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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보/푸우]잘 만들어진 단편소설같은 영화 순애보
killdr 2000-12-08 오전 1:34:16 1217   [4]
순애보...왠지 유치하고 아주 오래된 재미없는 그런 영화의 제목처럼 다가왔던 영화. 그러나, 순애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의 저 밑의,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나도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그런 사랑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일본과 한국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순애보라는 말의 아주 깊은 곳에 숨어있는 느낌을 잡아내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일부의 '실험적인 영화'로 그쳤다고 보기엔, 이 영화는 너무나 깊은 이야기가 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지만, 삶을 다 산것 같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동사무소 직원 우인. 그리고 죽기위해 숨을 참아보며, 날짜변경선을 넘어서면서 죽으면 사람들이 내가 언제 죽었는지 헷갈릴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재수생 아야.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 않지만,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일상에서의 모습을 그려내며 만나는 이야기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분들도 많지만,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의 과정을 겪어가는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이야기는 그 섬세한 묘사에 박수치지 않을 수 없다. 잘 쓰여진 소설 한편보다도 더 디테일한 느낌, 사람의 심리를 극단으로 끌어내는 연출, 화면, 연기가 이 영화에 있다.

우인의 삶을 보자. 그는 시골에서 "취미로 오리 키우는" 부모님이 물려준 커다란 집에서 혼자서 사는 말단 동사무소 직원이다. 그의 삶은 동사무소에서 발송하는 세금고지서, 전단지, 안내서 돌리는 일과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일이다. 그 일외에 그에게는 그저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성인 사이트를 보며 아무도 간섭않는 집에서 '자위'로 외로움을 달래는 일뿐이다. 이런 우인의 일상은 그저 단순하기만 한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먼저, 우인은 동사무소에서 고장난 남자 화장실이 아닌,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본다. 이 영화는 처음 장면부터 우인의 소변보는 장면, 그가 반한 미아와의 비오는 날의 장면, 그리고 어머니가 손을 꼭 보라고 했던 옥상의 물탱크가 터져 집안이 물바다가 되고, 화창한 밝은 날씨에 대비되는 집안에서의 비의 장면.....그렇게 많은 "물"이 등장한다.
그는 여자 화장실에서 빨강머리의 미아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다른 직원의 구역까지 맡아 나누어주어야 할 세금 고지서를 자신이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은 변기에 빠뜨린다. 그렇지만, 우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달동네의 길가의 난간에 그 노랗게 불어터진 세금고지서를 햇빛에 차곡차곡 널어 놓고는 그냥 계단에 앉아 저녁을 맞는다.

우인은 주민등록증을 만들러온 어떤 여동창을 만난다. 그 여동창이 하는 "China Town 건립기금 조성 바자회"에 유일하게 참석한 한국사람이 되어 버린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우인은 계속 술을 들이키고 (아마 굉장히 독한 '뻬갈'일 것이다) 마이크를 잡고 최신곡이라른 70년대의 노래를 부르다 취김에 쓰러져 버리고, China 드레스를 입은 그 동창의 애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위이외의 경험이 없던 그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잘 해"라는 여자의 핀잔만을 듣고 그리고, 술을 더 마시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호텔방에서 일어나 변기에 우악질을 해대고 남산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여자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채-어쩌면 우인은 순결한 남자인지도 모른다-집에 돌아왔을때 그를 맞은것은,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집안에 내리는 비일뿐. 이런 우연이 우인에게는 어쩌면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동사무소 직원인 주제에 고양이를 잡으러 나가는 것을 푸념하던 동료의 말처럼 "세상 다 산 사람의 표정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집이 망가지고 물이 흘러 계단으로 넘쳐도, 우인은 그것에 상관없이 그저, 인터넷에서 만나, 자신이 반한 미아와 비슷한 여자 '아키코'의 모습을 보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그 아키코를 보기 위해 만든 카드에서 돈이 무진장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인터넷에만 빠져있을 뿐이다.
그렇게, 일상을 무료함속으로 보내고, 특별하거나 중요한 일에는 정작 신경쓰지 못하는 우인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감독 스스로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인은 왼손 새끼 손가락의 감각이 없다. 그래서 스테이플러로 찍혀도, 호텔방에서 창문에 끼여 새끼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다른 사람이 말할때까지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핑계로 동사무소의 일에서 벗어난다. 새끼 손가락의 무감각. 새끼 손가락은 우인이 보고서 쓸때 꼭 필요한 손가락이다. 자판을 치기 위해서. 그러나 우인은 그 새끼 손가락때문에 모든 보고서가 "빠꾸"를 먹고, 어쩌면, 아무런 신경쓸일도 아닌 한여름으 땡볕에서 전단지나 돌리는 외근을 나가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무단 쓰레기 투기자를 찾는 일을 할지도 모른다. 우인의 삶은 그렇게 감각이 없는 새끼손가락과 다를것이 없다. 그저 우인에게는, 딸과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바람난 누님'이나, 결혼을 하라고 수없이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 한번도 우인과는 만날수 없는, 그리고, 자는데 전화하면, 전화선을 발가락에 감아 아예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그런 귀찮은 대상인 어머니 모두 관심밖이다. 그는 성인사이트를 보면서 마시는 캔맥주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아야를 보자. 그녀는 죽고 싶다. 재수 학원에서 우연히 들은 날짜변경선의 이야기를 듣고는 날짜 변경선에서 죽으면 사람들이 내가 죽은 시각이 오늘일지 어제일지 모르겠지 하는 꿈을 꾸는 소녀다. 그녀는 의지가 강해 스스로 숨을 참아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집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방법으로 생일날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여자. 그 방법으로 죽기 위해 돈을 벌려는 아야.

늘 갖고 싶던 루비 구두를 사느라 돈을 써버린 아야는 결국 인터넷 성인 사이트에 '아무것도 아닌, 옷입은 소녀' 아키코역을 하고, 그리고 우인에게서 메일까지 받게된다. 그러나, 역시 우인처럼 늘 비가 함께하는 그녀도 역에서 그 일해서 번 돈을 잃고, 정말 옷을 벗는 라이브쇼를 결심한다.

아야의 집은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긴 사는데 가족인지 의심스럽다. 아야는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 집을 팔아버리려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다. 남동생은 식탁에서도 등교길에도 만화책을 보고, 성인사이트를 접속하고, 누나나 아버지의 귀가조차 관심이 없는 학생. 아버지. 어머니에 눌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막차를 아슬아슬하게 탄 아야의 눈에 비친....지하철 벤치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댄채 잠든 아버지의 모습. 아침마다, 네 가족 모두가 사거리에서 잘가라는 인사도 없이, 서로 흩어져 가는 가족. 할머니의 집으로 곧게곧게 뻗은 작은 길을 달리는 아야는 그 할머니의 집 마루에서 잠들어 어떤 꿈을 꿀까?

아버지가 잠든 모습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던 아야. 역에서는 비가 내리고. 많은 사람들은 색색의 우산을 펼쳐들고, 각각 누군가가 맞아주거나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지만, 아야는 모자를 눌러쓰고 자전거를 타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할머니집을 담넘어 들어가고, 마루에서 잠들어 아침식탁을 차리는 시간에 집에 들어간다. 분명 걱정을 많이한것 같은 아야의 엄마는 끝내 한마디도 없다.

돈을 벌기위해 아르바이트하던 스포츠 센터에서 만난 여자. 이란 남자와 눈이 맞아 임신까지 했지만, 불법체류자로 끌려간 남자. 그 임신했다고 아야에게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 아이를 위해 다시 클럽의 댄서로 일하게 되는 여자. 이 모든 일들또한 미야에게는 일상일 뿐이다. 숨을 멈추어도 결국은 기절까지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야는 생일날, 자신이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루비구두만을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넣고 알래스카의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오른다.

우인은, 군대에서 보낸 남자친구의 편지를 버려 무단 쓰레기 투기를 알아냈던 여자의 이름을 골목마다 부르는 군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라이브 쇼에서 옷을 벗는 아키코의 모습을 보지않고 그녀의 얼굴만을 보았기에, 돌리던 전단지를 바람부는 날 자전거위에 올려놓고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오른다.

새끼손가락의 감각을 잃은 세상을 다 산것같은 27살의 남자는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오른다. 음성 메시지에 "엄마 고마와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숨을 참아 날짜변경선에서 죽겠다는 18살의 여자.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고등학교때 서울 수학여행때 미소짓기 캠페인을 하던 우인과 사진을 찍었던 경험이 있는 아야. 인터넷에서 '아키코'라는 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우인.
그 둘의 만남과 앞으로의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우연일까? 그저 일상이라는 것을 함께 같은 느낌으로 공유하고, 같은 방법으로 밖에 살아갈 수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이 작위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2000년 신세대의 사랑공식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광고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통한 두 사람의 인연-한쪽에서의 일방적인 느낌이긴 했지만-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같은 두 사람의 운명을 난 작위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장면장면 하나하나 모두가 각각 앞으로의 우인과 아야의 만남에 복선과 암시가 깔린 이 영화를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반대한다. 우인과 아야라는 두 사람의 심리 흐름이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화면에 묻어나기도 힘들 것 같다. 영화가 재미없다고?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일지 궁금해하면서 본 이 영화에 재미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없었다. 작고 치밀한 디테일 묘사가 영화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박수치면서, 또 내 삶또한 그 둘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것을 아주 살짝 비꼬아놓은 감독의 의도가 아주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두시간이라는 긴 상영시간동안, 감독과 배우가 일치되어 표현하고자 했던 그 둘의 마음을 읽을 자신이 있는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그냥 재미있는, 혹은 영상만 아름다운 영화, 혹은 눈물 짜내는 멜로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은 말리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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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보(2000, Asako In Ruby 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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