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 내의 폭력의 권리는 국가가 독점한다. 그 권리를 탈취해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신과 법의 지위를 찬탈하는 일이다. 누구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척도로 세상을 재단하는 일인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은 이 일을 해낸다. 그것도 자기만의 원칙 아래 그렇게 한다. 신장엔 신장, 혀에는 혀인 동해보복의 원리로 복수가 이루어진다.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는 법이 없다. 그리고 징벌을 내리고 복수를 한 이들은 자기의 혀를 자르거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속죄한다. 복수의 왕국을 떠받치고 있는 이 원칙과 화려한 스타일 때문에, 복수의 인과율은 쉽게 파묻힌다. 또는 관객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정신지체아가 자동차 번호판을 정확히 외워도(<복수는 나의 것>), 열렬한 포교의지로 가득했던 전도사가 뜬금없이 범인의 하수인이 되어도(<친절한 금자씨>), 우리는 복수의 왕국을 빛내는 곰팡이톤의 극적인 구조물만 보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복수를 하게 만드는 원인은 삼부작을 거치며 점점 순수해지며 악 자체에 가까워진다. 누나의 신장을 위해 했던 유괴(<복수는…>)에 비하면 자기도 모르게 한 소녀를 죽음으로 이끈(<올드보이>) 오대수의 잘못은 무책임하다. 금자(이영애)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 백 선생(최민식)의 잘못은 이유가 없다. 백 선생은 그저 돈 때문에 아무런 이유없이 아이를 납치하고 죽인다. 백 선생에겐 눈물이나 고뇌나 연민 따위가 없다. 매력없는 악당에게 복수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친절한…>에서 그가 돋보일 때는 영어로 금자의 말을 금자의 딸에게 번역할 때이다.
복수의 주체도 건조해진다. 금자의 13년 감옥생활은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광기를 부리던 독방의 현실감이 없다. 금자는 복수를 위해 13년간 치밀하게 동료 수인을 포섭하고, 복수계획을 완성한다. 금자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 눈물엔 소금기가 없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복수하는 기계에 가깝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금자는 참회와 속죄의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우리는 정말 금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금자는 실수하지 않는다. 동료 죄수인 마녀가 지나갈 길에 비누를 갈아놓아서 기어코 자빠지게 만들고, 출소 뒤 만난 빵집 동료를 복수의 행동대원으로 쓴다. 너무나 무섭도록 정확하게 집행되는 예정설 아닌가. 자기 영화를 패러디해 웃기면서 그 건조함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지만 박찬욱은 한발 더 나아가 공권력까지 금자의 발 아래 카펫으로 깔아둔다. 경찰은 묵묵히 커피와 녹차를 나르며 금자의 복수 현장을 뒤처리할 뿐이다. 복수의 인과율과 사회학, 그리고 인간적 연민 따위를 고려하며 이 영화를 즐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 생각없이 차갑게 즐겨야 하는 복수 삼부작의 디저트라고나 할까. 어쨌든 보기엔 즐겁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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