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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 속엔 사랑이 있을까?
| 2003년 5월 2일 금요일 | 임지은 이메일

영화 <별>이 알퐁스 도데의 동명의 소설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스러운 세상사를 피해 산 위로 허위허위 올라온 영우(유오성)는 모두 잠든 밤 홀로 양떼를 지키는 ‘목동’처럼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들의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어깨에 스륵 머리를 기대고 잠든 수연(박진희)은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아니란 말인가? 거기다 영우의 유일한 가족인 애완견의 이름이 ‘알퐁스’라는 데까지 이르면 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노골적일 만치 가까워져 버린다. 사족이 되겠지만 ‘알퐁스’가 양치기개인 보더 콜리 종이라는 점까지도 소설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이고.

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바 있는 알퐁스 도데의 <별>은 아마도 <소나기>와 더불어 우리의 사춘기 시절을 가로지르는 가장 순결한 사랑의 원형일 것이다. 저 <별>의 마지막 구절,“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가 던져주던 여운에 가슴 떨어보지 않은 소년소녀가 과연 있더란 말이냐. 그런가 하면 노의사를 들쳐업은 영우가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을 헤쳐갈 때 관객은 또 한 번 퍽 명징한 기시감을 겪게 된다. 흔히 눈을 꽃에 비유하지만, 하얀 눈밭을 꽃밭으로 치환한다면 이건 그대로 <메밀꽃 필 무렵>. 바야흐로 유년시절 어느 밤의 꿈처럼 곱고 슬픈 두 이야기의 조우다.

<별> 그리고 <메밀꽃 필 무렵> 두 소설과 영화 <별> 사이의 긴밀하기 짝이 없는 연관성을 굳이 이렇게 길게 지적한 것은 영화의 독창성에 대한 시비를 끌어내고자 함은 물론 아니다. 덧붙여 그런 종류의 논의는 영화가 의도한 바와도 명백히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별>이 뿌리박고 있는 토대는 소설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 소설을 접했던 만든 이의 기억이기 때문. 그리하여 영화가 소설, 아니 소설의 기억으로부터 가져온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숨막힐 듯한 자연의 풍광―따라서 현실과는 다분히 동떨어져 있기도 한―과 결벽적인 사랑이다.

사람들 사이에 유들유들 부대낄 만한 사교성이 전혀 없는 데다 흔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영우(유오성)의 직업은 통신회사 엔지니어. 고아로 외롭게 자란 그에게는 개 알퐁스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혼자만의 생활에 자족하는 듯 보이는 남자의 마음속은 얼핏 고요히 얼어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별들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비밀’을 어린 소녀에게 속삭여줄 만큼 감성적인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도 생애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이 찾아온다. 대체 불가능한 어떤 사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곧 마음속에 영원히 결핍된 공간을 지니게 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사랑이 행복만은 아니라는 진리는 영우에게 역시 마찬가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이 좌절되었을 때 그를 둘러싼 일상은 지옥으로 다가오고, 영우는 스스로를 내몰며 겨울산으로 향한다.

메밀꽃 흐드러진 꽃밭이든,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산꼭대기든,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이건 간에 현실의 남루한 공간을 떠나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은 주인공 영우의 포부이자 감독의 야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 더해 '휴먼 멜로‘를 표방하는 영화는 남녀 주인공의 연애감정 뿐 아니라 영우가 받지 못하고 자란 부모의 사랑에서부터 인간애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사랑을 그 안에 담고 싶어하는 욕심을 내비친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 사바세계와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목적지인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는 동안 영화가 심어놓은 설정들은 군데군데 부딛치며 혼선을 일으킨다. 주인공 영우가 스스러운 인간사와 속세에 대한 마지막 애정까지 끊어버리도록 하기 위해―편파적인 서술이 되겠으나, 달리 적합한 표현을 찾아내기 힘들다― 닥쳐오는 사건들은 억지스런 냄새를 풍기며,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눈밭을 달리던 영우와 수연에게 갑자기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도 그와 다르지 않다.

영화 <별>이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 욕심은 적어도 순수해 보인다. 덧붙여 영화의 목적이 눈이 첩첩이 쌓인 산처럼 현실과 격리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있지는 않았을 것. 오히려 그와 반대로 동화처럼 순결한 사랑을 통해 남루한 현실을 꿈에서 깨듯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별>이 가지고 있던 포부였을 것이다. ‘선의’가 영화의 장점이라면 그 의도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단점이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뜬금 없이 “개미를 소재로 했다고 해서 개미적인 소설은 아니다”라던가 뭐 그 비슷한 혹자의 독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드넓은 설원을 무대로 했다고 해서 ‘큰 사랑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작 연애질 이야기’에 그치지 않도록 사랑의 범주만 확대시켰다고 해서 영화가 내포하는 사랑의 의미 자체가 거대해질 수는 없는 것. 대의와 시행착오의 안타까운 혼선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섬세한 감정의 결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 만다.

1 )
ejin4rang
인상적이다   
2008-10-1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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