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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도 같은 작별 프레리 홈 컴패니언
jimmani 2006-10-18 오후 2:28:21 970   [6]

때때로 마냥 가볍게만 보이는 TV프로그램이 강산이 몇번 변하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얄궂은 TV프로그램의 수준을 넘어 역사나 전설의 한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종영된 <전원일기>, <수사반장> 등의 드라마들, <전국노래자랑>같은 프로들이 있을테고, 더 다양한 종류의 드라마, 오락프로들이 존재하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 수준까지 이른 프로그램 중에 내가 거의 유일하게 쭉 지켜본 프로그램으로는 시트콤 <프렌즈>가 있다. 비록 시작할 때부터 10년간 내리 지켜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10년 분량의 에피소드들을 몇번이고 다 봤다는 점에서 참으로 애착이 큰 프로그램이라 하겠다. 애청자로서 이 프로그램을 볼 때면, 이 시트콤 속 사람들은 배우들이 아니라 정말 그 아파트 안에 모여사는 한 무리의 친구들 같았다. 대본에 적힌 대사를 치는 게 아니라 정말 일상의 얘기들을 털어놓는 것 같았고, 그래서 마지막 집 열쇠를 남겨두고 집을 떠난 뒤에도 우리가 안보는 사이에도 그들은 카페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대중들 곁에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TV 프로그램은 그저 전파상자 너머로 보여지는 볼거리를 넘어 친근한 이웃, 가족같은 존재로 남기도 한다. 그건 그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라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들도, 출연진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미국 중부 미네소타의 세인트 폴이라는 작은 도시, 그곳에 있는 피츠제럴드 극장이라는 곳에서는 30여년동안 매주 빠짐없이 생방송 라디오 쇼인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열린다. 그러나 그런 3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마지막 방송을 해야 할 날이 온다. 방송을 내보내는 소규모 방송국 WLT가 텍사스의 큰 방송국에 팔리게 되고, 시대에 뒤쳐졌다는 판단에 따라 이 쇼 역시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중은 많이 몰렸고, 초대손님들 역시 많이 몰렸다. 제작진들과 사회자 게리슨 케일러, 그리고 초대손님들은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라는 걸 알지만 무덤덤하게 마지막 무대를 흥겹게 준비한다. 사회자 게리슨 케일러를 비롯해 자매 듀엣인 "존슨 걸즈"의 욜란다(메릴 스트립)과 론다(릴리 톰린), 욜란다의 딸 롤라(린제이 로한), 카우보이 듀엣인 더스티(우디 해럴슨)와 레프티(존 C.라일리), 피츠제럴드 극장의 경비 보안 담당을 맡은 가이(케빈 클라인)와 마지막 쇼를 시찰하기 위해 온 집행인(토미 리 존스), 불현듯 극장을 찾은 아스포델 천사(버지니아 매드슨)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쇼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흥겨운 무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최고 장기는 뭐니뭐니해도 누가 주인공인지 분간하기도 힘들게끔 수많은 배우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키는 군상극, 속된 말로 떼거리극이다. 그러나 <플레이어>, <숏컷>, <패션쇼>, <고스포드 파크> 등 그는 영화 대부분에서 이렇게 많은 배우들을 등장시켜놓고는 그것을 인간 내면의 허영, 그릇된 욕망 등 부정적인 요소를 풍자하는 데 중점을 둬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다. 여전히 그의 장기대로 메릴 스트립, 린제이 로한, 케빈 클라인, 우디 해럴슨, 존 C.라일리, 토미 리 존스, 버지니아 매드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무리지어 등장하지만 이들이 연기하는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모습은 알트만 감독의 전작들과는 달리 상당히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더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들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주목해야 할 점이다.

베테랑으로만 꽉 짜인 배우들의 진용은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바로 얼마전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본 사람으로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또 한번 탄성을 자아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보여줬던 냉혹한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고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상하고 푸근한, 하지만 가끔 욱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중년 아줌마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독특한 캐릭터와 이렇게 친근한 캐릭터를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명배우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그녀의 딸로 나온 린제이 로한은 대외적인 파티걸 이미지는 제쳐두고라도 이 영화에서는 다른 베테랑 배우들과 어울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준수한 역할과 연기를 보여주었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툭하면 사립탐정 기질을 뽐내는 경비 담당 가이 역의 케빈 클라인은 예의 진지한 유머감각으로 웃음을 안겨주었고, 다소 덜 떨어진 듯 보이지만 그만큼 사람좋아 보이는 카우보이 듀엣 우디 해럴슨과 존 C.라일리도 기분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후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토미 리 존스는 작은 비중이지만 연륜에 걸맞는 무게감을 보여주었고, <사이드웨이>로 알려진 버지니아 매드슨은 상당히 독특한 역할인 천사로 등장해 속내를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의 여인을 신비로우면서도 코믹하게 보여주었다.(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가 황당하게 웃긴다.)

이 영화에는 또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사회자 GK를 맡은 게리슨 케일러인데, 이 사람은 실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프레리 홈 컴패니언"(실제로 이 쇼는 아직 끝날 예정이 없다)의 사회자이자 이 영화의 각본을 쓰기도 한 사람이다. 시종일관 뚱한 표정이지만 편안하고 착착 감기는 목소리로 이 시끌벅적한 쇼를 활기 있게 이끌어간다. 시도 때도 없이 딴 말을 하고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다가 방송에 들어가면 다시금 프로 정신을 발휘하는, 정말 이 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연기(아니, 이 사람에겐 연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쇼에 관여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그런지, 이 영화가 단순히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극영화가 아니라, 한 쇼를 녹화한 다큐멘터리처럼 사실감이 확 살아나기도 했다.

앞서 얘기했듯,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통해서 냉소적, 풍자적인 시선을 유지해온 로버트 알트만이 이번 영화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감싸안는다. 정말 보는 내내 웃음이 입에서 떠나질 않고 연민의 감정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방송국 사장이 "늘그막에 이젠 좀 쉬자"면서 방송국을 팔았겠지"라고 말했듯, 여든이 넘도록 여전히 현역 활동을 해온 알트만 감독도 이제는 보다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을까. 이 영화에는 그런 노장 감독의 정겨운 웃음이 가득 차 있다.

이 쇼가 미국에서"만" 유명한 쇼라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한국 사람으로서 공감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별로 인기없는 컨트리 노래들이 많이 등장하고, 미국식 농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막상 보니 그렇게 큰 이질감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온 이들이 마지막으로 펼치는 작별의 무대라는 것이, 우리나라라고 해서 볼 수는 없을 것 같은 독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이웃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그들의 컨트리 노래들도 유독 포근하게, 또 아쉽게 느껴졌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상관없이,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것이 떠날 때의 안타까운 기분을 충분히 알기 때문일까.

사실 실제로도 존재하는 이 쇼는 아직 끝날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수십년동안 애청자 곁을 지켜온 프로그램도 언젠가는 작별을 고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영화 속에는 그런 상황이 가상으로 설정되어 펼쳐지는 것이고. 하지만 이들의 마지막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게 정말 마지막 무대가 맞는가 싶다. 사회자도 출연자도 마지막 무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안타까움과 슬픔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라디오는 비극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회자 GK는 마지막회에서도 어김없이 재치있는 멘트로 관중들과 청취자들을 즐겁게 한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지만 방송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밝게 나아간다. 어찌보면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싶지만, 그런 사람들 간의 오만가지 감정을 뒤로 하고 펼치는 그들의 활기찬 무대가 그래서 어쩌면 더 가슴 짠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들의 활기찬 무대는 단순히 생방송 라디오 쇼 이상의 가족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들은 쇼에 출연하기 위해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연습같은 걸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시로 삼천포로 나가는 수다를 떨기 일쑤고, 쇼 매니저가 진행에 애로사항을 겪을 만큼 이야기 보따리 풀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저러다 방송 때 실수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막상 방송에 들어가면 또 그들은 청산유수처럼 자신이 해야 될 대사, 불러야 될 노래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잘도 소화해낸다.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면서 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즐거움이 가득 담긴 웃음으로 그들은 방송을 파티와도 같이 생기있게 이끌어나간다. 이들이 방송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들의 방송은 단순히 현란한 기술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래 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들만의 호흡과 세월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렇게 이미 "쇼 출연진"의 의미 그 이상의, 어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어버린 이들 사이엔 작별이라는 것조차, 무정한 시간의 흐름조차도 별 것 아닌 것만 같다. 텍사스의 거대 방송국은 이 쇼가 이젠 시대에 뒤쳐진다는 이유로 없애버린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들에겐 오늘 마지막 쇼만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끝까지 관중들에게도 오늘이 마지막 무대라는 얘기를 꺼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여느 때보다도 더 활달하게 관중들과 청취자들을 즐겁게 하고, 자신들의 노래를 있는 힘껏 즐긴다.

그럼에도 이들이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 속에는 그래도 오래 곁에 있었던 것이 떠난다는 것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이 적잖이 묻어 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셨던 노래라면서 부르는 "스와니 강"(우리에겐 이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영화 속에선 생판 다른 가사더라)에서부터 시작해, 존슨 걸즈, 척 에이커스 등 오랜 시간 함께한 출연진들이 그 오랜 추억들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들은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동시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겹쳐 가슴 한 구석을 찡하게 자극한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서로와 호흡하며 한 무대를 만들어 온 그들에게, 이 쇼 또한 그렇게 결코 잊혀지지 않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냥 안타까워하면서 추억으로 떠올리진 않는다. 눈물 흘리지 않고 오히려 "그땐 그랬지"하면서 박장대소를 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자신이 처음 쇼 사회자로 발탁됐을 때의 이야기, 카우보이 듀엣이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 등 이 쇼를 둘러싸고 피어났던 수많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앨범을 보다 풍성하게 장식해나간다. 기분좋게 떠올릴 수 있는 추억들이 더 많이 생겨났기에, 언제든 다시 만나 그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꽃을 피울 수 있기에 그들은 작별조차도 축제와 같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가고, 수많은 방송프로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이런 시기에 20년, 30년동안 꾸준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어쩐지 좀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지킨 만큼, 더 짙은 자국과 깊은 추억이 우리들 곁에는 오랜 시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트만 감독은 경험많은 할아버지의 시선으로 얘기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마저도 다시 지상에 내려와 지난날 느꼈던 그 푸근함에 미소지을 만큼, 그 쇼가 사람들 마음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출연진들은 비록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일들을 하고 있을 지라도, 그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진한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텐데, 슬퍼할 게 뭐가 있겠는가. 쇼가 끝난 뒤에도 다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그들처럼, 만남이야 언제든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난날 어디에도 없을 멋진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었다는 것이지. 이 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이토록 오래된 만큼 지우기 힘든 행복과 애틋함을 남기는 "옛것"에 대한 포근한 찬가다. <프렌즈> 속 친구들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지금도 여전히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을 것처럼, 영화 속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식구들의 추억 역시 쇼는 끝났든지 말든지 여전히 웃음과 행복을 수놓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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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 A Prairie Home Compa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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