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사무라이>가 처음부터 지루한 것은 아닙니다.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가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상처 때문이지요. 상처 받은 자는 보는 이의 관심을 끄는 법이지요. 알그렌은 인디언 여자들과 아이들에게까지 총을 쏜 죄책감에 술주정뱅이로 살아갑니다. 그런 그가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가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막은 오릅니다. 돈도 돈이지만 미국을 떠나고 싶었을 거라고 이해합니다. 아직은 볼 만합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개화한 일본의 신식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훈련시켜서 개화에 반대하는 사무라이 잔당과 싸움이 되게 하는 것까지, 거기까지만 해 주고 뒤로 빠지면 그만인데, 그러면 영화가 거기서 끝나게 되니까 알그렌은 부득불 전투의 한복판에 뛰어듭니다.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그가 사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은 납득할 만합니다. 역시 상처 때문이지요. 상처가 깊어 괴로움이 크면 살기 싫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막상 죽을 고비에 이르면 손 놓고 당할 사람이 있습니까. 한사코 살아야지요. 알그렌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무라이를 죽이고 살아남아 포로가 됩니다. 아직은 말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가 일찌감치 찾아온 영화의 승부처라 하겠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고 매력 있으니까요. 낯선 세계에 갇힌 알그렌이 변하리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대충 짐작이 되고… 요는 그 과정이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흥미진진하고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일 텐데… 글쎄요, 낙제점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겨우 낙제를 면한 정도가 아닐는지요. 일일이 거론하면 한이 없겠고, 딱 하나만 예를 들까요. 사무라이 영주인 카츠모토(와타나베 켄) 말입니다. 아무리 적을 알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영어를 너무 잘 하지 않나요? 그럴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두 주인공의 의사 소통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빼고 얻은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감독이 서두른 게 아닐까요? 알그렌이 빨리 사무라이에 동화되어 다음 액션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 감독은 알그렌이 사무라이 마을에 머무는 그 부분을 영화의 승부처로 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적당히, 지루함을 던답시고 하이라이트로 편집해서, 말이 나온 김에 야구에 비유하자면, 투 아웃 만루에 풀 카운트까지 이르게 된 재미있는 상황들은 다 솎아내고 허공을 가르는 홈런 한 방이 다인 것처럼 공허하게… 이를테면 “마음을 비워라.” 같은 정신 못 차리는(No mind!) 멘트로 얼렁뚱땅 때우고는 넘어간 게 아닌가…
그런데 저는 곧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너무 편해져서 하품도 나오고 좌우도 두리번거리게 되고… 관객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도 영화가 힘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알그렌이 마을을 너무 일찍 떠났다고 했죠. 마치 활시위를 반쯤밖에 못 당기고 쏘아버린 화살과 같습니다. 아직도 한참 남은 영화의 후미를 감당할 힘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저는 알그렌이 깨달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이국 땅에서 몰락하는 무사집단을 위해 목숨을 걸게 할 만큼 그를 매료시킨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최후의 전투 장면은 볼 만했지만, 이 영화에서 꼭 봐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최후의 사무라이 카츠모토가 죽어가면서 남긴 멋진 대사가 영어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톰 크루즈(알그렌)도 이제 웬만한 일본어는 알아듣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