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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과학인데, 꿈도 과학입니까? 수면의 과학
jimmani 2006-10-28 오전 1:59:09 1114   [5]

작년에 학교 과제때문에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만 봐선 무슨 꿈해몽 서적같으나 읽으니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읽은 건 완전판도 아니고 그나마 얇게 요약한 버전이건만, 이건 무슨 암호처럼 알 수 없는 얘기들만 줄줄 쓰여있어 집중도 안되거니와 이해하기도 오죽 힘들어야지. 무슨 종류의 꿈이든 성적인 부분으로만 해석하는 걸 보고 "프로이트 이 사람 변태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맨날 잠자면서 꾸는 꿈이라는 게 사실 이 책처럼, 아니 이 책 이상으로 어렵고 알 수 없다. 꿈 속에선 논리도 개연성도 일절 먹히지 않는다. 현실에서 접하는 사람과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란히 있고,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 꿈 속에선 익숙하게 느껴지는 공간들이 수두룩하다. 꿈속에서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은 전개에 있어서 전혀 일관성이 없어 갈피를 못잡기 일쑤다. 지금 이야기할 영화 <수면의 과학>이 이렇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꿈과 같은 삶을 사는 청년의 이야기를 한다.

멕시코 출신의 청년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아버지와 함께 멕시코에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구해놓은 집에서 살기 위해 프랑스로 온다. 어렸을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는 스테판은 잠잘 때마다 늘 자신이 구축해놓은 꿈의 세계에서 흥겹게 노닌다. 꿈을 즐기는 사람답게 뭐든 새롭게 창작하는 데 소질이 있는 스테판은 뭔가 창작 욕구를 불사를 수 있는 직업을 원하지만, 어머니가 구해놓은 직업이라는 게 알고보니 달력회사에서 달력에 회사 로고 붙이는 전혀 머리 쓸 필요가 없는 일이지 않는가. 직업에 대한 잔뜩 불만을 갖고 일하던 중 그의 옆집에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라는 미모의 여인이 이사를 온다. 처음에 스테판은 스테파니보다 그녀의 친구 조이에게 호감을 갖지만 점차 그 호감이 스테파니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스테판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만큼, 그녀 역시 스테판처럼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에 끌리게 된 것이다. 이후 스테판은 꿈 속에서도 스테파니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며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막상 꿈 속에서의 스테판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스테판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선 많은 난관을 거쳐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스테판은 과연 꿈같은 상상을 현실로 옮겨올 수 있을까?

일단 남녀주인공 배우들의 면면이 흥미롭다. 더구나 이 배우들을 바로 전작에선 대단히 우울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봐온지라 더욱 그렇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아모레스 페로스>, <나쁜 교육>,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바벨> 등 출연작 대부분이 대단히 심각하고 무게 있는 영화들이고 그가 맡은 역할 역시 진지하거나 우울한 캐릭터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의 그런 고민하고 번뇌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 그는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순수한 청년이다. 자신의 창의력을 주체하지 못해 "1초 타임머신"같은 웃음이 절로 나오는 발명품을 만들고, 꿈 속에서도 그런 창의력의 바다에서 맘껏 헤엄치는, 그야말로 한창 창작의 욕구를 뿜어낼 때인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매번 고민하는 진지한 청춘만 연기했고 그게 또 익숙하게 느껴졌는데, 이 영화에서 아이처럼 천진하게 상상의 바다를 헤엄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또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샬롯 갱스부르 역시 기존의 청순하고 연약한 캐릭터에 자유로운 감성의 발랄한 이미지를 더해 한결 밝아진 연기를 보여준다. 전작 <레밍>에선 분위기상 절로 가라앉게 만드는 진지한 연기를 보여줬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확실히 가볍고 발랄해졌으면서도 남자주인공의 이상형으로서 어느 정도의 "무게감"도 잃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연 캐릭터도 흥미진진하다. 특히 스테판이 일하는 회사 동료들의 모습이 굉장히 재미있는데, 겉모습은 전형적인 중년가장처럼 생겼으면서 온갖 야한 얘기와 생각은 다 하고 다니는 기, 게이 커플 혹은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놀림을 받는 남자 세르쥬와 여자 마르틴 콤비 등 아무리 상상력이 없는 달력 회사라고 한들 이 동료들의 캐릭터는 한없이 튄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전작 <이터널 선샤인>에서 우리는 기억이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단어가 이렇게 영화 속에서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물론 당시 각본을 맡은 찰리 카우프먼의 독보적인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미셸 공드리 감독의 자유분방한 영상구현 능력이 없었다면 그걸 제대로 표현하는 것도 실패했을 것이다. 기억과 머리 속이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공간에서 도피를 다니고 사랑을 속삭이는 독특한 풍경을 보여줬던 공드리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기찬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번 영화에선 특히 공드리 감독이 각본도 담당했는데, 사람의 꿈이라는 더없이 초자연적인 소재를 내세워서 그만큼 상상력으로 무장할 것이 요구되는 독창적인 화면들을 선보인다. 허공을 물속처럼 헤엄치는 모습, 도시의 풍경이 종이 판대기로 재현되어 인형극 세트처럼 나부끼는 장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스테판과 주변인물들이 뜬금없는 장소에서 뜬금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어울리는 장면, 꿈속의 스테판이 현실의 스테판을 관찰하는 장면 등 영화는 우리 머리 속에서 밤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꿈이라는 소재를 그만큼 괴상하리만치 독특한 분위기로 그려내고 있다. TV 방송국처럼 표현된 스테판의 내면의 세계와 애니메이션과 인형극, 컴퓨터그래픽 등 각종 독특한 기술들이 어우러진 영화 속 꿈의 세계는 그걸 보는 우리들도 뭔가 당혹스럽지만 기분은 좋은 꿈속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는 꿈을 꾸고 싶은 대로 꾸지 못하지만 영화 속 스테판은 정말 자기가 꾸고 싶은 꿈을 꾸는 듯하다. 영화 시작하면서부터 스테판만의 독특한 "꿈 제조 비법"이 등장한다. 익숙한 기억들, 장소들을 배합해 섞으면 원하는 꿈의 배경이 등장하고 스테판은 거기에 들어가 그 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들어간 꿈의 세계에는 스테판이 현실에선 쉽게 펼치지 못하는 내면의 깊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매번 꿍한 채로 반복되는 일만 해야 하는 직장도 그의 꿈 속에서는 그가 제일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손짓 하나로 세상을 마음대로 조절하기도 하고, 그때문에 회사 상사들이 그에게 설설 기며 시키는대로 하겠다 한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짝사랑의 대상인 스테파니도 스테판의 꿈 속에선 이미 절친한 연인 사이다. 늘 곁에 있어주고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부드럽게 건네준다. 꿈 속에서만은 스테판이 어디를 헤집고 다니든, 어떤 당황스런 말썽을 부리든 그가 왕이고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 잔뜩 활개를 치는 만큼 반대로 스테판의 현실은 극도로 소극적이다. 현실에서의 스테판은 역시나 꿍해 있고 소극적인데, 문제는 이런 가운데 그가 꿈 속에서 갖는 성격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종종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은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을 놓고 걸어다니기도 하고, 꿈 속에서나 용납될 법한 거친 말과 행동들을 현실에서 갑자기 막 표출하곤 한다. 그래서 한편으론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건 스테파니와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때로는 그만의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스테파니의 호감을 사게 하기도 하지만, 그의 꿈이 그의 의식을 둘러싸며 뱉어내고 있는 헛된 환상들이 때론 현실에까지 침범해 스테파니와의 관계의 실체 또한 왜곡시키기도 한다. 때문에 기껏 용기를 낸 스테판의 사랑이 꿈과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로 인해 다시 틀어지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스테판과 스테파니는 이름만큼이나 닮은 구석이 있고 그 정도가 얼만큼이든간에 똑같이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들로서 어딘가 연결될 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남들은 코웃음칠 "1초 타임머신"이나 "텔레파시 전송기"같은 것도 스테파니는 신기하고 대단하게만 여긴다. 가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스테판의 행동이 이해가 안갈 때도 있지만, 스테파니는 화를 내도 잠시 뿐 어느새 스테판이 잠자는 곁에서 함께 잠이 들어 있다. 어디까지나 꿈 속의 상상이었던 스테판의 사랑이 어느새 하나씩 현실로 옮겨지면서,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든 꿈처럼 사랑 역시도 그만한 불가항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 속에는 참 과학적인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스테판은 "PSR(평행적 동시적 임의행동)"이라는 고난이도의 단어를 구사하며 얘기를 늘어놓고, 인간의 수면 단계에 대한 얘기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얼핏 보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스테판의 모습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절대 그런 스테판을 꾸짖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스테판의 꿈 속에서만 뛰놀던 인형 "골든 포니"를 스테파니와 함께 타고 무한한 상상의 바다로 떠나듯, 때론 수면의 과학적인 단계 너머의 설명할 수 없는 경지에서 인간의 감정이 성장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지우개로 지우듯이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역설했듯, 이 영화에서도 과학적,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비논리성 혹은 비현실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날 겉으로 사랑해요 어쩌고 하면서 낯간지러운 대사와 상황들로 감성만 자극하려 하는 숱한 멜로영화에 질린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필시 꽂힐 것이리라. 분명 스테판의 알 수 없는 꿈 속처럼 영화도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얽히고설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영화는 우리마저도 스테판의 황홀한 꿈 속에서 함께 헤엄치고 있는 듯한 묘한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꿈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던가. 현실이 아니기에 몽롱하고 아리송하지만 고통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저 기분좋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 영화가 그런 느낌이다. 현실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고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논하는, 또 한 편의 독창적인 로맨틱 코미디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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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과학(2006, The Science of Sleep / La Science des r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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