의 행복조차도 미혼모에겐 사치스럽다고 인식되었나 보다. 그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추론이고, 그것이 생활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리라. 하지만 남겨진 아기의 엄마의 미래와 행복은 결국 사멸되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산모는 영도다리에 남겨진다. 산모였던 어린 소녀가 돌아간 곳은 역시 폭력과 외면이 넘쳤다. 누군가의 폭행에도, 불행에도 무관심한, 그녀가 사는 세상은 말뿐인 인간사회일 뿐이었다. 그냥 사람이 살 뿐, 그곳엔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도, 그리고 우정이나 관심은 결코 없었다. 그런 곳에서의 행복 찾기는 사치일 뿐이었고, 어쩌면 그런 것조차 없을 것이다. 동물과도 같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어린 소녀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대충 살면서 일본에서 새로운 일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친구의 선택이 더 옳아 보였다. 어린 미혼모의 무관심은 잔인했다. 어린 소년의 파괴에 무관심했고, 타인의 무관심했고, 타인의 죽음에도 그랬다. 그녀가 보고, 듣고, 그리고 살고 있는 그곳은 잿빛이 가득하고 차가운 겨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 것만 같다. 그녀는 자신의 아기를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육체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어머니였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느 가족의 한 일원이었다는 것을 생활하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통해 행복하기 힘들다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란 인연을 다시 회복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한 것이다. 영화는 아기를 찾으려는 그 순간 끝맺는다. 사실 이 마지막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하다. 그 다음의 스토리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을 고려한다면 결코 둘 다 Happy Ending이기 힘들다는 것을 그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아기를 다시 찾아온다고 해서, 영도다리로 상징되는 힘든 생활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영화의 울림은 이 때부터 시작이다. 사회의 냉대를 바꿀 수 있는 변화를 촉구한 것이기도 하고, 어린 학생들의 성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영도다리로 대표되는 불행을 잉태하는 특정의 공간이고, 이 공간이 점차 확대되는 한국사회에 대한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락하는 한국인들 상당수에 대한 불행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현실에 대해 자탄만이 흐른다. 한국의 건강성은 영화 속에 드러난 그런 사회처럼 몰락하고 있는 것 같아 영화의 참혹함이 다시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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