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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mind-'라스트 사무라이'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4년 2월 6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보는 심기는 편치 않지만 오락 영화로서는 수준 이상이다.’ 이 문장은 어느 일간지의 영화 전문 기자가 <라스트 사무라이>에 대해 쓴 것입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라스트 사무라이>는 오락 영화로서도 수준 이하라서, 다행히 보는 마음이 불편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심드렁할 뿐이지만, 톰 크루즈의 팬으로서는 심히 안타깝죠. 그가 나온 영화 가 이렇게 재미없기는 처음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따져보겠습니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처음부터 지루한 것은 아닙니다.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가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상처 때문이지요. 상처 받은 자는 보는 이의 관심을 끄는 법이지요. 알그렌은 인디언 여자들과 아이들에게까지 총을 쏜 죄책감에 술주정뱅이로 살아갑니다. 그런 그가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가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막은 오릅니다. 돈도 돈이지만 미국을 떠나고 싶었을 거라고 이해합니다. 아직은 볼 만합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개화한 일본의 신식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훈련시켜서 개화에 반대하는 사무라이 잔당과 싸움이 되게 하는 것까지, 거기까지만 해 주고 뒤로 빠지면 그만인데, 그러면 영화가 거기서 끝나게 되니까 알그렌은 부득불 전투의 한복판에 뛰어듭니다.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그가 사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은 납득할 만합니다. 역시 상처 때문이지요. 상처가 깊어 괴로움이 크면 살기 싫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막상 죽을 고비에 이르면 손 놓고 당할 사람이 있습니까. 한사코 살아야지요. 알그렌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무라이를 죽이고 살아남아 포로가 됩니다. 아직은 말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가 일찌감치 찾아온 영화의 승부처라 하겠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고 매력 있으니까요. 낯선 세계에 갇힌 알그렌이 변하리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대충 짐작이 되고… 요는 그 과정이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흥미진진하고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일 텐데… 글쎄요, 낙제점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겨우 낙제를 면한 정도가 아닐는지요. 일일이 거론하면 한이 없겠고, 딱 하나만 예를 들까요. 사무라이 영주인 카츠모토(와타나베 켄) 말입니다. 아무리 적을 알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영어를 너무 잘 하지 않나요? 그럴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두 주인공의 의사 소통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빼고 얻은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감독이 서두른 게 아닐까요? 알그렌이 빨리 사무라이에 동화되어 다음 액션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 감독은 알그렌이 사무라이 마을에 머무는 그 부분을 영화의 승부처로 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적당히, 지루함을 던답시고 하이라이트로 편집해서, 말이 나온 김에 야구에 비유하자면, 투 아웃 만루에 풀 카운트까지 이르게 된 재미있는 상황들은 다 솎아내고 허공을 가르는 홈런 한 방이 다인 것처럼 공허하게… 이를테면 “마음을 비워라.” 같은 정신 못 차리는(No mind!) 멘트로 얼렁뚱땅 때우고는 넘어간 게 아닌가…

확실히 알그렌은 사무라이 마을을 너무 일찍 떠납니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는 아니구요. 알그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카츠모토조차도 사무라이라는 존재와 그 정신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증거가 부족합니다. 이쯤에서는 보는 제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사무라이 마을의 일본인들과 알그렌이 기억하는 인디언들을 자꾸 병치시키는 감독의 속내가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런 게 아니죠. 미국 역사에서의 인디언과 일본 역사에서의 사무라이가 갖는 위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렇게 나란히 놓아서야 되나요. 그리고 수구파는 짱 멋진데 개화파는 왕 재수로 나오잖아요. 최소한 그렇지만은 않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서두에 인용한 기자의 코멘트가 반은 맞는다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곧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너무 편해져서 하품도 나오고 좌우도 두리번거리게 되고… 관객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도 영화가 힘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알그렌이 마을을 너무 일찍 떠났다고 했죠. 마치 활시위를 반쯤밖에 못 당기고 쏘아버린 화살과 같습니다. 아직도 한참 남은 영화의 후미를 감당할 힘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저는 알그렌이 깨달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이국 땅에서 몰락하는 무사집단을 위해 목숨을 걸게 할 만큼 그를 매료시킨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최후의 전투 장면은 볼 만했지만, 이 영화에서 꼭 봐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최후의 사무라이 카츠모토가 죽어가면서 남긴 멋진 대사가 영어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톰 크루즈(알그렌)도 이제 웬만한 일본어는 알아듣던데…

마침내 감독이 라스트로 힘준 장면이 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코미디였습니다. 이제는 천황까지 영어로 유창하게 정의를 선포하고, 용케 또 살아남은 톰 크루즈가 끝끝내 어설픈 사무라이 흉내를 내고 앉아 있으니, 정녕 사무라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그가 앓던 인디언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다는 말인가요? 이리하여, 상처와 변화와 소멸이라는 황금의 테마로 엮어낼 수 있었던 세련된 드라마의 오락성을 팽개치고서, <라스트 사무라이>가 성취한 것은 무엇일까요? 역사성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음을 상기한다면, 대답은 애석하게도 ‘nothing’입니다. 저도 심심해서 그냥 영어 한번 써봤습니다. 내친 김에 원 모어 타임, Please never mind this movie!

5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0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0
qsay11tem
잘 읽고 감   
2007-11-27 13:17
kpop20
기사 잘 봤습니다   
2007-05-18 23:10
imgold
저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요.. 한마디로 톰크루즈,,왜저랬을까,,,-_-ㅋ   
2005-02-0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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