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니라, 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봄 | 2003년 9월 19일 금요일 | 박우진 이메일

산 속 호수 위에 떠 있는 절 하나. 흐드러진 노랑 분홍 꽃망울이며 우거진 초록, 붉게 사무치는 단풍과 하얗게 시린 눈발까지 명징한 사계의 색채와 풍광이 머물다 가는 곳. 노승이 지키고 아이가 자라나는 그 곳. 이런 소담하고 수려한 자연의 이미지. 예전 김기덕 영화와는 사뭇 다른, 정갈한 풍경으로 펼쳐지는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봄>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람의 생을 순환하는 사계에 빗댄다.

영화는 총 다섯 개의 계절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각 단락의 초입마다 계절을 알리는 붓글씨가 떠오르고, 문이 열린다. 문을 통해 미끄러져 들어가면 비로소 암자에 당도한다. 그 곳에서 한 남자가 계절과 더불어 업을 지고, 욕망을 알고, 분노를 다스리고, 마음을 얻을 것이다. 속세를 마냥 떠도는 우리네 풍진 삶이 내려앉고 돌아서는, 전환점 같은 지점(혹은, 지점들)이다.

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를 ‘롱숏’의 영화라고 일컫는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클로즈업’의 즉물적 내지는 날것의 느낌이 <봄여름...>에는 없다. 대신 카메라는 관조한다. 고요하지만 눈을 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유한 화면이 담담하다. 제 아무리 치열한 인생사도 자연의 강렬한 아름다움(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세트와 미장센) 속에서는 누그러지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은근히 잔인한 아이의 장난질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소년의 욕망도, 벌컥 복받치는 청년의 분노도 두렵기보다는 가련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관점이 깊고 낮아졌다.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차마 그 눈을 곧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숙였던 고개를 살며시 드는 듯한 틸트 장면과 눈을 떨궈 암자보다는 물에 비친 암자의 그림자를 주시하는 시선. 태도는 조심스럽고, 관심은 내면으로 향한다. 소문대로 김기덕의 스타일이 좀 변했다.

문을 들고나듯, 여러 지점을 통과하며 남자는 자라고 늙지만 ‘사람’이라는 업은 차마 떨치지 못해 스스로에게 돌을 맨 채 산을 오른다. 아니 혹은, 그 업마저 받아들임으로써 겨울을 보낸다. 각각의 단락은 서로 단절되어 있고 이 남자는 매 단락마다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즉, 계절은 이어져 있거나 끊어지고 이 남자 역시 한 사람이거나 여러 명이다. 결국 그가 살아내는 하나의 이야기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모든 생을 대변하는 것이다. 굳이 배경과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 영화는 형식 자체로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다시 봄이 오고 이제는 지난 세월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듬은 채 풍경처럼 늙어 가는 남자와 지난 봄의 남자처럼 멋도 모르고 미물에게 잔인한 장난을 치는 아이가 남는다. 지난 봄과 같은 아이다. 아이의 천진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문득 섬뜩하다. 먼 발치서 그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황망한 표정이 아이가 앞으로 지고 갈 업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린 여인에게서 스스로의 과거와 마주쳤던 겨울처럼 이 봄에도 그는 아이의 미래에서 자신과 마주친다. 도돌이표처럼 맴돌고 맞물리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인생들. 그러나 결국 온전히 홀로 지고 가야하는 각자의 업. 자신과 마주친다는 의미는 그 업을 고해하는 동시에 인정한다는 것이다.

앞날을 ‘기억’하는 결말이란, 그렇지 않은 결말보다 닫히고 안정적이다. 이런 결말 역시 늘 뜻밖의,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길의 복판에 인물들을 놓아버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 감독의 전작들에서의 결말과 다르다. ‘쉬어가는’ 기분으로 만들었다는 그 자신의 변처럼, 이번만큼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휴식을 허락하는 것일까.

그들이 숨쉬는 곳, 늘 흘러 다니고 따라서 늘 풍경이 변하지만 종내는 갇히고 고여 있는 산 속 호수 위 암자. 광활하고 촘촘한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한낱 점 같은 그 곳을 불상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는 마지막 멀고 먼 부감 쇼트가 못내 애처롭다.

(총 2명 참여)
gaeddorai
풍경은 좋드라   
2009-02-21 21:52
ejin4rang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작품   
2008-10-1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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